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시기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어느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자신이 언제부터 돈을 벌 수 있을지. 집안에 돈을 버는 사람이 없다 보니 남보다는 이른 나이에 생업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중기는 왜 그래야 했을까?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중기의 초등학교 시절로 가보자. 철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다른 세상이 있던 동네가 있다. 한쪽은 한강 변을 끼고 있는 아파트 부락이 밀집된 부자촌, 다른 한쪽은 서울에서 대표적인 영세민들이 사는 동네. 중기의 영역은 철길의 서쪽. 그중에서도 땅바닥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 달동네라 불리는 곳이다. 서너 명도 걸어 다니지 못할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올라가다 보면 낡고 허른 파란색 철문이 보인다. 이 동네 집들은 대부분 하나의 대문을 공유해서 사용했다. 어느 정도 사는 집에서나 볼 수 있는 명패는 찾아볼 수도 없고. 검은 페인트로 대충 휘갈겨 번지 수만 표시된 채 '몇 번지 파란 대문 집'으로 불릴 뿐이었다. 이 산동네는 주인장 이름이 없는 집으로 가득했다. 녹슨 철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예닐곱 집, 아니 작은 방들이 달라붙어 있다. 일곱 집의 구분은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부엌으로 나뉘었다. 방 하나에 부엌이 한집. 이런 형태로 각 세대가 이어졌다. 대문 바로 뒤로 변소(화장실)가 하나 있다. 이 또한 공유하는 장소. 보통 한집에 네 가족으로 따지면 스물여덟 명이 하나의 변소를 사용했다. 공원의 공중화장실도 이보다는 더 안락했으리라 기억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나라에는 공유 시스템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으니. 얼마나 세상을 앞서가고 있었다는 말인가. 공유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가난함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아차! 대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도꼭지도 단랑 한 개. 이렇듯 생활의 편리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모든 집이 흙으로 쌓아 올려 건조한 날에는 벽지 안쪽으로 흙 알갱이가 흘러내리는 소리도 때때로 들렸는데. 중기는 이 소리가 신기해 벽지를 긁어대며 놀기도 했다.
중기 집은 달동네에서도 꼭짓점에 있다. 인간은 타인보다 높은 곳에 올라서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했던가. 재벌이 초고층 빌딩을 앞다퉈 짓는 걸 보면 중기는 어릴 때 이미 인간의 욕망을 이룬 셈이다. 정상에서 반쯤 내려간 곳에 어느 기와집 바로 앞에 우물이 있다. 우물 옆으로 검은 쇠로 된 녹슨 물펌프가 땅에 박혀 있고 손잡이를 위로 아래로 힘을 주어 누르면 물이 나왔다. 처음엔 쇳가루가 섞인 구정물이 나오다가 여러 번 펌프질을 하면 조금은 투명한 물을 내뿜었다. 물펌프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도 손색없었다. 그 우물물을 식수로 사용했는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렴풋이 아줌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빨래를 했던 장소였음이 틀림없다. 달동네 중턱에 놓인 우물은 이 마을의 상징적 존재였음은 명확하다. 철길 하나만 건너면 정갈하게 조성된 잔디밭 위에 서 있는 아파트와 중기가 살던 동네의 우물, 비꺽 거리는 철문, 공중변소, 수도꼭지, 꼬불 꼬불 달동네 골목길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동네에 거주하는 아줌마들의 일터는 주로 철길 너머 아파트촌. 당시만 해도 부유 촌이라 불리던 어느 가정집이었다. 다른 집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하루에도 부잣집 아파트 세 곳을 돌며 파출부로 집안 살림을 책임졌던 중기의 엄마. 타인의 더러운 속옷을 손빨래하고 온갖 찌든 먼지를 닦아내며 음식을 만들어 번 돈으로는 궁핍한 생활과 달동네를 벗어날 수 없다. 파출부 일이 없는 날은 또 다른 밥벌이로 쉴 틈이 없다. 아침부터 부엌 양은솥에 옥수수 삶는 연기가 자욱했다. 오후가 되면 무거운 옥수수 대야를 머리에 이고 아파트 단지 근처 인도에 자리를 잡는다. 하얀색 천으로 덮인 빨간색 고무 대야 안에는 삶은 옥수수가 가득 담겨 있다. 연탄 아궁이에서 정성껏 삶은 옥수수가 이 집안의 라면이 되었고 쌀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무거운 빨간색 대야가 텅 빈 채로 집으로 돌아온 날은 극히 드물었다. 팔다 남은 식은 옥수수는 철부지 중기에게는 작은 선물이었다. 금방 삶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따끈한 옥수수에 군침 흘리는 중기. 탱글탱글한 알갱이의 식감은 언제나 부자촌 사람들 몫이었다. 중기는 입에 댈 수 없었고, 쉰내 나고 딱딱해진 옥수수가 그의 몫이었다. 옥수수가 많이 남은 날은 엄마의 깊은 한숨이 터졌다. 뜨거운 날씨 탓에 쉰 냄새가 풍기는 옥수수라도 중기에게는 마냥 기쁘고 제일 맛있는 간식거리였으며 행복이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집에서 가사 노동으로 지친 몸을 끌고 들어와 저녁밥을 차리는 그녀. 엄마가 힘든 걸 알 리 없는 중기는 반찬 투정을 부린다. 그러면 짜증 섞인 말투로 엄마의 강한 경상도 억양이 날아온다.
"아무거나 쑤이 처무라!"
중기는 그 한마디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늦은 밤 잠자리에서 다리가 아프다며 망치로 허벅지를 때리는 중기 엄마. 뼛속 깊이 박힌 관절염을 뽑아내려는 듯 무식한 망치질은 끊이지 않는다. 이미 망치로 오랜 세월 얻어맞은 다리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하다. 주먹으로 때려서는 고통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로지 쇠망치만이 그녀의 아픈 다리를 조금은 달래 줄 진통제였다. 어린 중기는 엄마의 그런 행동이 무섭고 두려워 항상 엄마 손에서 쇠망치를 빼앗으려고 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중기의 작은 손으로 주물러 보지만 효과는 없다. 매일 저녁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며 빨리 커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