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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Lib Jun 09. 2017

하루키와 함께 가라앉은 하루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상실의 시대>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많이 떨어지지도, 그러나 그치지도 않은 채 해가 떨어졌다. 사실 거무죽죽한 하늘에 가려져 볕이 들었는지도 모를 그런 날씨였다. 일 년에 한 번 올까말까 한 감기마저 고약하게 찾아와선 나를 방 안에 묶어두었다. 방 안에서 뭐라도 좀 해볼까 서랍을 뒤지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사람들이 걱정 반, 힐난 반 담아 내게 꾸짖었다. “감기 걸렸을 때는 원래 이불 꼭 싸매고 누워서 땀 쫙 빼야 낫는 거야. 감기도 좀 걸려봤어야 알지.” 참 고마운 툴툴거림인데 난 여전히 눈 뜬 채로 침대에 눕는 게 어색하고 불편해서 결국 책 한권 집어 들었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 숲’). 언젠가 한번 읽어봐야지 마음먹었던 하루키의 소설이다. 몇 장 넘기자마자 이 책의 분위기가 놀라울 만큼 오늘의 그것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깔로 치자면 회색, 흐리터분해서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기운이다. 나는 이럴 바에 차라리 한없이 가라앉아보자 싶어선 양초 불만 켜두고 희미한 조명에 기대 책장을 넘겼다.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상실의 시대>는 곧 내 안에 깊이 들어왔다. 보통은 소설을 읽을 때 사건의 의외성이나 박진감있는 줄거리 또는 인물의 매력에 빠지는 편인데 이 책은 감정 묘사 그 자체만으로 나를 아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주인공들을 따라 발이 푹푹 꺼지는 교토의 설원을 걷는 느낌이었다. 걸어도 쉴 곳은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목적지 모르고 그렇게 터벅터벅 뒤따라갔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감당하기 벅찬 상실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슬픔으로 인해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머리에 나사가 풀려 불완전하게 살아간다. 극복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해보지만 다시금 완전해질 수 없음을 알고 좌절한다. 그들이 견디지 못했던 삶의 무게가 곧이어 내게도 스멀스멀 밀려 온다. 그러나 그런 상실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는 여전히 가늠하기가 어렵기만 하다. 몇 년 사이에 수 많은 인연이 찾아왔지만 너무 쉽게 많은 얼굴들을 떠나보냈다. 나라는 인간이 이별하는 일에 점점 무덤덤 해지고 있는건 아닌가 두렵다. 누군가를 잃었다는 일에 뼈저리게 아파하고 흐느꼈던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인간다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진심을 담아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는 일은 그자체로 엄청난 생명력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생명력을 견디지 못하면 치명적으로 변해 그 사람은 세상을 멀리하게 되고, 그 생명력을 견뎌내면 계속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생각을 하자 400쪽을 읽으며 느꼈던 음울함이 씻기는 기분이 든다.

이 소설은 많은 것을 허무로 풀어냈다.  만남과 이별, 꿈과 이념, 우정과 사랑.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은 때론 너무 쉽게 찾아오고 쉽게 떠나간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시 사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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