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 괴는 여자 6.
열아홉 그해 대입 면접을 준비하던 수업에서 ‘미소지니’를 배운 날이 있다.
번역어인 ‘여성혐오’를 떠올리면 ‘혐오’라는 단어 때문에 미소지니가 여성에 대한 증오와 같이 부정적인 감정만을 의미한다고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사실 그건 여성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부정하고 여성을 객체로 만들어 배제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라고 배웠다. ‘나 여자 싫어’가 아니라 ‘여성분들을 위해 아기자기한 디자인으로 출시된 모델들은 이쪽입니다’ 역시 문제라는 얘기.
힘이 빠졌다. 아, 이렇게 수업 시간에 얘기할 수 있는 거였구나.
그즈음에 유튜브에서 ‘페미니즘 할 바엔 암에 다시 걸리는 게 낫다’라고 말하는 사람한테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영상을 본 참이었다. 주변의 말들에도,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말들에도 일일이, 또 누누이 움츠러드는 어깨였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수업 시간에 페미니즘을 배우니까 그대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혼자 책을 읽는 걸로는 다잡아 지지 않던 마음이 그제야 단단해졌다. 뿌리를 주욱 뻗어 드디어 토양에 자리를 잡고 선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수업은 H의 야자가 끝나는 시간과 딱 맞게 떨어지곤 했다. 그날 미소지니를 배운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종이 뭉치들을 들고 기숙사 4층 왼쪽 복도에 있던 H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니까 사실은 ‘딸바보’도 웃긴 말인 거지.
-오. 왜?
-아들이랑은 다르게 딸은 아버지의 통제와 보살핌이 전제되어야 하는 연약한 존재라고 가두는 거라.
-아들바보는 그냥 파생어고.
-어. 남성은 다시 그런 딸을 보호하고 사랑해 주는 주체로서 부각되고.
-명칭만 딸바보지 사실 딸은 중요하지 않은 단어다 이거네.
H는 의자에서, 나는 바닥에서. 강의 내용을 받아 적고 그 옆에 내 생각도 쓰느라 볼펜 똥이 다 번진 채로 엉망인 종이들을, 우리는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 밤’은 내게 무한한 기쁨이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이야기들을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었다고, 나는 아직도 그 행운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다. 그날 그 수업을 안 했다면, H가 내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나는 짐을 이고 가는 지게꾼마냥 휘청이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겠지. H의 방과 우리의 밤.
나 대학에 가서 페미니즘을 배울 거야. 모험을 앞둔 선장이 되어 씩씩한 목소리로 읊은 대사. 이 분노와 불만이 제대로 쓰일 만한 곳을 찾아야겠어. 10년 뒤에 무슨 직업을 가질 지에만 몰두하는 건 바보 같아. 10년 뒤의 내가 부끄럽지 않을 공부를 해야겠어.
유일한 관객이었던 그 애는 기뻐해줬고, 덕분에 나는 벌써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사실 ‘그 밤’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H의 방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됐던 날들은 이미 어느 겨울에 묻혀 잠든 뒤지만, 우리의 밤은 아직도 흘러간다.
섣불리 나의 상실이 된 어떤 죽음들이 되돌아오는 날마다, 끔찍한 말들을 속에 담아두고만 있기는 싫은 순간에, 겁내지 않고 끝끝내 맞선 일을 남겨두고 싶은 어느 날과 죽음으로 도망친 남자의 소식이 들려오던 새벽에.
메신저 창에는 다 담기지 않는 처참한 기분과 멋대로 흐르기도 하는 눈물을 영원하게는 두지 말자고, 그런 약속들로 끝맺어지는 밤이 있다.
비참한 대화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는 왠지 아주 오랜 세월을 관통해 온 늙고 낡은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그리고 흐른 적 없는 시간에 슬퍼하기도 잠시, 나는 어김없이 지쳐야 한다. 그런 서글픔이 그 어느 밤부터는 내 도처에 가득하다. 숨통이 딱 하나여서, 내려온 동아줄이 딱 하나여서, 나는 늘 절박한 심정으로 그 애를 붙잡고 자주 울었다. G, 있지, 세상에 얼마나 많은 밤들이 위태롭게 흘러가는지 너는 아니.
하지만 시간을 돌려 우연을 정할 수 있게 되더라도 나는 지금을 선택했을 거다. 일상이 된 서글픔을 가득 마주 안겠다고 다짐했을 거다. 세상에 딱 하나 있는 방으로 달려가서 그제야 울음을 토해내는 수고로움을 견디겠다고 했을 거다. 기꺼이 그랬을 거다. 왜냐하면 우연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우연한 불행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까. 그 무지마저도 영원히 모른 채, 내가 밟고 서 있는 곳이 누구의 불행인지를 헤아리지 못한 채 사는 거. 난 싫어.
누군가의 우연은 다행과 경사가 되지만 누군가의 우연은 태어날 수 없음을 극복하고도 때때로 비극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그 결말이라면, 세상은 비정함을 넘어서 너무 기괴한 것 아닌가. 의사가 판단한 생식기의 겉모양 하나로 우리가 무슨 색 옷을 입게 되는지, 우리가 로봇을 갖고 놀아도 되는지 아니면 어린이 화장품 세트를 갖고 놀아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머리카락 길이는 어때야 하는지가 영원히 전부 결정된다니. 우리가 ‘다 커도 애’라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 사고뭉치로 살아도 되는지 아니면 3살 무렵부터 조신하지 못하다고 지적당하며 살아야 하는지 까지도.
이걸 깨닫고 나면 어떤 시대들은 분명 우스워진다. 그렇지만 어떤 우연들은 아주 달콤하고, 시대는 그렇게 끝난 적 없는 거야. 여자의인생은은행원으로살때가가장좋다는말을하며 함부로 거들먹거릴 수 있고 관련된책하나를읽지않고도페미니즘은이상한거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고 김지영이답답하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미투운동은마녀사냥이나마찬가지라고 떠들 수 있는 권력. 그 달콤함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 후손들과 또 그 후손들 때문에 진창인 시대가 아직 살아 있다. 이럴 수가.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간절해지는 마음이 서럽다. We’re winning, 안으로 속삭여 본다. 그리고 H, 나 좀 도와줘, 오늘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