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빌니우스
10월 12일 오후 8시 57분
간사한 사람 마음
방금 채 하루가 되지 않은 일기를 읽었다. 다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게 완벽한 하루라고 써 놓은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바로 이 사실을 부정했다. 우리의 숙소 가든타임을 나와서 리투아니아로 향하는데 날이 맑다 못해 점점 심하게 뜨거워지자 숙소에서 미처 마르지 못한 빨래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어제 날씨가 오늘처럼 좋지 않았던 점에 대해 불평했다. 불평을 하면서도 바로 나의 모순된 언행에 대해 자각할 수는 있었다. 그나마 일기를 쓴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사과 천지
리투아니아에 들어와서 우리가 묵게 된 역사 보존 지구의 한 공원에도 커다란 사과나무들에서 떨어진 사과가 가득이다. 차 안에도 사과가 가득하고 아침에 숙소의 여주인에게서 굵직하고 탐스러운 자줏빛 사과를 선물 받았으면서도 나무에서 방금 뚝뚝 떨어지는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줍지 않을 수는 없었다.저녁으로 사과 반 빵 반으로 치즈와 숙소에서 준 삶은 달걀을 곁들여 배불리 먹었다. 벌써 공짜 사과를 먹기 시작한 지 러시아로부터 거의 2주일이 다 되고 차 안에 사과도 2 주일은 너끈히 먹을 수 있으니 한 달은 공짜 무공해 사과로 배를 채우며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사과가 많은데도 예쁜 사과나무를 보면 또 따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든다.내가 이렇게 욕심많은 사람일 줄이야!
올드타운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넓고 쾌적한 시설에다 앞 뒤의 빼어난 풍경들이 이곳이 도시라는 걸 잊게 만들었다, 바로 앞에는 큰 고성이 있고 뒤쪽으로 커다란 개울이 아름드리나무의 단풍과 어우러져 계곡에 와 있는 느낌이다.
우리는 방금 도착했지만 아주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거닐었다. 맞은편에 보이는 성이 아름다웠고 그 위에 서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다리가 걱정이 되어 바람님이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자고 한다. 전망대를 좋아해서 한 군데도 빠짐없이 올라갔었는데 나 때문에 포기하는 게 싫었지만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우리는 근처에 있는 디자인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박물관 안은 아주 따뜻했고 옷을 보관해 주는 서비스가 있어서 편리했다. 전시관에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파리나 이태리의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창의적이며 개성적인 디자이너들이 아니었다면 여성들은 아직도 숨통을 조이던 중세의 복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빛바랜 헌 옷으로 만드는 세월이 만져질 듯 보였다.
사람이 입던 옷과는 달리 도자기로 만든 화려한 장식품들은 방금 백화점 진열대 위에 있던 것 마냥 새 것 같다. 도자기 작품 속 여성의 옷차림이 남성보다 훨씬 화려한 데다 남성이 여성 옆에서 살짝 무릎을 굽힌 모습을 보면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받았던 차별을 상상하기 힘들다.
길을 걸으며 구도심의 거리가 다른 나라들과는 사뭇 다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럽 특유의 화려한 중세 건축물들 대신 간결한 디자인의 근현대 건축물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많은 전쟁으로 페허가 되었던 도시를 재건할 당시 도로나 건축물들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롭고 합리적인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보았다. 그리고 이웃 한 나라들의 구도심 길들이 대부분 좁고 불편한 중세의 것인 반면 리투아니아는 넓은 인도와 자전거길등이 공원들과도 잘 연결되어 쾌적하고 편안하게 도시의 삶을 즐길 수 있어 보였다.
체스판이 그려져 있는 탁자, 거기에서 체스를 즐기는 사람들과 훈수 두는 사람들 그리고 구경꾼들.. 그들의 편안한 일상이 나에겐 그대로 멋진 풍경화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모들 , 낙엽비를 만들며 뛰노는 아이들 , 그사이를 지나다니는 조그만 장난감같은 기차, 그 기차를 타고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다. 다른 도시에는 관광객이 더 많아 보였는데 빌니우스에는 이 도시 사람들의 편안한 삶이 보였다.
남편에게 나도 체스판에 끼어들어 구경하다 돌아가는 맘 편한 동네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고 말했고 남편이 그렇게 생각하며 사진을 찍어 주었다.
우리의 산책길은 예술가들이 머무는 예술가 촌으로 이어졌다. 그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머무르며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건물이 있었는데 유대인의 병원을 몰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로 길 건너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들도 유대인들의 부락을 그들이 떠난 후에 예술가들에게 일정기간 씩 임대해 주고 있다고 했다. 이 곳은 리투아니아의 예술인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아픈 과거의 역사와 마주하는 곳일 듯하다. 그들은 이제 젊은 예술가들의 작은 꿈과 도전을 만들어 주는 이 곳에서 위안을 느낄 수 있으려나?
우리가 간 날은 젊은 예술가들이 그동안 준비했던 여러 가지 축제와 전시 그리고 발표로 활기가 넘쳤다. 작은 배, 혹은 낡은 자동차나 낡은 피아노에 마련된 전시물들은 흐르는 강과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시시각각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나고 있었고, 프롤리스트가 소꿉장난처럼 작은 그릇들에 차리고 있는 음식 맛이 궁금했다. 바로 뒤에서는 밴드의 공연이 있었는데 잠시 그들의 신나는 리듬에 몸을 맡겨보기도 했다.
작은 골목을 지나면서 벽마다 붙어있는 이색적인 포스터들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중에 요가 수업이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으니 마침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젊은이들이 반가워하며 말을 걸어온다. 우리의 일정상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열정적인 젊은이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티베트 불교나 달라이 라마와 관련된 공간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서로 이질적인 문화들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고 있는 공기는 따스하고 훈훈했다.
가능하다면 이 도시에 몇 날이고 머물며 그 안에 함께 어울리고 싶었다.
어느덧 길은 공원을 빠져나와 분위기 있는 카페들이 이어진 언덕길로 향하고 언덕은 작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와 이어진다. 다리 아래로 예쁜 카페를 다시 내려다보는데 작은 개울에 띄워놓은 그네를 타고 즐거워하는 청년들이 눈에 띄었다. 어딜 가나 재미로 넘쳐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곳이 도시 한가운데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숲과 물이 어우러진 낭만의 도시 빌니우스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녁을 먹은 다음에도 다시 거리로 나왔다. 아픈 다리가 좀 걱정되었지만 조금이라도 빌니우스를 즐기고 싶었다. 저녁때는 낮보다도 한가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직선으로 뻗은 넓은 도로가 갑자기 광장으로 변한 거리 한 복판에서 어린애처럼 즐거워진다. 그리고 낮에 보이지 않던 탑이며 성당, 궁전들의 모습이 조명에 훨씬 더 장엄한 자태를 뽐낸다. 광민은 리투아니아가 과거 화려했던 역사의 자부심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리투아니아는 발트 3국 중 가장 영토가 크고 헝가리와 더불어 제국을 꿈꾸던 나라이기도했다고 한다. 우리는 시원하게 뻗은 거리 한가운데를 걸으며 아쉬운 저녁을 보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 빌니우스를 빠져 나올 땐 구경하고 싶은 도시라기보다는 살고 싶은 도시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