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낚시

푸드 에세이 #2

by 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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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와 삼겹살 그리고 라면

네 편의 푸드 에세이는 공모전에 수상해 상금을 벌어보고자 했던 노력입니다. 총 4편을 썼지만 입선도 못하고 광탈했습니다. 역시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3000 자라는 분량에 맞춰 나름 재미있게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마음은 역시 어렵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첫 술에 배부를 수 없고 또한 스마트해야 합니다. 끝없이 개선점을 찾아야 합니다. 개선점을 찾기 위해 가장 중요한 1원칙은 개선점을 찾아낼 수 있는 완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글이라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라도 마감시간 내에 제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 푸드 에세이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유야 차고 넘치지만 타인에게 잔소리 들어야 더 성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인 중에 삼겹살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고 많은 삼겹살 사랑꾼 중에 나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이다. 어렸을 때는 아침 밥상에 삼겹살이 없으면 투정을 했다. 햄도 아니고 삼겹살 투정을 했다. 해외여행을 다녀와서도 제일 먼저 찾는 음식은 김치찌개도 된장찌개도 아닌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었고, 군대에서 외박이라도 나올라 치면 먼저 들르는 곳은 삼겹살 집이었다. 상추쌈에 삼겹살 한점 올리고 간장양파절임 하나 마늘 한점 그리고 흰쌀밥 조금 쌓아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론 소주잔을 잡는다. 크 바로 이맛이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거의 매일 삼겹살을 먹는다. 그런 내가 기억하는 가장 맛있었던 삼겹살이 있다.



우리 집은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평범하게 네 식구가 살았다. 네 명이 모두 나들이를 갈 때도 있었지만 어머니와 누나는 번거로운걸 워낙 싫어했던 탓에 아버지는 보통 나만 데리고 산을 타거나 낚시터로 데리고 가셨다. 낚시는 원투낚싯대를 이용한 민물낚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허름한 텐트 하나에 얇디얇은 이불 하나 들고 밤낚시를 다녔다. 여름의 초입이었기에 가능했지 가을이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면 아마 입이 돌아갔을 것이다.



낚시를 가기 전엔 늘 같은 장을 봤다. 소주와 삼겹살 그리고 라면. 그 흔한 과자 하나도 사지 않는다. 뭐 어떠랴 내 사랑 삼겹살이 있는데 과자 정도는 참을 수 있다. 낚시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텐트를 친다. 어릴 때부터 이런 걸 좋아해서 아버지를 거들어 같이 텐트를 친다. 고사리 손에도 불구하고 척척 잘 해냈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텐트를 치고 나서야 아버지는 낚시채비를 하신다. 긴 장대 낚싯대를 대여섯 개 정도 날린다. 그중에 하나는 내 몫인데 나는 몇 번이나 줄을 끊어먹고서야 겨우 하나 제대로 던질 수 있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신명 나게 날아가는 낚시추를 바라보면 마치 하늘을 가르는 명검을 휘두른 것만 같이 설렌다. 그래서일까. 나는 물고기를 낚는 것보다 낚싯대를 던지는 행위 자체를 훨씬 좋아한다.



민물낚시는 낚싯대를 다 던지고 나면 이제 할 일이 없다. 부표가 움직이며 입질이 있을 때까지는 멍하니 가만히 있는 것이다. 지루함의 시작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타이밍은 절묘하다. 이때쯤 되면 해가 산을 넘기 시작한다. 드디어 삼겹살을 영접할 시간이 온 것이다. 삼겹살을 꺼내고 소주도 꺼낸다. 마늘도 꺼내고 불도...?!?! 심장이 쿵쾅쿵쾅 거린다. 석쇠가 없다. 15년 인생의 허망함과 안타까움이 호숫물이 쓸려 내려갈 만큼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온다. 하지만 나에겐 맥가이버 같은 아버지가 있다. 고심 끝에 찾아낸 방법은 숯불 위에 낚싯대를 고정하는 넓적하게 생긴 틀을 두고 그 위에 삼겹살을 올려 구워 먹는 것이었다. 얼핏 얇은 삽처럼 생긴 이 틀은 삼겹살 한 줄 올리기에 충분했다. 아버지는 천재가 틀림없다. 그리고 아찔한 소주 한잔. 15살 중학생 아들은 아버지와 소주 3병을 대작한다. 내 주량은 그때 확인되었다. 내 인생 최고의 삼겹살은 알루미늄인지 철인지 구분도 안 되는 낚싯대 고정틀에 구워 소주 한잔과 먹는 것이었다. 당시까지도 석면 플레이트에 은박지를 씌워서 고기를 구워 먹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건강이니 위생이니 전혀 따지지 않았다. 걱정되는 건 약간의 흙이 묻어 있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후 imf가 찾아왔다. 우리 집도 국제 금융이라는 화마에 바짝 구워져 타이밍 놓친 삼겹살처럼 타버렸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격하게 다투셨고 결국 이혼하셨다. 한때는 제법 잘 나가던 안경공장 사장님이었던 아버지는 공사 현장에 다니기 시작하셨고 지나치리만큼 비관적이 되었다. 그 비관의 화살은 같이 살고 있는 아들에게 향했고 참지 못한 나도 아버지를 떠나고 말았다. 군대 전역을 고작 100일 앞둔 휴가날이었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아버지를 저주하며 떠났던 나는 평생 의절을 각오하고 살았지만 누나는 간간히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 사이 30대 때 수술했던 구강염이 구강암으로 발전했고 두 번의 수술을 했다고 한다. 세 번째 수술을 앞두고 일종의 화해의 손길을 누나에게 요청했다. 이번이 마지막 수술이라고 한다. 잇몸과 광대 쪽의 뼈를 거의 드러냈기 때문에 더 이상 손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40대의 무기력하고 비관적이던 아버지는 훨씬 더 야위었고 수술로 인해 얼굴 한쪽은 뭉개졌다. 아저씨였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서였다. 살아 계신 동안 지금보다 조금 더 연락하고 조금 더 만나자고. 1년에 한 번 그리고 다음 해는 두 번.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연락드리고 1년에 두 번 정도는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고 있다.



아버지는 내 고향 대구에서 약간 벗어난 영천에 살게 있다. 조그마한 아파트를 얻었다. 최근 아버지를 만나러 가면 항상 소고기를 준비해 두신다. 영천이 소고기로 유명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살림살이가 좀 나아져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인천에서 영천으로 먼 길 오는 아들을 위해 더 맛난 걸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솔직히 소고기를 앞에 두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아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었고 아버지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세 번의 구강암 수술을 마친 아버지는 질긴 고기를 드시지 못했다. 평소에는 거의 선식 위주로 드셨고 혹시라도 외식을 하게 되면 식사를 거르시거나 부드러운 음식만 겨우 드신다. 질긴 삼겹살을 씹어 삼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먼 길 오는 아들 고기는 먹여야겠기에 준비한 게 소고기였다. 지난겨울에야 그 사실을 알 게 되었다. 이제 다시는 낚싯대 고정 틀 삼겹살 구이는 먹을 수 없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랑 고기 한점 같이 먹을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때가 오면 이 추억도 웃으면서 말할 순 없게 된다.



누구가 말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세상이 1도 정도 어긋나 보인다고. 조금이라도 정정할 때 한 번이라도 더 연락드려야겠다. 말 나온 김에 지금 해야겠다. 이번엔 안심을 먹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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