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룡,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저자가 제목을 지을 때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를 번역자로 한정해버린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더 나은 글을 쓰고자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단비가 되어줄 ‘책’임이 분명한데 제목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건 아닌가하는 노파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이라는 단어를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이 책 제목이 군더더기 없이 꼭 알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번역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에는 외국어를 자국어로 번역한다는 소극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서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공적인 언어로 만드는 것도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겨낸다는 점에서 모두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은 단순히 가능/불가능만을 따지는 것에서 끝나는 작업이 아니다. 얼마나 세밀하게 접근하는가에 따라 의사소통의 품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는 작업이 바로 번역이다. 섬세히 신경 쓴 글과 말은 그 자체로 믿음을 준다. 따라서 말과 글을 다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품격을 다지는 일이다.
이 책은 올바른 의사소통에 필요한 글쓰기 기본기를 일러준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운동을 배우거나 악기를 배울 때에는 기본기를 많이 신경 쓰면서 글쓰기에 있어서는 기본기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듯하다. 그냥 어떻게든 쓸 수는 있으니까 별다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일까. 하지만 축구에 있어 공을 몸에 붙이는 일, 트래핑(trapping)이 엉성하면 좋은 축구 선수가 되기 힘든 것처럼 글쓰기에도 분명히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기본기가 존재하고, 미묘한 차이처럼 보이는 그 실력이 오래지않아 큰 차이를 낳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글쓰기 기본기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1. 좋은 글에는 판단이나 주장보다 근거가 많다. 다짐과 예측은 적고 경험사례는 많다.
Ex. 저명한 경제학자 로이드 섀플리 -> 게임 이론을 분배론에 적용해 2012년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로이드 섀플리
Ex.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 늘 변하는 시공간 안에 사는 인간에게 변치 않는 보편 가치를 일깨운 철학자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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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구나 그럴 거라고 뭉뚱그려 추측하지 말고 1인칭 시점으로 간결하고 당당하게 쓰는 편이 좋다.
Ex. 누구에게나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책이 있다. -> 허먼 멜빌이 지은 『모비딕』이 내 삶의 지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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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느낌표를 쓰지 않고서 독자에게 감탄을 전달할 표현법이 없는지 궁리해보면 문장 연습에 도움이 많이 된다. 느낌표를 문장에 찍으려 하지 말고 독자 가슴속에 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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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어 반복에 주의하자
‘맨 처음’은 ‘처음’이라고 쓰면 충분하고, ‘늘상’은 늘이라고 쓰면 충분.
Ex. '노래 가사’ -> 노랫말, 가사 / 그때 당시-> 그때, 당시 / 생사 여부 확인 -> 생사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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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형격 조사 ‘의’는 종속개념을 뚜렷이 나타낼 때 자기 역할에 잘 들어맞는다.
Ex. '한 통의 편지’ -> ‘편지 한 통’, 침묵의 봄 -> 침묵하는 봄, 행복의 정복-> 행복 정복
이외에도 많은 내용이 있으나 대원칙은 이렇다. '최대한 우리말 표현을 이용하면서 간결하게, 오류없이 쓰기'. 위에 5개의 예시 역시 여러분이 알고 있는 내용일수도 있다. 그러나 익숙하기 때문에 또는 누구나 그렇게 쓰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이러한 실수를 계속 반복한다. 방금도 나는 '계속한다’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동어반복하고야 말았다. 배우는데 멈추지 않고 의식해서 글에 옮겨야 함을 느낀다. 우리의 말과 글은 정말 그렇다. 필자가 어렵게 어렵게 고민해서 쓴 글이 역설적으로 독자에겐 편하게 읽힌다. 더 신경쓰고 배려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로 마음이 이어지는 것은 글에서도 마찬가지인듯하다. 깔끔하고 간결하게 글을 써보고 싶다면 이 책에 도움을 받아보자. 기본기는 갖춘 글쓴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