가끔 시간이 빠르게 흐를 때가 있다.
11월의 조각들
어느 날 유난히 신호등이 빠르게 바뀌는 날이 있다. 그날은 잠깐 그 찰나만 빠르게 흐르는 게 아니라 신호등을 기다릴 때마다 내가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한 것처럼 쏜살같이 흘러버린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잡생각이 많아져서일까, 가게에서 밥을 먹는 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쯤 초록불이 반짝인다. 하여간 그런 날은 기분이 묘한 느낌이 든다.
11월도 벌써 다 지나가 버리고, 포근했던 낮의 온기가 온데간데 사라져 버려 냉기가 햇살의 따스함을 이겨버리기도 한다.
늦가을의 알레르기성 비염은 다행히 이틀 만에 약을 써서 다 깨끗이 씻겨버렸다. 찬바람을 그렇게 좋아하던 나에게는 그 이틀이 큰 시련이었다. 멈출 수 없는 콧물은 내가 느끼는 몸의 열기를 무시한 채 나를 싸매게 만들었다. 하지만 약발이 잘 들었는지 나의 고생이 무색할 정도로 콧물은 이내 그치고 말았다.
10년 전 남미에서 동고동락하며 1년을 타지에서 가족같이 지내온 누나는 언제 예쁜 딸을 낳고 이렇게 결혼을 했는지. 누군가의 결혼 소식에 기쁘고 감사한 일이라 느끼는 한편, 언제 또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남편 분 측의 결혼식 참석자로 유일한 외국인 친구 분과 우연히 마주 앉아 피로연을 즐기다가 스페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생존하기 위해 10년 전 몸으로 부딪히며 배운 스페인어가 아직까지 입에서 나오는 걸 보고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그때의 추억에 잠겨 나도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흐른 줄 모르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어렸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주변 사람들의 결혼을 하나둘씩 축하하게 된 나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결혼식 갈 때마다 매번 느끼곤 한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간 곳은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은 우리 작은누나네 조카의 돌잔치였다. 내가 선물한 모자목도리가 참 잘 어울리는 귀여운 조카가 벌써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언젠간 또 눈 깜짝할 새 '삼촌!'이라고 나를 불러주겠지.
저렇게 열정적인 나일 때가 있었는데, 아직까지 인터뷰 영상으로 고통받고 있다니 싶다가도 저게 벌써 재작년인가 돌아보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싶더라. 그때와 지금의 나는 뭐가 달라져도 달라졌을 텐데, 과연 좋은 쪽일까, 나쁜 쪽일까 고민하게 된다.
'이번 기수는 너네보다 훨씬 잘하지. 비교가 안 돼.' 라며 장난이었다는 그녀의 말에 퍽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별 것 이루지 못한 지금의 나를 보고 누굴 탓하랴. 여유롭지 못한 마음을 뒤로하고 제대로 우리를 이끌어주지 못했다며 잠깐 그녀를 탓해 본다.
나름 패기 넘쳤던 올해의 시작이었는데, 한 해가 벌써 저물어가고 있다. 돌아보니 무엇이 남았나, 무엇을 이루었나 집착하게 된 요즘이었지만, 흘러가고 나면 그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다시 느껴본다.
급한 일 마무리하고 갈게, 아픈 거 괜찮아지면 갈게, 네 시험 끝나면 갈게, 온갖 피치 못할 변명들을 늘어놓다 결국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어 올해가 가기 전에 먼 친구를 보러 갔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더라도 좋은 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과, 어지러운 상념들을 쏟아내기에 충분한 풍경에 취해 언제 이렇게 변명들을 늘어놓고 드디어 하나둘 수거하나 싶었다.
우리 동네 은행나무는 아직 노란빛을 머금고 굳건히 나뭇가지에서 버티고들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이곳의 은행은 잎이 언제 달려있었냐는 듯 낙엽이 우수수 쏟아져 이미 온 바닥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을이 떠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미련과 흔적을 남기며 '나 여기 있었노라' 하듯 알아달라는 말이었을까. 그렇게 앙상한 가지를 보고 있자니 내가 가진 지나간 날들의 미련들도 얼른 중력을 못 이기고 우수수 떨어져 나가면 좋겠다 싶었다.
겨울이 지나고 언젠가 다시 올 봄을 기다리며 또 더위를 못 참고 벗어던질 여름을 차라리 기다리고 싶다. 그토록 좋아하던 겨울은 나를 더욱 꽁꽁 싸매게 하지만, 그만큼 빨리 내 마음에도 봄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한 겹 두 겹 감싸고 있다. 결핍에 의한 방어기제로 인해 얼른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 처절한 발악이었다. 그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쓸데없는 후회가 내 발목을 잡겠지만,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안정감을 찾고 싶은 나에게는 얼른 이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는 시점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다들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멍하니 빨간불을 앞에 둔 채 멈춰있었다. 속절없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잡아두지 못해 나는 매번 아까워하지만,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뜨면 언제 바뀌었나 하고 초록불이 나를 비추고 있을 날을 바라보며 오늘만큼은 나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