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체코의 남부 모라비아 지역을 여행하기로 한 일은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프라하를 비롯한 보헤미아 지역에 비해 물가도 싸고 놀거리 볼거리도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사람이 적어 한결 여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모라비아의 진주라 불리는 텔츠나 체스키크롬코프(여긴 우리가 들른 유일한 보헤미아 지역)도 아름다웠지만 기대 없이 들렀던 작은 도시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체코에 들어오면서 휴게소에서 부루스타를 발견하고 난 뒤 가는 곳마다 마트를 들러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부탄가스는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행은 작은 결핍들을 즐기는 거니까.
10월 24일 수요일 비 구름 맑음
여행 중 쉼표 둘째 날
여기는 트레본이라는 체코 남부의 작은 도시. 근처에 넓은 모래사장이 딸린 호수가 있고, 샤워시설이나 탈의실, 보트들이 즐비하다. 호숫가도 산책할 겸 이 근처를 정박 장소로 골랐는데 뜻밖에 텔츠만큼 아름다운 구도심이 가까이 있었다. 나무가 울창한 공원을 가로질러 가니 큰 성문이 나오고, 뜻하지 않은 예쁜 도시를 발견할 때의 기쁨. 선물을 한 보따리 받은 기분이다.
이 도시 입구엔 아파트도 있고 제법 사람들이 많이 살 것 같아 보였지만 구도심엔 빈 상점들이 많았다. 도시가 예뻐서 마그네틱이라도 사려고 했지만 관광안내소 직원이 업무 마감시간이라고 하는 바람에 바람님이 주차 시계 표만 사 가지고 나왔다.
힘센 카모마일
마을을 빠져나와 작은 길옆으로 카모마일 밭이 이어진다. 수확이 끝난 밭에 드문드문 남은 카모마일이 채집 본능을 자극한다. 마침 바람님이 차를 세우고 한 송이 가져왔다.
"이왕 가져올 거 한 움큼이라도 되면 말려서 차라도 끓여 먹을 텐데..."
"그럼 직접 해봐."
그러나 막상 가져온 것은 고작 세 송이. 그것도 한 송이는 캐는 도중 나에게 시달려 바로 시들어버렸다. 가녀리게 생긴 꽃이라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땅에 붙어있으려는 힘이 어찌나 세던지 꽃의 모양을 잘 살리면서 꺾는 것은 힘들다. 그래도 우리가 수확한 사과들과 카모마일 꽃향기로 우리 차는 훨씬 풍요로워졌다. 게다가 숙소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여유로운 시간!.
당황스럽고 황당했던 셀프 체크인
조금씩 비가 섞인 바람이 차갑게 불고 네비가 의심스러운 길로 우리를 안내하면서 예상 도착 시간이 자꾸 늦어졌다. 비포장으로 좁게 나있는 길 옆에 나뭇가지와 덤불을 헤치며 운전하는 바람님도 불안한 모습이 역력하다. 우린 정말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걸까?
고생 끝에 마을과 많이 떨어진 곳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다행히 숙소의 풍경은 맘에 들었다. 집 반대편 쪽에 커다란 숲 정원엔 말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고, 정문 안엔 여러 채의 크고 작은 숙소들이 화목한 가족들의 추억을 간직한 정겨운 모습이다. 그런데 주인은 없고 기술자로 보이는 분이 정문에서 가까운 숙소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한가해진 비수기를 이용해서 숙소를 정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분은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우리가 무언가를 물어볼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당장 아무도 없으니 우리는 물어봐야만 하는 입장이었고 그분에게 다가갔으나 우리를 피하고 싶었는지 건물 2층으로 올라가버린다.
메일을 통해 우리의 도착 예정시간을 미리 알려주었고 답장도 받은 터라 안심하고 왔었는데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다 주인과 통화가 되었으나 미안하다거나 빨리 오겠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고 메일로 미리 알려 준 내용( 인원이 몇 명인지, 며칠 묵을 것인지 등)을 다시 묻는 것이 아닌가?
어찌 되었거나 주인과 통화가 된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나마 집을 가지고 다니니 집으로 돌아가서 주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숙소로 들어가는 입구도 아톰의 머리가 닿을까 위험해 보여서 집 앞에 차를 대고 늦은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도 한참을 연락이 없던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가 늦어질 것 같으니 우리한테 셀프 체크인을 하라는 것이었다. 주인의 말대로 찾아갔지만 그곳엔 두 개의 방이 있었다. 어느 쪽이 우리가 써야 할 방인지 알 수가 없으니 사진을 찍어서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인은 묵묵부답.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와서 기다리는 수밖에. 기다리는 중에 아이들과 할아버지가 마을에서 돌아왔으나 아까 그분처럼 우리를 슬며시 피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가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주변에 인적도 없는데 집 앞에 단 한 대의 차가 있었고 심지어 번호판도 한국어로 돼있어서 외국인 차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눈을 감고 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 차를 몰라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가가 막히고 어이없고 황당했다.
뻔뻔하고 융통성없고 배려없는 사람이라며 욕을 하며 주인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전화통화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환한 미소와 친절한 태도로 우리를 맞이하는 주인.( 아까 만난 아이들의 엄마였다.) 게다가 지금 비수기라 손님이 없으니 방 두 개를 다 써도 좋다고 했다. 정말 우리에겐 필요 없고 의미 없는 친절일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넉넉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체크인 문제를 제외하면 이 곳은 완벽히 내가 원하는 곳이었다.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숲 정원이 손에 닿을 듯 더 가까이 보인다. 한가로이 말들이 풀을 뜯거나 거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아이들을 위해 직접 만들어 줬을 것 같은 나무침대들도 정겹다. 가족들이 한 방에 가득 모여 즐거운 휴가를 보내는 모습이 눈 앞에 잡힐 것 같다.
작은 목욕탕에 있는 귀여운 욕조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러시아에서는 녹 냄새가 나는 곳에서 세수도 안 하던 내가 이 올드하우스에선 반신욕까지 했다.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라트비아의 내가 좋아했던 굿모닝 가든에서 보다 훨씬 더 피로가 회복되는 느낌이다.(이것은 내가 살 집을 만 들 경 우 반신욕조를 만들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녁 때는 기분을 내기 위하여 가지고 있던 식재료 몇 가지를 들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몇 명의 청년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엌은 오래되고 낡은 살림살이들이 많았지만 넓어서 함께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했다. 가스가 켜지지 않아서 당황하고 있는데 친절한 청년 하나가 대신 불을 붙여주었다. 청년들이 준비하는 식사는 수프부터 시작해서 양념이 돼있는 커다란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와 감자튀김 그리고 빵. 거기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거대한 크기의 탄산음료와 맥주. 우리와 먹는 양이 엄청난 차이난다. 우리도 오랜만에 고기를 구워 와인과 함께 헸다.
다음 날 아침엔 우리가 주방을 모두 차지하고 농원의 주인이 된 기분으로 맘껏 요리를 했다. 가지고 다닐 음식도 만들고 그들처럼 감자튀김을 해서 먹어보기도 했다.
체크인이 힘들기는 했지만 이 농원에서 얻은 에너지로 우리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거쳐 이태리 그리고 그리스 맨 마지막 숙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 번도 숙소에 들어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