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를 뺀 체코 여행 1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 올로모츠에서 맞 본 천국과 지옥

여름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여행이 러시아를 거치고 발트 3국과 폴란드를 지나는 동안 어느덧 계절은 가을의 끝자락으로 향하고 있었다. 캠핑카 여행이 익숙해져서 점점 더 마음의 여유가 생겼지만 한편으론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남편의 화 난 모습에 당황하며 깊은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의 일기를 다시 보니 남편이 여행을 위해 더 많이 수고하고 힘들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나는 철없이 아무 걱정 없으니 작은 문제를 지나치게 크게 부풀려 사서 걱정하고 남편은 신경 쓸 일이 많으니 점점 더 예민해져서 작은 문제까지 미리 걱정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었던 것 같다.


천국편

10월 20일 토요일 오후 2시 54분

지금 내 앞에는 작고 못생긴 배가 두 개 있다. 방금 전 점심 먹고 마을을 산책하다 주운 것이다. 맛을 보고 싶지만 지금은 배가 너무 부르다. 점심때 지나던 폴란드의 마지막 마을 길에서 사과를 50개나 주워서 실컷 먹었기 때문이다.(세면서 주운 것은 아닌데 세어보니 신기하게 딱 50개였다.) 폴란드는 나라가 크다 보니 주로 큰 도로 다니느라 사과 수확을 못해서 좀 서운했는데 정말 뿌듯하다.


오늘도 사과를 품에 안고 좋아하는 내 모습을 바람님이 카메라에 담았다.


IMG_6916.JPG 작고 못생긴 배 두 개. 의외로 아주 달콤한 맛을 품고 있었다.
IMG_6895.JPG
IMG_6914.JPG
사과를 안고 좋아하는 내 모습과 사과 꼭지를 다듬고 있는 남편의 진지한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여기는 체코에 들어와서 처음 숙박지로 정한 곳이다. 나라를 지날 때마다 조금 설레지만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어디나 광활한 평야가 이어져 있고 녹지가 많다.


방금 바람님이 날 위해 살생을 저지르겠다고 가위를 들고나가더니 들꽃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꽃 꺾는 것을 싫어해서 지금까지 꽃 선물을 못했던 남편이 작심하고 살생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다시 또 나간다. 이번엔 예쁜 장미 한 송이였다. 고고하게 홀로 피어있던 장미를 꺾어 오다니!!!


방금 전까지 꽃다발과 사과 꾸러미를 놓고 사진 찍기 놀이를 했다. 보기만 해도 너무 행복한 사과들과 꽃다발이다. 사진에 저장해 놓고 늙어가면서 가끔씩 볼 때마다 오늘의 기분을 기억하겠지.


20181020_123520.jpg
20181020_152859.jpg
남편이 살생하기 전 내가 찍어 놓았던 장미꽃 . 남편으로부터 가끔 들꽃 한 두 송이는 받아봤지만 이렇게 푸짐한 꽃다발은 인생 처음. 이날 만큼은 천국이 부럽지 않았다.

창 밖에는 아이 둘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가 연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커다란 연을 두 부부가 감당을 못한다. 그나마 엄마가 좀 날린다. 아빠 연은 땅에서 오르지를 못하네..


바람님은 지금 나의 요가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다. 작은 공간에서 스트레칭을 제대로 못해서인지 요즘 오른쪽 다리가 심상치 않게 아팠는데 좁은 통로에 요가매트를 깔고 허리 스트레칭을 하고 나니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차 안의 작은 통로에 침상 지지를 위한 나무토막이 있어서 그거라도 없으면 좀 편할 것 같다고 말했더니 바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어서 해 주는 것이다. 요가매트도 아예 통로에 맞게 재단해 놓으니 훨씬 깔끔하고 아늑하다.


그러는 사이 밖이 궁금해서 내다보니 아이들 아빠가 연날리기에 성공해서 아이들과 신나게 연을 날리고 있었다. 거칠 것 없는 끝도 없이 하늘만큼 너른 들판에서 아이들과 연날리기를 하는 부모들... 참 예쁜 그림이다. 그 사이 왼쪽 창문을 보니 노인 둘이 탄 예쁜 꽃마차가 지나간다. 아까 지나오는 길에 말 타는 곳이 있었는데 그쪽에서 온 관광객 일 것 같았다. 차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들판길을 마음껏 달리고 싶은 마음, 저 노인들에게는 그런 동심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차 안도 차 밖도 여기는 그리고 지금은 완벽한 천국이다.



20181020_124233.jpg
20181020_155846.jpg
차 안도 차 밖도 지금은 완벽한 천국이다.
이렇게 예쁜 꽃다발을 선물하고 환한 표정이었던 바람님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장본인이 되기도 한다.



지옥편

10월 21일 일요일 오후 7시 55분

운명은 언제나 행복만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브르노에 도착해서 맨 처음 발견한 슈퍼는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제법 컸고 물건도 알찼으며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할인도 많이 했다. 얼른 환전을 해서 물건을 사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부탄가스가 없다.(러시아에서 부탄가스를 어느 정도 샀지만 머무는 지역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다 보니 충분하진 않았고, 유럽에서는 생각보다 부탄가스 구입이 어려웠다. 폴란드에서 체코로 들어오는 국경 근처 휴게소에서 부루스타를 발견했기 때문에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부르노에 오면 부탄가스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때까진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행안내센터에 가서 팸플릿을 보며 여행 계획을 세웠고, 나와서 환전소를 찾았다.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근처에 보이는 환전소가 문을 열지 않았다. 은행에서 돈을 찾는 것은 일요일엔 수수료가 비쌀 것이라 생각해서 다른 환전소를 찾느라 돌아다니는데 저 멀리 쇼핑센터가 보인다. 부탄가스를 살 수 있다는 기대로 피곤함도 잊고 쇼핑센터로 바로 향했다. 그러나 커다란 쇼핑센터의 마트에 부탄가스는 없었고 우리는 심정이 불편해졌다. 게다가 시간도 점심시간을 훌쩍 넘어서 바람님의 신경이 더 예민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배고프면 화가 난다는 별이님의 이야기를 더 많이 기억해야 했다.


난 다리가 아프니 바람님이 쇼핑센터의 나머지를 둘러보고 오기로 했고 난 그동안 유럽의 부탄가스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생각했다. 여기서 부탄가스를 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 있는 것을 잘 활용해서 오랫동안 최대한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생각하다 보니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샘솟듯이 나온다. 바람님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배가 고프다고 말했지만 난 걱정하지 말라며 내가 생각해 놓은 방안들에 대해 신나게 얘기했다. 그중의 하나가 차를 마시는 것도 당분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무시동 히터로 공간을 따뜻하게 하면서 찬물을 마시고, 커피도 찬물로 타서 먹으면 향기가 날아가지 않아서 더 맛있으니까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바람님이 나에게 정색을 하며 핀잔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문제는 부탄가스가 여기에 없다는 것인데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위기로 느끼고 말도 안 되는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좀 서운했지만 바람님이 배가 고프다고 말했었기 때문에 빨리 집으로 가서 밥을 먹자고 했다. 이번에 또 정색을 한다. 집까지 너무 멀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알겠다고 하고 바람님이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사실 난 어제와 오늘 아침 고기를 먹어서인지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아서 차에 가서 먹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워낙 거리 감각이 둔하다 보니 우리 차까지 얼마나 거리가 먼지 알 수 없었고 그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바람님이 먹고 싶은 것을 먹었으면 했다.


설상가상 우리가 고른 음식은 형편없었다. 다리도 아프고, 음식도 마음에 안 들고 바람님은 내 마음을 몰라주고 서러운 소리만 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소중한 외식 시간인데 자꾸 목이 메고 눈물이 나려고 한다. 이러려고 어제 장미꽃을 꺾어 준 것일까? 나는 무언가 부족해도 우리 둘이 마음을 합치고 잘 대비하면 아무 어려움 없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다. 그러나 바람님은 대체할 수 있는 여건이 있는데도 극단적인 절약을 하겠다는 나의 발상을 너무 답답해했다. 내가 상황을 좀 더 잘 마무리하고 싶어서 잘 설명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분통 터져했다. 바람님의 이런 모습이 너무 낯설었고 마음이 아팠다.


과연 우리는 행복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천국과 지옥이 이렇게도 가깝게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다행히 그날 밤 창밖에 달무리의 황홀한 모습에 속상했던 마음이 신기하게 사라졌다.

우리 부부는 이런 식으로 여행 내내 크게 작게 토닥토닥 투덕투덕하면서 새로운 서로를 만났다.
그동안은 서로가 보고 싶은 부분만 봤다면, 캠핑카 여행은 몰랐던 나 자신과도 맞딱 드리고,
서로의 새로운 모습과 만날 수 있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그로 인해 서로 더 많이 깊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훈련의 시간이었다.
20181022_150150.jpg
20181022_192050.jpg
낮동안 힘들었던 마음의 그늘을 환하게 밝혀주던 달무리.


그리고 올로모츠

체코는 크게 프라하가 있는 북서쪽의 보헤미아와 남동쪽의 모라비아라는 지역으로 구분된다. 우리는 따뜻하면서도 여유 있는 여행을 하기 위해 프라하를 빼고 모라비아 지역을 중심으로 여행하기로 했다. 나는 점점 우리의 여행이 더 느리고 여유 있어 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론 참 잘한 일이었다. 보헤미아 지역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여유 있는 여행이 쉽지 않다. 체코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보헤미아의 체스키 크롬 코프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관광객 인파에 놀라웠다.


올로모츠는 천 년의 도시 역사를 자랑하듯 많은 성당과 교회들이 즐비했다. 박물관이 문을 닫아 입장하지는 못하였지만 도시 자체가 박물관 같은 느낌이다.(생각보다 유럽의 도시들은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 많지 않다. 유럽에 예쁘고 멋진 양식들의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백 년 사이다.) 가톨릭이 체코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지어졌다는 성당을 비롯해 시대에 따라 다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들이 서로 경쟁하듯 아름답고 웅장한 외관을 뽐내고 있었다. 마침 유명한 성 삼위일체 석주를 구경하고 있는데 멋진 옷을 입은 사제들과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석주를 둘러싸자 갑자기 신성한 공간으로 다시 보인다. 도시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건축물이나 조각 일지 모르지만 그 공간을 살아나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인 것 같다.


다음으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14미터나 된다는 시계탑이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것을 1950년대 사회주의 정신을 반영하여 새롭게 개작한 캐릭터들이 인상적이었다. 폴란드를 지나며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만들어져서 일까? 아무리 좋은 의미라도 강제로 주입시키는 사회의 명제가 되는 순간 그 가치는 왜곡되거나 퇴색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그래도 역시 작은 인형들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어른이 돼서도 사람들은 아이적 가지고 있던 놀이의 재미들을 잊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시계탑 앞에서 머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크 분수들. 도시 재탄생의 상징물이다. 1650년 스웨덴 군대가 떠났을 때 700개의 건물 중 4분의 1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1640년에 3만 명이었던 인구가 1765명으로 줄었다고 한다.(구글 참조)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인물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분수를 보며 그 영광을 가져오고 싶었던 것 같다.


20181021_113529.jpg
20181021_115016.jpg
20181021_115000.jpg
올로모츠는 도시 자체가 커다란 박물관 이었다
20181021_131833.jpg
20181021_131402.jpg
20181021_125354.jpg
20181021_125235.jpg
IMG_7071.JPG
20181021_130101.jpg
성직자와 신도들, 상인과 손님들,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도시를 살아나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20181021_115138.jpg
20181021_115024.jpg
아무리 좋은 의미라도 강제로 주입시키려는 사회의 명제가 되는 순간 그 의미는 퇴색하거나 왜곡되버린다.
IMG_7002.JPG
IMG_7098.JPG
허름한 담벼락에 화려한 황제의 모습이, 오래된 옛 건축물과 맥도날드의 간판이 대조적이다.
20181021_130237.jpg
20181021_130422.jpg
20181021_130352.jpg
20181021_130311.jpg
20181021_130531.jpg
많은 유럽의 분수들 중에서도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바로크 분수들. 분수는 도시의 자존심 으로 보였다.
20181021_161842.jpg
20181021_130801.jpg
사람들이 살고있는 예쁜 골목,오래된 수도가 정겹다.
IMG_6998.JPG
IMG_6967.JPG
거리를 걸으며 부딪치는 수 많은 화려한 유적들. 프라하 못지않은 볼거리들이 있으면서도 훨씬 여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다.


IMG_7083.JPG
20181022_170632.jpg
20181021_171749.jpg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공원 한 편에 낡은 피아노와 의자가 눈에 띄었다. 마감시간인지 관리인이 문을 잠그고 있어서 알 수는 없었지만 피아노의 사연이 궁금 했다.


.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정직함이 희망보다 가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