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25편 : 57부, 58부

by 구일삼

비담은 덕만의 마음을 오롯이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어 아낌없이 갖는 것이 연모라고, 그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말은 비담의 뇌리에 박히고 말았고, 그래서 그는 덕만의 마음이 유신에게 조금이라도 향하는 것을 막고자 23편부터 내내 유신을 덕만에게서 쳐내려고 했다. 그런데 덕만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 같자, 비담은 덕만에게 미움을 받기 싫다는, 덕만에게서 버려지기 싫다는 예전 처음의 마음을 꺼내놓는다. 유신이 상장군에 복귀하기 전, 아직 죄인의 신분이었을 때의 일이다.

“폐하께서 유신을 버리시지 못하신다면,”

“못한다면?”

“제가 유신을 지키겠사옵니다. 유신을 참수하라는 상소는 계속 늘어날 것이고 뜻이 있는 화랑과 무장들 또한 계속 상주할 것이옵니다. 허나 사량부령 비담, 모든 정치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잠재우겠습니다. 허락만 하신다면 유신의 목숨만은 살려내겠사옵니다.”

그런데 덕만이 차갑게 답한다.

“명하지 않을 것이다. 물러가거라.”

두 사람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덕만이 유신을 곁에 둔다는 것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덕만은 신하로서, 패업에 필요한 날개로서의 유신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비담은 덕만이 유신을 연모하기에 곁에 두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덕만에게는 모든 정치력을 잃고 목숨만 남은 유신이 필요한 게 아닌데 비담은 유신의 목숨만은 살려놓겠다 약속하려 한다. 그는 연모를 목표로 두고 정치를 동원하고, 덕만은 정치를 위해 연모를 막으려 한다. 덕만은 지금 ‘덕만’일 수가 없음을, 비담은 계속 알지 못하고 상처받고 있다. 사람이 목표인 것은 위험하다고 했던, 어머니가 아들을 연민하며 남긴 또 하나의 마지막 말 역시도, 비담은 계속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덕만이 유신을 상장군으로 복귀시키고 이를 위해 복야회의 충성을 마침내 얻어낸 것까지를, 비담은 다르게 본다. 덕만은 군주로서 답이 없을 것 같은 문제에 스스로를 걸고 뛰어들어 통합을 만들어내 과업을 달성한 것이지만 비담은 그것이 단지 유신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신이 상장군으로 복귀하여 전장에 나간 뒤, 비담은 덕만에게 파천을 제안하고 자신과 사량부가 남아 서라벌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아뢴다. 실제로 백제가 서라벌 턱끝까지 쫓아온 모양새였기 때문에 비담의 입장에서는 정인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제안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은 신하의 제안을 거절한다. 도망치는 ‘여왕’이 대외적으로 신라를 우습게 만들 것을 염려하고, 또한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왕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것을 왕의 말이 아닌 정인의 거절로 알아들은 비담이 절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게 서라벌을 맡기시는 것이 불안하십니까. 절 믿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게 아니다.”

“헌데… 헌데 왜 절 보지 않으십니까?”

비담은 그 순진한 연모가 오롯할 수 없는 줄도 모르고 덕만을 원망한다.

“변하셨습니다. 폐하와 제가 처음 만났을 때 전 폐하를 넘기고 약재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고맙다… 고맙다 하셨습니다. 폐하의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어요. 그런 행동에 날 욕하지 않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세상이 무례하다 했던 걸 자신감이라 말씀해 주셨고 세상이 무자비하다 하는 걸 용감하다고 봐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비열하다고 손가락질한 것은 뛰어난 책략이라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변해가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덕만이 왕의 길을 택한다는 것의 의미를 차마 다 알지는 못했기 때문일 테다.

“헌데, 왜…. 왜 이제 와서 저의 진심은 계략이고 폐하를 지키려는 저의 마음은 서라벌을 차지하려는 욕망인 것입니까. 저의 진심은… 이제 보지 못하시는 겁니까.”

이제 사람의 마음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덕만에게 자꾸만 사랑을 요구하는 비담. 이토록 올곧게 걸어오는 그 모습에, 패도를 걸어야 하는 폐하 마음이 어지럽기만 하다.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마음이 사실 나는 계속 여기 있었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다. 비담은 눈물을 보이며 뛰쳐나가 버리는데, 덕만은 조용히 앉아 자신도 모르게 그를 떠올리고 웃음 짓다가 곧바로 표정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담에게 자신이 왜 그를 차마 사랑할 수 없는지를 말하려고 한다. 시간이 밤이 되어 태양이 잠든 때가 되어서야 ‘덕만’이 말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변했다. 누구는 내가 공주라며 날 죽이려 했고 누구는 나를 지키려다가 내 눈앞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내게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하고 존대를 하며 나에게 대업을 향해 달려가라고 했어…. 그러던 어느 날 네가 나타났다. 넌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 내게 반말을 했어. 난 그냥 그러라고 했지. 너만은 나를 예전의 나로 대했었지. 해서 너만은 예전처럼 편했었지…. 궁에 들어온 이후에도 넌 내게 꽃을 주고 걱정하는 눈빛으로 손을 잡고 날 만졌다. 다른 이유였다 해도 상관없어. 널 보며 예전의 날 느낄 수 있었으니까 좋았다.”

당신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상관없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그대로 비담에게 돌려주는 덕만. 비담은 그럼에도 왜 자신을 봐주지 않는 것인지, 덕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헌데 왜, 왜 변하셨습니까.”

“난… 이름이 없으니까…. 태자도, 공주도, 저잣거리 시정잡배도 이름이 있는데 왕은 이름이 없어. 난 그냥 ‘폐하’다. 이제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를 수 없다.”

더 이상 ‘덕만’일 수 없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애절한 부탁이다. 비담은 그 언젠가 세상에 죽었어야 할 이름을 꺼내오고, 왕은 차마 그것을 지켜볼 수가 없다.

“제가, 제가 불러드릴 것이옵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반역이다. 네가 연모로 내 이름을 불러도 세상은 반역이라 할 것이다. 왜 변했냐고? … 내 이름을 잃는 순간, 넌 단지 세력을 가진 나의 신하 중 하나여야 하니까. 난 널 헤아리고 의심하는 왕이어야 하니까. 네가 또 다른 미실이 되지 않을까, 항상 가늠하고 의심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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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비담….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내가 얼마나 믿고 싶어 하는지, 기대고 싶어 하는지… 네가 알아?”

왕이 옥루를 보인다. 아니, 덕만이 눈물을 흘린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비담은 자신이 신하가 아닐 때에만 스스로의 이름을 쓰다듬기라도 할 수 있는 정인의 처지를 실감한다. 그는 이제야 왕이 아닌 ‘덕만’이 해 온 모든 사랑의 말들을 알아듣고, 자리를 뜬다. 덕만의 손을 꾹 한번 잡더니 미실의 사당으로 가, 왕에게는 부담이 될 자신의 연모를 정리하려 한다.


그런데 덕만이 그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고백한다.

“네가 있어야겠다.”

안아오는 비담을, 덕만이 마주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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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은 애초부터 신라를 사랑한 적이 없다. 유신에게 신라와 덕만은 같지만 비담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는 덕만만을 원한다. 이전에 덕만이 미실의 난에 의해 궁 밖으로 쫓겨나고 각성 이후에 목숨을 걸어 궁에 제 발로 찾아갔을 때, 유신과 비담이 대립하던 장면이 있다. 직접 궁으로 가겠다는 덕만의 말을 듣고도 유신은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고, 이를 뒤늦게 알게 된 비담이 화를 내는 장면이다.

“네 머릿속엔 이제, 공주님은 없고 신라만 있어? 공주님이 어찌 되든 신라만 잘 되면 되는 거냐.”

“그게 공주님과 내가 함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나와 공주님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니까.”

차이가 보이는지. 유신은 신국을 곧 덕만에 대한 연모를 이어갈 수 있는 길로 생각한다. 유신에게는 가야를 지킬 수 있는 방법도 덕만을 사랑하는 방법도, 전부 신라에 대한 충성으로 같다. 그러나 비담은 신라와 덕만을 분명히 분리해 생각한다. 이것은 덕만도 알고 있는 바이다. 그는 언젠가 “내가 사라진 후에도 비담이 신국에 충성할 것인가. 신국의 대업에 온 마음을 다할 것인가.”라며 걱정하기도 했다. 비담은 오직 덕만에게 닿고자 정치 세력을 불려 온 것이고, 이것은 나라를 얻겠다는 욕망이나 대업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과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해서 미실의 계획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비담이 덕만을 오롯이 홀로 가지기 위해 덕만의 사랑이 향하는 신라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에 닿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유신을 가야 세력과 연관해 팔다리를 잘라 덕만에게서 떼어놓은 전적이 있다. 유신에게 한 것처럼, 신라를 덕만에게서 떼어놓고 그 자리에 자신이 서는 것으로, 비담은 어머니의 마지막 계획을 뜻대로 이뤄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를 향하게 되었다. 왕은 신라를 향하나 덕만은 마침내 비담을 택했다. 덕만이 비담이 해 오는 진실한 말들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봤기 때문에 이 둘은 너무 멀리 와 버린 길 끝에서도 순수하게 사랑을 건져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미실의 계획은 이렇게 좌절되는 듯했다. 미실의 초상화 앞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이 구도 자체가, 미실이 남긴 미로 안에서 헤매기만 했을 수도 있는 두 사람이 보란 듯 서로 마음을 주고받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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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은 이제 자신을 연기처럼 휘감고 있던 미실의 말들을 전부 지워낸다. 오랜 망령을 그렇게 떨쳐낸다.

“어머니. 나라를 얻어 사람을 가지려 하는 것을 걱정하셨죠. 또,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라 하셨죠. 이제 그러지 않으려 합니다. 뺏는 것이 아니라 주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버려서, 함께하려 합니다. 왕으로의 길도, 천년의 이름도… 그녀의 눈물 앞에 얼마나 하찮은 것입니까.”

덕만이 자신을 봐주었다는 하나로, 비담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비담이 가장 먼저 내놓는 것은 맹약이다. 그는 자신과 덕만이 한 부씩 가지고 있을 맹약서를 덕만의 손에 쥐어준다.

“만약 이 비담보다 폐하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신다면 이 맹약서대로 비담은 모든 조정의 정무와 권력에 관한 일에서 손을 떼고 속세를 떠날 것이옵니다.” “폐하의 불안이 이것이라 다행입니다. 오히려 기쁩니다. 맹약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비담에겐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폐하가 없는 세상이라면 이 신국도 상관치 않는 제가 권력의 일이 무엇이며, 조정의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정말로 그 약속대로 비담은 자신이 그간 만들어온 세력 전부를 덕만에게 갖다 바치고자 한다. 애초에 덕만에게 닿기 위해 만든 것이고 그가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며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기에, 마음을 확인한 지금 그것은 비담에게는 쓸모가 없고 왕인 덕만에게만 필요가 있는 것이 된다. 덕만은 신라가 전시 체제에 돌입하였음을 선언하고 비담을 상대등으로 제수하여 귀족들의 사병을 상대등 밑으로 전부 편재한다. 그간 대외적으로 비담은 미실을 뒤이은 귀족들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비담에게로 사병을 편재시키라는 왕의 명령은 귀족들이 반발 없이 따를 수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황실 쪽 사람들은 비담이 상대등이 된 것을 당황스러워하거나 못마땅해하지만 비담이 자신만을 본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덕만에게 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후 손쉽게 사병들을 모으게 된 왕은 이들을 전원 병부에 귀속시켜 특별군을 형성할 것이라 밝힌다. 이는 삼한일통의 대업을 위해 민생이라는 안정적인 기반을 다져 온 왕이 이제는 정말 앞으로 달려 나갈 시간이라 판단한 결과이다. 귀족들은 당연히 반발하는데, 이를 비담이 딱 잘라내기도 한다. 비담에겐 왕과 덕만이 다르지 않아서, 무엇이 되었든 그가 가는 길을 편하게 만들 뿐이다.

IMG_1452.PNG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삼한지세를 유신에게 전한 비담

마지막으로 비담이 내려놓는 것은 ‘삼한지세’이다. 비담은 이를 전장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돌아온 유신에게 전한다. 이것은 사실 비담에게 있어서 엄청난 결정이다. 그에게 삼한지세가 어떤 의미였던가? 비담은 문노가 자신을 삼한지세의 주인이 될 자로 키웠으나 이내 그것을 포기하고 유신을 택하는 과정을 전부 목도했다. 문노에게서 애정을 체념하고 인정이라도 받고 싶어 했던 비담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해서 그는 스승에게 죽고자 했으나, 운명의 뒤틀림으로 문노가 염종에 의해 사망하며 삼한지세는 물론 염종의 세력이 전부 비담과 피로 얽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런 그가 삼한지세를 다름 아닌 유신에게 넘긴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의 최초였던 사람이 자신이 아닌 유신을 택하고, 최초여야 했던 사람이 자신을 버리고 꿈을 택하는 결핍들로 이루어진 비담이 이 모든 열등감을 넘어서기로 스스로 결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덕만이 사랑을 보여준 순간을 믿고, 비로소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덕만은 조정 대신들에게 비담과 국혼을 할 것이라 발표한다. 그리고 그날 밤 춘추에게 맹약서를 보여주며 비담을 믿어도 된다는 것을 전하려 한다. 하지만 춘추는 이 모든 것이 달갑지가 않다. 덕만은 춘추를 흔들리지 않는 군주로 키우기 위해, 또 머리로 하는 수 싸움에는 능하지만 진심을 걸고 뛰어들 줄은 모르는 아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미실의 소굴로 들어가 춘추가 각성하기를 강제하거나 아예 춘추를 복야회 한 복판에 던져놓기도 했다. 춘추는 덕만이 자신을 후계로 키우려 하는 이 모든 과정에는 응했지만, 비담이 상대등이 되면서 막강해진 권력을 갖게 되자 그것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눈치였다. 후계 경쟁이 예상되는 그림이 만들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비담이 덕만의 뜻을 거스를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외적으로 춘추는 상대등인 비담에 대해 다음 왕좌를 걸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해서 그는 비담을 견제하기를 숨기지 않고, 또 황실의 일원으로서 덕만을 무척 걱정한다.

“비담은 자기의 세력을 갖고 있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세력은 개인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혼 이후에는 비담의 세력이 더욱 커질 것이고 나중엔 비담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헌데 이 맹약에 무슨 효력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틀린 것 하나 없이 맞는 말이다. 덕만으로서는 이미 유신과 가야 세력의 질척이는 관계를 겪으며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덕만은 준비를 해 두었다.

“비담이 이 맹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비담을 척살하라. … 이런저런 마음에 얽매여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하여 칙서로 남겨 너에게 주는 것이니 그대로 시행하거라.”

비담의 연모는 믿어도 미래까지 무모하게 걸어서는 안 되는 것이 덕만이 앉아있는 자리의 무게이다. 어쩌면 덕만은 비담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를 의심하기보다도, 자신이 비담을 눈감아 줄 정도로 사랑에 맹목적이게 될 상황을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할 수 있는 최대한은 같이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덕만의 심정이다.

“이렇게까지 하며 비담을 곁에 두고 싶은 나를 이해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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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에게 비담은 안식이다. 이름이 지워져 갈수록 속이 문드러져 홀로 울며 밤을 지새운 날들을 그가 지워주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며 투정 부려도 그는 자신을 토닥여준다. 눕기만 하면 가슴이 조이면서 뛴다고, 초조하고, 무언가 일이 덜 된 것 같고,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고 눈물이 난다는 말들을 그는 그저 가만히 들어준다.

“어릴 때도 잠들 땐 항상 가슴이 뛰었다.”

“그때도 초조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때는 초조해서가 아니라, 내일은 또 어떤 재밌는 일이 일어날까,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상인들이 어떤 재미난 물건을 가져올까, 어제 온 아저씨에게 돌궐은 어떤 곳인지 물어봐야지….”

내일을 기대하면서 잠들었던 어린애가 이제는 어제를 반추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 덕만을 비담이 애틋한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본다. 이 사람의 세계가 아주 작게라도 평안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 그런 눈으로 잠에 빠지는 덕만을 지켜본다. 덕만은 비담 앞에서 왕이 아닐 수 있고, 편안히 숨을 쉴 수가 있다. 두 사람은 인명과 형종도 아니고, 왕과 신하도 아니고, 덕만과 비담, 그저 두 연인인 것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지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너무 당연하게도, 서로를 둘러싼 것들이 너무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춘추의 말대로, 그리고 유신의 경우가 그러했던 것처럼, 비담의 세력이 문제가 된다.

염종이 비담이 삼한지세를 유신에게 넘긴 것을 알고 그의 집무실을 뒤지다가 덕만과 비담이 한 부씩 나눠가진 맹약서를 발견하게 된다. 염종은 곧장 비담 휘하의 귀족들을 불러 모으고 대책을 마련하고자 한다.

“비담공이 그릇된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바로잡아 드려야죠.”

귀족들 대부분은 반드시 비담이 다음 왕이 되어야만 하는 자들이다. 비담에게 줄을 타 얻어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이들 대부분이 미실이 아들인 비담에게 물려준 사람들이기에, 춘추가 다음 왕좌를 차지하면 곧장 숙청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실의 세력은 곧 천명 공주를 죽인 원수이자 않은가. 덕만이 이들을 품기를 택할 때 가장 반대했던 사람이 바로 천명이 아들인 춘추다. 또한 춘추가 덕만의 뜻을 이어받아 삼한일통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면서 왕권은 더 세질 것이고, 김서현과 김유신 등이 2인자 자리에서 그나마의 권력을 전부 틀어쥐고 있을 것이므로 이들은 존립할 수가 없게 된다. 때문에 염종을 비롯한 귀족들은 전부 비담을 이용할 생각이다. 이때, 덕만이 사병 몰수를 위해 비담의 위치를 상대등까지 올려놓은 것은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조건이 되어버린다. 위기인 동시에 기회인 현재를 이용해, 이들은 비담을 이대로 왕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렇게 끝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덕만과 비담이 그저 꿈같은 날들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2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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