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1)

턱 괴는 여자 9.

by 구일삼

초등학교 때는양성평등 주제로 하는 글짓기 대회나 그림 대회가 자주 열렸다. 시절에는 여자도 의사가 있고 남자도 간호사가 있다는 식의 표어가 유행. 뾰족한 구두를 신고 립스틱을 칠한 사람이 의사인 그림이나, 머리칼이 짧은 사람이 간호사인 그림을 그리면 대충 잘했다는 말을 듣고 넘어갈 있었다.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많았다는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같다. 학교에 유행처럼 번진 조폭마누라 놀이 (남자애가 여자애에게 나쁜 말을 하고 도망가면 여자애가 끝까지 달려가 잡아서 때린다) 나중에는 남자도 참지 않고 여자를 때릴 있다는 말로 퍼지는데도, 뭐가 됐든 그냥 사람을 때리면 된다는, 애초에 여자를 모욕하는 말들을 죽이라는, 필요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여자와 남자를 머리칼 길이나 치마와 바지, 속눈썹 길이라던가 구두와 운동화 같은 것들로 구분하는 그림들이 우수작이라는 이름으로 나뒹굴고, 맥락 전체를 잘라먹고 시작하는 엉성한 평등이 새로운 관습으로 내버려 두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현대 사회가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이룩했다는 건지 아니면 앞으로 다 함께 이뤄내자는 건지조차 명확하게 짚고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오늘날의 젠더 논의가 시절로부터 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아직도 사람들은 세상에양성만이 있는 알지 않는가. 지금 이야기도 전제 위에서만 춤을 추고 있지만.


초등학교 4학년 처음 다닌 영어학원.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남학생인 반에 배정되었다. 개만 틀려도 재시험을 쳐야 하는 작문 시험에서 나는 만점으로 통과를 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세 개를 틀려서 수업이 끝난 남아 재시험을 쳐야 했다. 시험 결과는 , 1교시 수업이 끝난 2교시 수업을 받으러 다른 교실로 이동하기 전에 앞에서 각자의 종이를 찾아 가져 가는 것으로 알게 되는 식이었다. 처음 재시험을 치게 , 길게 뻗어나가던 나의 오만이 꺾이긴 했지만, 다시 문장이 개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말라비틀어진 몸에 네모난 안경을 여자애는, 수업시간 이것저것 전부 대답하며 참여점수까지도 만점을 받는 여자애는. 헛기침으로 곧장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2교시 수업 시간에, 앞에 나가 발표를 하던 나를 보고 남자애들이 자꾸만 킬킬킬킬킬킬. 교실은 그리 크지 않았고 소리들을 지껄이는지 바로 귀에 꽂혔다. 오늘 재시험이다 킬킬킬킬킬킬. 애들은 시험 결과를 확인하던 앞에서 자기들 종이를 찾은 뒤에 굳이 이름이 적힌 종이도 찾아봤던 거다.

지들은 맨날 재시험이면서.

생각을 하고 들은 넘어가려 했는데 이제는 소리가 커졌다. 하하호호하하호호하하호호. 웅성웅성웅성웅성. 하하호호웅성웅성. 그건 이제 발표를 듣던 원어민 선생님 귀에까지 꽂혀서 그가 갑자기 그러냐고 묻는 것으로 수업이 끊겼다. 동시에 걔들의 웃음소리들까지도. 나는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애의 눈을 똑바로 야리고는. He just made fun of me. 새끼가 방금 놀린 거예요. 라고 말했다. 걔들은 내가 무슨 말을 건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문장은 ‘photosynthesis (광합성)’ 가르쳐도 일상 영어는 가르치지 않던 한국식 영어 교육의 허점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수업 시간에는 배운 적이 없는 문장, 내가 인터넷에 검색해 직접 찾아본 . 걔들이 한국어를 모르는 원어민 교사의 수업 시간을 일부러 골라 make fun of me 적이 그전에도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르려고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다. 문장을 말하면서 나는 조금 떨렸는데, 그건 세상 처음 보는 숙어를 약간이라도 틀리게 아닐까 하는 범생이다운 작은 불안이었을 , 걔들의 보복이 두렵다거나 하는 문제는 전혀 아니었다. 아무튼 선생님은 걔들을 곧장 혼내셨고 나는 아직도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애들의 멍한 얼굴을 옆에서 가만히 쳐다봐주고 있었다. 보란 듯이 , 재수 없는 년으로 알아도 .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도 울지 않았다. 속이 시원하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후로도 계속 잡소리들을 혼자 퇴치해야 했다. 남자애들은 선생님이 보고 있지 않은 학원 차나 로비 공간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지들이 매일 하는 실수를 내가 어쩌다 한번 하는 날이 때마다 신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지들 실수에, 실력에 아무 말도 얹은 적이 없는데 나는 항상 예의주시 당했다가 표적이 되어야 하지? 당최 이해가 갔지만 거기까지 깊게 생각하기엔 당장에 상대해야 말들이 너무 많았다. 매일매일이 그렇게 전쟁이었다.

그렇다고양성평등교육 시간에 나름 배운 대로의, 여자가 남자보다 못할 없습니다! 하는 생각이 옅어진 아니었다. 그래서 학원 남자애들이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나는 기죽지 않고 꼬박꼬박 맞대응을 했다. 그런데 내가 배우고 믿게 것들과 실제로 부딪히는 세상이 마찰만을 만들어내는 것은 열한 살짜리 애에게 그닥 좋은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정말로.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나는 이제 지치게 된다.

그래 잘났다. 근데 그게 니들이 억울할 이유가 되는 거니? 니들도 학교에서 배웠잖아. 니들이 재시험을 치는 내가 방해해서가 아닌데 나를 미워하니? 내가 시험에 통과하는 니들한테 대체 무슨 피해가 되니? 니들 몇몇이 시험에 통과하는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 나만 째려보니? ‘견제라기엔 우리가 라이벌처럼 실력이 비등비등한 것도 아니고질투라기엔 니들이 기어코 인정하지 않을 거고, 다른 남자애들이 잘하는 것엔 아무런 시기를 하지 않는 니들이지. 새끼 X 멋있어. 이런 말들을 니들끼리는 하잖아. 인정해. 하나잖아. 내가 여자애인 주제에 감히 니들보다 앞서니까 재수 없던 거잖아. 감정 하나로 니들은 하나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었던 거야. . 이제 누가 감정적인 동물이지?

말들을 속에만 담아두고 나는 밖으로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쳐서. 신경 쓰지 않는 들리는 묵묵히 땅을 보거나 하늘을 쳐다보기나 하며. 하지만 땅을 보거나 하늘을 쳐다보는 나를 보고도 걔들은 여전히 수군거렸고 귀엔 말들이 착실히 쌓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느라 얼굴과 몸은 바짝 굳어갔다.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서 많은 힘을 들여야 하는,

지겨운 역설.


나는 점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질문하지 않게 됐다. 냉장고나 정수기를 확인하러 집에 방문하는 기사들이 아빠는 '사장님'이라 부르고 엄마는 '사모님'이라 부르지만 사실 둘의 직업이 같다는 아이러니를, 굳이 캐묻지 않게 됐다. ‘상여자라는상남자 파생어를 두고, 누구는 '남자처럼 터프한 여자' 하고 누구는극히 여성스러운 여자 하며 서로 헷갈려하는 꼴을 보고도 잠자코 있게 됐다. 꼬라지들의 이유는 너무 간단했고 아득했으니까. , , , .


물론모른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었다. 나는 자주 욱했고 다시 말대답을 시작한다. 그리고 영어 학원을 그만두기까지 거의 매일을 남자애들과 싸우며 살았다. 마침내, 전장으로의 복귀. 하지만 당시의 내가 아무리 늠름했다 하더라도 상처는 분명 안으로 곪고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전쟁을 혼자 이기려 애쓰고 있었으니, 마음 성한 곳이 없었다.


<10편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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