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 C

턱 괴는 여자 5.

by 구일삼

3 장래에 뭐가 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써서 내야 했던 적이 있다. 나는 미래까지 것도 없고 당장에 하고 싶은 공부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페미니즘을 배울래요. 장래에 멋진 할머니 페미니스트가 될래요.

커다란 종이에 쓰고 싶은 글자들은 그게 다였다. 그러나 종이를 앞에 열아홉의 나는 그것을 수가 없어서, 지우개로 글자들을 지웠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하고만 있었다. 종이는 아무리 대단해봤자 학교생활기록부의 종합의견 칸을 위해 급하게 마련된 엉성한 조사지였는데도. 나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려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무서웠나? 아마도 그랬던 같다. 혹시까만안경을쓰고있는것처럼세상을그런식으로만보게된거아닐까?내가정말과민반응을하고있는거아닐까?상관없는일들도이계산식에억지로끼워맞춰답을내려고하고있는것은아닐까?종이를제출하면선생님들이이글을보게될거잖아그럼내일즈음에는교무실에불려가게되겠지어떡하지?아그냥제출하지말까?

당시의 내가 그렇게까지 망설였는지 답은 간단하다. 자꾸만 깊숙한 어딘가에서부터들이 기어올라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A 진로를 정해야 하는 길목에 나에게은행원이 되어서 그나마 대접받고 사는 여자 인생에 제일 좋은 '이라고 했다. 나는 거기에 대고, 남자인 A 여자 인생을 멋대로 운운하는 기분 나쁘다고 답을 했다. 그러자 A : 여자가 일반 회사원이 되면 남자보다 월급을 훨씬 적게 받는 알고 있느냐. 생각해서 해주는 말을 그렇게 받는 무슨 경우냐. 그래서 : 임금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알고 있고, 그게 위한 말이 아니라는 증명하기 위한 공부를 거야. 갑자기 B : 네가 억울한 알겠는데 그게 어쩔 없는 세상이야. 한번 : 엄마가 아닌 여자들은 엄마가 예정이라는 이유로 돈을 적게 받고, 엄마인 여자들은 아예 일을 포기하게 되는 세상을 그냥 억울해하고 끝내야 ? 내가 그나마의 대접을 위해서만 살아야 ? 그리고 , A. 은행원인 여자들의 인생을 네가 알아봤자 얼마나 안다고 마음대로 갖다 붙여. 그러자 마지막으로 B : 그래 그래 알겠어. 알겠는데 그렇다고 나중에 페미니즘 같은 이상한 하지마.


A 뭐가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걸까? A 남자로 태어난 순전히 우연인데 그게 스스로 해낸 일생의 위업인 굴었던 걸까? 그리고 나는 A 갖다 뱉은 하나의 문장을 서너 문장의 분량으로 반박해야 했던 걸까?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도 순전히 우연인데 나는 나도 똑같은 인간이라고 끊임없이 증명해내야 했던 걸까? 애초에 B 내가 이미 페미니스트라는 모르고 말들을 뱉은 맞을까? 페미니즘을이상한 으로 치부할 있는 역시 권력이라는 일일이 설명을 해줬어야 했을까? 아니, 사실은 B 알아서 그렇게 대놓고 마음을 짓뭉갠 아닐까? 억울함을알겠는데 페미니즘은 이상한 되어 버리고 걸까? 날의 대화는 내가 아무 문제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괜히 꼬집고 들쑤시는 예민한 여자애가 되면서 끝난 걸까. 벽은 이렇게 크고 단단하고, 당연할까. 항상 목소리들은 벽에 부딪혀 아프게 돌아오기만 할까. 세상에 처음 도착한 모습으로 삶의 대부분이 결정되고 마는 걸까. 어떤 행진 앞에 벽을 자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존엄은 이토록 연약해야 하는 걸까. ? 대체 그래야 하는 걸까.

열아홉 책상에 쌓여가는 괴로운 일기들.


그해 겨울,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걔가 너를 좋아해서 괴롭히는 거라는 말을 듣는 여자, 늦은 밤에 집안 남자에게 빨리 나와 달라는 연락을 하는 여자, 택시를 타고 가라는 말을 그게 무섭다고 거절하던 여자. 전부 . 그리고 나는 어쩌면 뒤로 맘충이라는 말을 듣는 여자, 성추행에 어떻게 대응할 거냐는 면접 질문에 진짜 대답을 숨기는 여자, 뜻대로 되는 문제집 푸는 것밖엔 없는 여자, 전부가 수도 있는 거다. 이런데도 내가 그냥 예민한 여자애냐?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데 세상이 거기다 대고 그냥 내가 여자인 잘못이라고 말하는 같다. 뻐큐. ( 말도 쓰기 싫어.) C 김지영이 답답하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내린 남학생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말을 했으면 됐다고, 직장 상사의 불편한 말들을 속에 담아두고만 있냐고, 고발하면 되는 아니냐고, 없이 미소 짓지만 말고 집안 어른들에게 집안일을 자신이 없다고 그냥 얘기를 하면 되는 아니냐고. 나는 아주 오래 설명해야 했다. 김지영 씨는 말을 아니고, 거라고. 역시 많은 날들을 그저 참아내고 있다고. 산책을 포기하는 마음이, 밖의 화장실을 걱정 없이 가지 못하는 마음이, 정말로 세상의 절반을 이루고 있음을 . 입을 다무는 C. 슬펐다. 책이 좋다는 말이 벌렁거리는 심장과 후들거리는 다리를 통해서만 가능한 날들이 계속되는 것이 지겹다.


그해 , 어떤 배우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다

TV 잘만 나오던 그가 성폭행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얼마 뉴스가 떴다. 그리고미투가 사람을 죽였다 말이 한동안 떠돌고 있다. 미투 운동을 마녀 사냥이라 이름 붙이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나는 여기에 산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쥐어주고 침묵을 요구해 세월을 뚫고 용기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물결. 어떻게 감히 여기에마녀 사냥 운운할 있지? 끔찍하다. 무작위의 여자들을마녀 프레이밍하기만 하면 손쉽게 죽일 있었던 중세의 야만이, 어떻게 21세기에, 그것도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부활할 수가 있지. 화를 내는 사람들 틈에 그래도 어떤 믿음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입의 방향이 전혀 다른 곳을 향하는 사람들을 동시에 목격해야 한다. 수능 연계 교재에도 미투 운동으로 밝혀진 문단 성폭력 가해자의 작품이 하나 있다. 선생님은 작가의 작품이 수능에 나올 리가 없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다루지 않겠다고, 크게 엑스 표를 치라고 했다. 누군가는 공부할 거리가 줄어들었다고 좋아했을까? 마음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는데. 내가 엑스 표는 그게 봐도 되는 작품이라서가 아니었다. 그건 보지 않아아 하는 것이었다. 우연한 권력을 다른 이의 존엄을 부수는 사람의 글이었다. 끔찍했다.


그해 여름, 리베카 솔닛의 내한 인터뷰를 번이고 찾아 읽으며

쨍한 햇빛이 몸을 조이고 뾰족한 말들이 정신을 찔러오는 때다. 김지영이 답답하게 구는 같다는 말을 들어놓고도, 미투를 꽃뱀한테 물린 재수 없는 남자들의 이야기로 만드는 사람들을 봐놓고도 멀쩡하기란 불가능하다. 주문처럼 외워야 한다. We’re winning.


그해 가을, ‘여풍이란 말을 듣고

이영자, 송은이, 김숙, 박나래, 장도연여성 예능인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대중 문화계의여풍 거세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MBC 연예대상에서 이영자와 박나래의 후보 경쟁 구도가 이미 예고되고 있다. 여성 예능인만으로 이루어진 후보 격돌 자체가 처음이라 감격스럽다. 그런데 여풍이라는 단어는 기세를 불다 가는 바람으로 부르는 같아 싫다. 수많은 남성 스타들이 여러 해에 걸쳐 대상을 거머쥐는 동안 이영자가 대상 후보로 점쳐지기까지 걸린 세월은 20년이 넘는다는 사실이 어물쩍하게 지나가는 같아 싫다. 나는 불어오는 여풍에 안심하면서 살지 않을 거다. 성평등에 동의한다고 말하면서도 어쩌다가 남자로 태어나 우연히 누리는 것들을 끝끝내 놓지 못하는 마음을 설득하면서 거다. 어쩌다가 여자로 만들어져 우연히 겪는 일들이 억울한 마음을 설명하면서 거다. 이어 부는 다음 바람으로 거다.


페미니즘을 배울래요. 장래에 멋진 할머니 페미니스트가 될래요. 나의 포부는 분명 색이 진해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힘을 잃어가고도 있었다. 이어 부는 다음 바람으로 거라는 다짐을 적어놓고도 틈틈이 We’re winning 주문을 외워야만 버텨지는 날들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각성을 선택해야 할지 절망에 빠져야 할지를 정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줄곧 괴로워했다. 그러니까, 열아홉은 온통 수렁이었다.


그런데 이내, ‘그런데 찾아왔다. 그해 마지막 겨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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