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안과 친구가 된 사연
해남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문득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개월이 되어간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세계여행에서 돌아온 지 3개월 쯤 되던 때 였다. 3개월이라는 숫자가 왠지 의미 있게 느껴진다. 나무에 옹이처럼 내가 자라고 있는 마디, 혹은 변곡점이 오는 주기일지도 모르겠다.
첫날 연필을 손에 쥐고 작은 찻잔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잔뜩 설렜다. 종이에 그림이 어떻게 그려질지에 대해선 그다지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싶다는 욕구보다는 그리겠다는 마음으로 대상을 마주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냥 보는 것과 그리겠다는 마음으로 보는 차이를 진정 느껴보고 싶었다.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으며 상상했던 바로 그 장면 속에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황홀했다.
11월 하순, 남향집 부엌으로 깊숙이 들어온 따스한 햇살을 등에 진 작은 찻잔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찬히 바라볼수록 가지각색의 모습이 보였다.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찻잔은 식탁 유리와 함께 어우러져 또 다른 숨겨진 모습을 보여주며 점점 더 나를 매혹시켰다.지우개도 없어서 연필이 한 번 지나간 자리를 바꾸지 못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은 덕인지 그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생각보다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너무 쉽고 간단하게 그렸는데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충만해진다.
다음날엔 설렘에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까지 얹어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그리고 매일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날 부터인가는 글쓰는 시간보다 그림그리는 시간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1년치 세계여행 일기를 3분의 1도 쓰지 못했는데... 그래서 요즘엔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머리를 쉬고 싶을 때 그림을 그리고 있다. 머리가 거짓말처럼 맑아지고 새정신이 든다.
내가 얼마나 그림에 소질이 없고 그리기 싫어했었는지에 대해선 이미 앞의 글들에서 이야기했었다. 그러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인생에 커다란 변화인 것이다.난 이 변화를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공유하고 있다. 내 그림을 보며 미소가 떠오르면 좋겠고 때로는 새로운 활력을 얻기를 바란다. 내 그림이 더 나아질 수도 더 못해질 수도 있지만 내가 좋아서 그린 그림에 들어있는 행복한 에너지를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다 보니 좋은 글 친구들을 만나는 기쁨도 있다. 김선지 작가가 그런 분이다.주로 미술과 영화에 관련된 작품을 쓰신다. 그중에서도 특히 화가이자 생태학자인'메리안'에 대한 글에 감동해서 그녀가 출판했던 '곤충 책'을 샀다.
메리안은 370여 년 전 성차별이 심했고, 애벌레나 구더기가 더러운 오물에서 생겨난 악마의 소산으로 여기던 시대에 태어나 쉰이 넘은 나이에 수리남으로 모험을 떠났다. 파브르보다도 200년이나 앞서서 곤충을 연구했다는 성과도 놀라웠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태웠다는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가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던 나이는 딱 지금의 내 나이쯤이다. 요즘 한 달째 매일 그녀의 그림을 그리며 이제 메리안은 나의 동무가 되었다. 그녀가 곤충이나 식물을 관찰하고 그리며 적은 몇 줄 안에 담긴 섬세하고 담담하며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다가 제목만 달기로 했다. 가능하면 다들 나처럼 메리안과 직접 만나보는 게 더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메리안의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렸지만 내 그림 수준이 높지 않고 색연필 색깔이 많지 않아서, 다르게 표현된 부분도 많다. 특히 맨처음 그린 파인애플의 경우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 너무 달라서 거의 창작 수준으로 그렸다. 나로선 나다운 그림이 되어 만족스럽다. 오히려 이런 점이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메리안의 그림을 직접 보는 계기가 되면 더 좋겠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다들 나처럼 메리안과 직접 만나보는 게 더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되도록 메리안의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렸지만 내 그림 수준이 높지 않고 색연필 색깔이 많지 않아서 다르게 표현된 부분도 많다.특히 파인애플의 경우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 너무 달라서 거의 창작 수준으로 그렸다.나로선 나다운 그림이 되어 만족스럽다. 오히려 이런 점이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메리안의 그림을 직접 보는 계기가 되면 더 좋겠다.더불어 메리안같은 좋은 친구를 소개해 주신 김선지 작가님의 글도 적극 추천한다.
2020년 2월 28일 그림 하나 추가
메리안의 첫번째 그림인 파인애플은 특별히 두 개가 있었는데 내가 아는 파인애플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 아직 성숙되기 전,보라색에 노란색이 어울린 열매에 빨갛고 화려한 가시 꽃이 어우러진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이걸 그려놓으면 사람들이 파인애플인 줄 모를 것 같았고 비슷하게 표현할 자신도 없었다.그러나 메리안의 그림들을 한 달 째 따라 그리다 오늘 다시 보니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안 그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