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 때 읽을 만한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by 글쟁이 결변
하루키 특유의 허무주의의 묘미가 있는 소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만, 읽으시는데 큰 방해가 없도록 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과 비슷한 인상을 받은 책이었다. 2013년에 출간된 비교적(?) 신작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다자키 쓰쿠르라는 1인칭 주인공은 흔한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대에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 같은 청년을 그려내는데 하루키는 정말 엄청난 재능이 있다. 특히 인물 묘사에 관한 그의 섬세한 재능은 하루키가 1949년 생임의 노인임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더라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작가적 특기가 분명하다.


이번 소설도 하루키 특유의 허무주의가 서사 전체를 아우르는 느낌을 받았다. 의욕과 힘이 없는 등장인물들과 축축한 비가 떨어질 것만 같은 흐린 도시의 이야기.


주체적인 편인 나로서는, 아무 이유 없이 무리에서 추방당할 때 아무런 대꾸 없이 그 요청을 받아들이는 쓰크루를 이해하긴 힘들었다. 지인 말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분위기는 일본인 특유의 안전 지향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가까운 나라에 살고 있지만 많은 일본인들이 갈등 해결방식에 있어 나(또는 한국인들)와 다른 경향성을 가지는 것 같다고 새삼 느꼈다.


개연성을 중요시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 투성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이 소설은 재미있다. 그래서 카페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침대에서도 붙들고 금방 읽어버릴 수 있었다.


아무런 개성없이 스스로를 자조하던 쓰쿠루가 여러 인물의 조언을 듣고 용기를 얻아 자신에게 가진 색체를 찾아가는 이야기. 일은 내려놓고 사랑과 정체성을 파악하고자 ‘순례’길에 떠나는 주인공의 결심은 울림이 깊다.


그러나 나는 쓰크루가 자신의 색체를 찾아가는 자전적 이야기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스릴러처럼 이 소설의 실마리들을 추적했다. 도대체 이 내용은 어떤 떡밥인걸까, 아오와 아카는 도대체 어떤 비밀을 가진 인물들일까. 하이다는 왜 나왔으며 빌어멀을 동성애 꿈은 왜 꾼 걸까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읽어 나갔다.


개인이 문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만, 순수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줄거리를 가진 소설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특별한 교훈같은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교훈은 아니지만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갖게끔 하는 책이었다. 쓰크루와 4명의 색체들 간의 관계를 떠올리며, 영원할 수 없는 우정과 그것을 덤덤히 받아들여야 하는 30대 청년의 감성에 공감했다. 또한 쓰쿠루와 안나의 배려심 있고 존중이 오고 가지만 다소 싸늘할 정도로 쿨하게 느껴지는 연인 관계가 흥미로웠다. 한편, 다른 작품에서도 그렇듯이 하루키의 작품은 지나치게 남성 위주적 사고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어, 이를 받아들이는 여성 독자들은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쓰크루의 ‘순례’길을 쫓아가며 내가 접하지 않은 다양한 군상들을 간접 체험했다. 내 주변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들을 깊이 들여다 보고, 그 관계에서 생길 만한 오해와 위기들을 점검해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름 휴양지에서 힘 빼고 읽기에 적당한 책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