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복도와 밤 (2)

턱 괴는 여자 8.

by 구일삼

.

.

.

니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


시간대는 여전히 3. 2000년생들이 받은 국어 수능특강에는 여성주의 작품이 실려 있었다. 기억들 하시는지. 누군가는 경악하는 가운데 분명 감격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 나는 후자였다. 나는 여성주의 챕터가 수업 시간에 마침내 다루어질 순간을 고대했다. 마지막 장에 작품이 실린 거라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작품과 함께 실린 지문이 수업 시간을 타고 읽히게 텐데, 어떻게 기대를 수가 있었을까.

지문의 내용 : ‘여성주의 문학의 역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던 여성과 여성의 시선,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여성의 삶을 조명함. 여성주의 안에서도 분화와 이론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 그중 몇몇을 예시로 데려옴. 김승희 <엄마의 >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성과 억압성을 고발하고 여성을 모성 안에 가두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작품. 김선우의 <빌려줄 > 여성성과 모성을 긍정하고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여성 해방의 길로서 모색하는 작품.

잠깐이라도 문장들이 교실에 머무르게 된다니. 비단 우리 학교뿐만이 아닐 거였다. 수능 공부를 하는 모든 3들은 글을 보게 되겠지. 나는 그런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곤 했다. 심지어는 야자 시간마다 그날 배운 다른 작품을 복습하면서도 페이지를 훌쩍 넘겨 글을 미리 들여다보곤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면, 마지막 장에나마 글을 실은 누군가들과 미지근한 물속에 손을 잡고 함께 누워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와 같을 이름 모를 열아홉들과도 그렇다고 믿었다. 자꾸 쪼그라들기만 하는 손으로 기어코 뒷장을 열어젖혔을 어떤 밤들이 우물 밖에는 많을 거라고 믿었다. 정말이지, 수능특강에 글이 실리다니. 세상은 더딘 속도라도 변하고 있다고, 방향은 분명 앞이라고 누군가 속삭여주는 같았다.


미지근한 온도를 비웃기라도 하는 찬바람이 대뜸 매서워지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수업 시간에 글이 읽힐 때가 왔다.

너는 아주 목소리로 빠르게 글을 읽더니 갈수록 문장들을 흐리멍덩하게 끝맺었다. 그건 교과서에 자주 나온 내용들에나 하는 너의 습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얘기. 속도는 너무 빨랐고 문장들은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렇게제대로 읽지 않음 우렁차게 전시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러면 되는데. 마음이 급해져서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애들이 전부 교재를 향해 고개를 처박고 있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너의 목소리 말고는 내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밖에 들리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네가 수업 시간에 마누라가 부엌일을 못한다며 흉본 적이 있다는 떠올렸을 . 네가 몸에 대해 떠든 놈이라는 떠올렸을 . 글은 이미 끝나 있었다. 지문에 딸린 문제들은 알아서들 풀었을 거라 생각한다는 말이 뒤따랐고 지문에도, 작품에도, 문제에도 아무런 분석이 없었다. 정말? 정말 이렇게 끝이라고?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한참 뒤인 지금 생각해 보니 차라리 그때 끝났어야 했던 같아. 그러면 마음이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너는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런 수능특강에 실리면서 이상한 생각들을 조장해 문제가 거라고 했다. 역차별이라고 했다. 여자만 힘드냐고 했다. 그러자 어떤 애가 남자들은 군대도 가고 가장의 책임도 져야 하는데 남자가 힘들지 않냐고 말을 보탰다. 너는 드디어 자기편이 나타났다고 좋아했고, 이미 여자들이 동등을 넘어선 시대에 이런 수능특강에 실리는 거냐는 말로 마지막 수업을 끝냈다. 당연하게도 뒤의 수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 말도 듣고, 아무 말도 못 한 나는 자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마지막 수업을 이렇게 끝내시죠? 우린 당신에게 같은 학생들인데, 애는 당신 편이라 자랑스레 명명되고 가만히 앉아 있는 나는 교실에서 영영 지워진 건가요? 우리가 정말로 성평등을 지나온 맞다면, 글은 무려 수능특강에 실린 것이고 나는 지금 울고 싶은 것이며 당신은 웃고 있는 건가요? 우린 같은 별에 사는데, 나는 글이 절절하고 당신은 글을 그렇게나 큰소리로 무시할 있는 건가요?

그래, 말들을 니한테 직접 못해서 여기다가 쓰는 찌질이고, 나는입을 다문 거다. 그게 너무 쪽팔렸다.


수업이 끝나고 뒤의 쉬는 시간. 쓰러지듯 엎드려 잠을 청하는 애들이 있었고 나는 다음 수업 교재를 꺼내려 교실 뒤쪽을 지나 복도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속상한 마음은 대충 갈무리하고 사물함 같은 일상적인 일에만 집중하려 했던 , 너의 말에 맞장구를 애들 몇몇 말고는 전부 고개를 처박고 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에. 그런데 J 말을 걸었다.

-표정이 그래

그렇게 말하는 J 표정도 썩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J에게 다시 주었다.

-그러는 니는.

잠깐 정적. 나는 순간적으로 마지막장수업이이따위로끝나서X나짜증나 라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차. J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으면 어떡해. 나는 지레 겁을 먹었고 X발이말을어떻게변명하지 생각을 하느라 얼어붙기 시작했는데, J.

-, 그러니까.


우리 둘은 곧장 복도로 나갔다. 당장 팔짱을 끼고. 교실 밖으로 나간 , 그건 자고 있는 애들이 만드는 고요한 분위기 때문도 아니었고 다음 수업 교재를 꺼내는 일이 급해서도 아니었다. 그건 말에 맞장구친 애들이 교실 안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비장한 얼굴로 살금살금 도망치는 나와 J 꼬라지. 벌써 살이나 먹은 지금 내가 보기에 너무 불쌍하고 너무 사랑스러워서 껴안아 주고 싶다, 둘을.

차가운 공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복도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나는 J 어깨에, J 나의 정수리에 볼을 댔다. 내가 수능특강 처음 받아보고 얼마나 좋았는데. 나도, 이게 뭐임, . 근데 그때만 해도 성폭력 가해자 작품인 모르는 것도 있었네, . , , 진짜 그러네. X

그렇게 멸망한 지구에 둘만 남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마지막 대사를 하나씩 툭툭 뱉고 있었다. 전에는 하지 못했던, 말에 대한 반박을 이제야 우리 둘이 주고받기도 했고. 이렇게는 의미가 없다는 우린 서로 알고 있었는데도, 그냥 끝까지 모른 척했다. 조소를 품은 채로도 말은 쌓여갔다.


그런데 폐허가 지구땅에 우리만 남은 아니었나 .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러 복도로 나오는 여자애들이 있었으니까. 애들은 사람들의 발에 채이거나 녹아버린 눈사람 마냥 퍼져있는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리고 애들은 다시 차가운 복도에 엉덩이를 붙이고 서로의 어깨에, 정수리에 혹은 옆구리에, 허벅다리에 가만히 고개를 뉘었다. J 나는 우리가 패전 병사들처럼 허망하게 여기 앉아있었는지를 부러 설명하지 않았고, 애들 역시 이유를 묻지 않았다. J 나는 애들이 우리 곁에 와서 앉고 눕는 것인지를 대답 없이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질문이 없는 요상한 연대의 감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온통 엉망인 마음들이 슬퍼지지 않기 위해 부둥켜 있었다. 녹아 없어지기 싫어서 다른 눈뭉치를 붙들고 있는 눈뭉치. 다물고 있던 입술을 책망하지 말자. 처박고 있던 고개를 스스로 꾸짖지 말자. 창피해야 하는 우리가 아니야. 그런 약속들이 내뱉어진 없이 오갔다.

복도는 내내 추웠다. 우리의 자리가 영원히 여기는 아닐 거라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런데

나는 복도의 시큼한 한기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줄곧 진창 같은 복도에 있었던 같다고 생각했다.

.

.

.

나는 대체 언제부터 거기 주저앉아 있었던 걸까.

이전 07화엉망복도와 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