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 괴는 여자 32.
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언젠가부터 시끄러운 속을 달래는 특별 훈련을 해왔다.
예를 들면, 엄마랑 내가 참 많이 닮았다는 걸 떠올리는 것.
내가 엄마의 깨끗한 피부를 물려받은 거나 오른쪽 귀가 접혀있는 모양이 똑같다거나 하는 그런 생김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나누는 감정들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떠올리는 식이다. 우리 사이엔 교환 일기를 쓰는 것마냥 서로의 책을 바꿔 읽고 감상을 나누는 전통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는 하루 온종일을 대화하고 울고 웃었던 기억. 그리고 우리는 엄마의 인생과 나의 일상이 얼마나 같고 다르고, 또 같은지에 대해서. 엄마는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빨간 셀로판지를 나눠줘야 하는 것이 씁쓸했다는 것에 대해, 교탁에 선 채로 안타까움을 있는 대로 쏟아냈는데 이유를 모르고 말똥말똥 쳐다보는 눈들이 가슴에 오래 남더라는 것에 대해 털어놓는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고단함에 고개를 끄덕이고 서투르게나마 위로를 건넨다. 엄마는 스쿨미투에 증언을 불어넣고 그 뒤에 든든히 서 있는 일을 망설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는 사실에 가끔 초조해하면서도, 머뭇대지 않는 그 얼굴은 환하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용기에 투박한 찬사를 보내고 가없는 위로를 받게 된다. 그렇게 나는 엄마와 내가 피부가 아니라도, 귀 모양이 아니라도 여전히 닮아있다는 것에 안도를 얻는다. 빨간 셀로판지나 스쿨 미투가 얼마 나 씁쓸한지에 초점을 맞추고 슬퍼하는 게 아니라, 엄마 역시 그 문제들에 대해 얼마나 씁쓸해하고 있는지를 끄집어내서 감상하는. 그런 훈련이다. 실망과 절망 속에서도, 함께 슬퍼하는 사람과는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부러 뽑아내는 훈련. 그래야 마음이 덜 다치니까.
4월 24일
◇◇이랑 △△이 만나서 놀았다. 밥 먹고 카페에 갔는데 거기 화장실에 ‘여성분들에 대한 환상이 있는 남자 직원들이 청소합니다. 깨끗하게 써주세요.’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 와이파이 이름이 길고 이상한 게 있나 살펴본 다음에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기분이 계속 나빠서 한동안 대화에 집중을 못했다. 오늘은 가방에 펜이나 종이 따위가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나가서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메모지와 펜을 사들고 자리로 돌아와, 메모지 위에 ‘환상타령 안 해도 깨끗하게 쓰라고만 하면 다 알아들어요~’라고 썼다. 그리고 다시 화장실로 가서 메모지를 그대로 붙이고 나왔다. 다음에 가면 과연 둘 중 무슨 종이가 떼어져 있을까.
6월 13일
불국사에 다녀왔다. 대웅전에 기도를 올리고 내려오는 길에 염주 팔찌를 구경했다. 나와 동생은 둘 다 알록달록한 팔찌를 집어 들었는데 동생한테 맞는 사이즈가 없는 듯싶었다. 사장은 여자한텐 이런 아기자기한 게 어울리고 남자한텐 멋있는 게 맞다고 하며 동생한테 세 부처가 새겨진 갈색 팔찌를 추천했다. 그리고는 태그를 떼고 직접 동생의 팔에 팔찌를 끼워주며 ‘소원 성취하시고 건강하세요’ 했다. 나에게도 똑같이 했는데 이번에는 '이뻐지세요', 덧붙였다. 사장님 알고 계세요? 사실은요, 저는 이런 모욕들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기를, 이런 식으로 망쳐지는 하루들이 더는 없기를 간절히 빌고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하루를 6월 13일 같이 산다. 딱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는 못하면서 잔뜩 찌푸린 얼굴을 만들어 보이기나 하는, 뭐 그런 거.
화가 나는 상황에 화를 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분풀이를 하듯 일기를 몇 장씩이나 써내는 식. 분을 삼켰다가
천불이나는속에서활자들을꺼내서골고루훑어본뒤다시꿀꺽삼키는일을
반복하는 거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내던져지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턱을 괴곤 했다. 방어자세. 불은 대충 진화되고 처마로 숨어 비는 피해버리는 방식. 그저 턱을 괴고 가만히, 재가 되다만 나를 바라보기.
가장 처음에 이런 말을 써 두었다. 편지를 일기로 돌려놓으면서도 그 일기장을 모두가 보게끔 펼쳐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삼켰던 말들을 그에게 직접 토해놓고 그걸 다시 멋없게 수거하고 그러나 이 구토의 흔적을 제발 봐달라고 구걸하는 마음. 결국은 무뎌지게 될 일회성의 숙연함을 위해 내 많은 것들이 쓰다 버려지는 것을 환영하다시피 하는 마음.
나는 4월 24일이 바꾼 것들을 돌아본다.
그 카페에 다시 가게 됐을 때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한 화장실에는 아무런 종이도 붙어있지 않았었다. 그렇게, 환상 타령이 없어졌다. 어떤 공간에라도 작은 승전이 있게 된 그날을 떠올린다. 내가 펼쳐놓는 말들이 무언가를 무릅쓰고 뱉어져야 하는 것들이라면, 그건 세상이 아직도 수렁이라는 말이니까. 나는 겁내지 않기로 했다. 나의 매일이 4월 24일이 아니라도, 수많은 6월 13일들을 이렇게 꺼내놓는 것으로도, 파도는 끝나지 않을 수 있다고. 다음 파도들을 불러낼 수 있다고. 나랑 같이 뒷담화 해 줘. 나랑 같이 슬퍼해 줘. 그래서 화장실에 붙어 있던 그 종이를 떼어 줘. 그 작은 파도를.
내 날들엔 수많은 G들이 있었다.
중3 때 잠깐 수업을 들었던 과외 선생님과 수능을 다 마친 후에 연락이 닿은 적이 있다. 그때 함께 수업을 들었던 다른 친구 하나랑 나랑 그 선생님이랑 셋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됐는데, 한참 얘기를 하던 중에 그 선생님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 좋아하는 애 있냐?
공기가 달라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고. 그리고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상상이 아니고 정말로.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앞에 앉아있던 건 나를 포함해 고작 둘이었는데도 나는 비장했다.
그때 그는 내가 손을 든 걸 확인했는데도 본인이 페미니즘을 왜 싫어하는지 여러 일화들을 예시로 들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이것저것 반박을 해보려다가 결국엔 이 말밖에 못 했다.
'82년생 김지영'이 이렇게 많이 읽히는 데에 정말 이유가 없는 것 같으세요?
나는 그에게도, 내 글이 화나보인 다던 K에게도, 기를 누르라고 주의를 줬던 Y에게도, 야구 규칙은 알고 보는 거냐던 P에게도, 은행원이나 되는 게 여자 인생엔 최고라던 A에게도, 페미니즘 같은 이상한 건 하지 말라던 B에게도, 김지영이 답답하다던 C에게도, 내 몸을 보고 '왜 이러냐’고, 수능특강에 왜 여성주의 작품이 실리는 거냐고 말하던 D에게도, 쟤 오늘 재시험이라고 수군거렸던 애들에게도, 아가씨가 예뻐서 서비스를 주는 거라던 가게 사장, 좀만 덜 예뻤어도 안 태워줬을 거라던 택시 기사, 서울말을 잘한다고 칭찬하던 사람들, 모솔은 경악할 만한 일이라고 하던 사람들, 골품제 덕분에 여자도 왕이 될 수 있었다고 가르쳤던 교사⋯⋯, 그 모두에게 적은 편지를. 이제는 일기로 돌아간 그 편지를.
지금까지의 이 엉망진창인 일기를 본다면 그들은 모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자로 사는 게 그렇게 다르고 힘드냐'는 고작 한마디에 구구절절 문장들을 만들고 죽여간 이 모든 시간은 우스운 짓거리로 비치고 말까? 하나하나 따져가며 애타하는 나의 마음을 ‘그래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로 한순간에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릴까?
상관없다. 나는 턱을 괴고 그들을 째려보겠다. 이 뒷담화를 공개하겠다. 뒷담화밖에 될 수 없어 슬픈 일기를 펼쳐두겠다. 그리하여 입을 열어 말하겠다.
세상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당신이야말로 우습다고,
비겁한 혐오의 말로를 예측조차 하지 못하는 당신이야말로 우습다고,
아이들에게 깨끗한 세계를 물려주고자 조금도 노력하지 않는 당신도 어른이라 부를 수 있다는 세상의 규칙이 우습다고.
당당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배운 여자들이 믿는 약속을 지키라고,
그래서 굽히게 두지 말라고,
이 투쟁을 우리만의 것으로 남겨두지 말라고.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던 나라에서, 여성은 청년일 수 없는 사회에서, 열한 살짜리가 몸매 걱정을 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불평등이 죽음으로나마 설득되어야 하는 이 폐허에서.
우리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설령 세상이 답을 해줄 수 없다고 해도,
우리 턱을 괴자.
G이기도 하고, K이기도 하고, Y이기도 하고 A이기도 하고 B이고 C이고 D이며 동시에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과 썩어빠진 이 세상이 코웃음을 쳐도 우리는 턱을 괴자. 새로운 우리.
지금 우리의 마음이 더 많이 닮아있기를.
G, K, Y, A, B, C, D가 아니라 이 세상과 닮은 얼굴을 걷어내고 다름 아닌 우리가 닮아있기를.
우리의 눈매나 콧볼, 그런 것들은 전부 다르게 생겼더라도 이 마음만은 잔뜩 닮아있기를.
세상이 정하는 대로 자기를 내버려 두지 않는 여자들이 더 오기를,
조개 줍는다는 비아냥에도 주눅 들지 않고 기어코 파도가 된 여자들의 길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람은 이어불고 바다는 멈춘 적 없듯이 그렇게 계속되기를.
턱을 괴고 세상을 주시하되, 슬프지 않기를.
세상이 사랑으로 움직이기를.
우리, 같은 소원으로 춤추자.
재로 남은 마음으로도, 춤추자.
<끝>
외전 격인 33편으로 글이 전부 마무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