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는 사랑을 싣고 (1)

턱 괴는 여자 22.

by 구일삼

괴로움은 넓어지고, 깊어지고.

열아홉 마지막 겨울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았고, 지친 것도 잊은 한껏 기뻐했었다. 여전히 꿈에 부풀어 살아도 다시는 그때만큼 해맑을 수는 없을 거라는 회상을 감히 그리지도 못할 때였다.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내게 필요한 공부를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차별과 혐오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보일 거라는 , 그래서 갈수록 괴로울 거라는 , 아직은 모를 때였던 거다.

넓게, 깊게,

내가 괴로운 만큼 시야는 넓어지고 있었다. 나는 시야를 발판 삼아 세상을 직접 물어야 했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나는 유년기와 청춘을 붙들어 매고 있는 오래된 관습들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오래된 관습들이 여즉 살아있는 이유를, 오래된 관습들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상경을 우울하게 받아들이게 됐었지? 서울과 고향의 간극 적응 불가할 정도로 컸기 때문이지. 그럼 서울이 저만치 위에 있던 이유는 뭐였지? 서울이 정답이라는 말이 진리인 퍼졌기 때문이지. 나는 외로움의 원인이 연애라고 믿는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지? 내가 연애를 못해서 외롭다고 착각한 이유는 뭐였지? 연애를 하지 않는 자는 루저라는 말이 진리인 퍼졌기 때문이지. 나는 목숨은 알아서 챙기는 조신한 여자애로 살기를 강요받았던 거지? 청춘이 청년이 아닌 '아가씨'로만 살아지는 슬픔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뭐였지? 여자는 그런 존재라는 말이 진실인 퍼졌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그런 말들은 어디를 통해서 퍼지고 있었지?

어디' 세상의 창구라는 이름을 쓰고 감히 어떤 말들을 퍼뜨리고 있었지? 그래도 단단한 벽을 무엇이 단단히 만들고 있었지?

나는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았다.


바보상자! 거기 서라.


그러니까 TV 많은 장면들이 누구의 시선으로, 누구의 공감으로 비치고 있는지, 정말 뭉개고 있는 누구의 생각이고, 누구의 관점인지, 그런 것들은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는 순간, 어느 좋게도 떠올리지 않으면 그만인 그저 그런 것들이 되어버리고 마는, 그런 .

TV 보자. 치지직.

21세기 로맨스 드라마가 방영 중이다.


여자 주인공(이하 '김여주') 오늘도 남자 주인공(이하 '차남주') 고백을 기다린다. 김여주는 차남주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데, 모두에게 불친절한 탓에 싸가지없다는 평가를 왕창 달고 사는 차남주가 이상시리 자신에게만은 친절하기 때문이다. 차남주는 정말로 김여주를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주위의 모두가 김여주에게 그건 착각일 거라고 말을 얹는 상황이다. 그도 그럴 그의 친절은 경계가 모호해서, ‘너 같은 여자는 봐도 뻔하다 막말에 굴하지 않고 따뜻한 말로 화답하는 김여주를 보고 '혼자' 두근거린다던가 서브 남자 주인공(이하 '박섭남') 하하 호호 웃고 있는 김여주가 순간 밉게 보이는 바람에 너도 결국 그런 여자였다고 막말을 뱉고 혼자 괴로워한다던가, , 그런 식이었다. 김여주는 차남주 씨의 재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차남주의 눈빛 속에 어딘가 상처받은 다섯 살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용케도 발견한 참이다. 그래서 같은 여자 어쩌구로 시작하는 차남주의 상소리를 듣고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도 정도가 흐르면 전혀 개의치 않고 환하게 웃어 준다. 여기서 박섭남은 김여주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모하고 있는데 김여주는 당연히 이걸 모른다. 그런데 박섭남과 서로 안면을 얼마 사이인 차남주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미 파악이 끝났다. 이건 사랑하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어쩌구이며 '그런 데에는 둔한' 김여주 씨는 그들만의 신경전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마냥 해맑게 웃기만 한다. 김여주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일단 차 씨와 박 씨 자기들끼리는 누가 김여주를 가질 것인지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김여주가 차남주한테서 막말을 듣고 울고 있는 굳이 우연하게 목격한 박섭남이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거냐며 겁나게 윽박지른다. 하지만 결국 박섭남은 자신을 향하지 않는 김여주의 마음이 너무나 보인다며 김여주를 놓아주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번만'이라고 중얼거리며 잠들어 있는 김여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댐으로써 자신의 오랜 짝사랑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데, 아마도 이게 성추행이라는 모르고 있는 같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여주는 잠들어 있던 아니었고 자신에 대한 박섭남의 사랑이 오래되었다는 얘기를 어쩌다 전해 들으며 내적 갈등을 겪는다. 차남주는 마음이 급해져서 이제부터는 언어폭력을 하지 않고 달콤한 말들만 하기로 갑자기 결심한다. 김여주는 늦은 자신의 앞에서 무턱대고 기다리는 차남주의 모습을 발견하곤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냥 집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차남주가 김여주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당겨 돌린다. 그러면 김여주는 이거 놓으라면서 화를 내고 이웃사람이 사랑싸움할 거면 가서 하라고 언성을 높여온다. 차남주는 달콤한 말들만 주기로 했던 결심을 까맣게 잊고 대체 이러냐면서 목소리를 키우다가 김여주에게 강제로 키스한다. 이번에도 김여주 씨는 동의한 없는 스킨십 장면은설레는 박력 키스'라는 제목으로 인기 클립이 되어 있을 것이다. 김여주가 놀라서 눈을 크게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가 차남주의 어깨를 퍽퍽 치는 모습이 풀샷으로 잡힌 다음 결국엔 힘이 풀린 키스를 받는 김여주 씨의 손이 앵글에 대충 잡힐 것이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하게 차남주와 김여주의 데이트에 김여주는 짧은 치마를 입고 나가는데 그를 데리러 차남주 씨는 너무 야하다며 빨리 집으로 다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화를 낸다. 김여주 씨는 정말로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고 혼자 남은 차남주는 저렇게 예쁜 다리는 자신만 봐야 한다며 중얼거린다. 장면은 아마 '설레는 데이트- 여자는 나만 본다' 모먼트 하나로 정리되어 인기 클립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애가 어느 정도 지속되고 나면 김여주가 자신을 앞까지 데려다준 차남주에게 갑자기 뽀뽀를 하며 자고 가라는 말을 한다. 김여주가 먼저 하는 스킨십 리드는 '엉뚱해서 사랑스러운' 것이 되어버리고, 차남주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김여주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네가 시작한 거다' 따위의 대사를 읊을 것이다. 장면 역시 박력 어쩌구의 제목으로 인터넷을 돌아다니게 것이다.


, 그리고 드라마의 서브 여자 주인공(이하 '강섭녀') 강섭녀 씨는 걸크러쉬 사이다 모음집 영상의 단골 캐릭터가 된다. 강섭녀 씨는 '쎈언니'답게 스모키 화장에 레드립을 하고 등장하며 대충 재벌쯤의 지위에서 실수하는 남직원들을 조곤조곤한 말투로 비꼬며 사이다를 정도 날리지만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진다. 그녀의 가진 별로 없는 남자 친구는 밖에선 쎈언니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린 마음의 소유자인 강섭녀 씨를 알아봐 유일한 사람이며, 강섭녀 씨와의 연애를 전부 리드하고 있다. 가끔 그가 사이의 격차에 의기소침해지면 강섭녀 씨는 나는 너에게 바라는 아무것도 없으며 너는 그냥 옆에 있어주면 된다고 말해줘야 한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의 남자친구는 강섭녀 씨의사실은 나약하고 지친 마음 지켜주는 원 앤 온리 찐사랑의 자격을 얻는다. 강섭녀 씨와 그의 남자 친구가 함께 나오는 장면들은 '일할 때는 걸크러쉬, 남자 앞에서는 세상 순둥이' 따위의 제목으로 묶여서 화제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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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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