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30주년 선물 캠핑카 세계여행3

실패담으로 시작되는 여행기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기 몇 권을 읽었다. 흥미진진한 여행기들의 공통점은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로 시작된 다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들이 겪은 실패나 좌절을 피하고자 노력한 덕분에 무사하고 풍성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발칙한 유럽산책’을 쓴 빌 브라이슨이 한 겨울에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생각지 못한 낭패를 겪는 것을 보고, 여정을 계획할 때 날씨와 기후를 많이 고려했다, 7년 넘게 자전거로 세계 여행을 한 젊은 작가가 여행을 떠나기 바로 며칠 전 갑작스러운 출혈로 위기를 맞이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면서도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늘 뒷전으로 미뤄두기 일쑤였던 건강검진을 받았고, 첫째를 출산하고 생겨버린 만성 치질도 과감히 수술했다. 주사 맞기조차 겁내는 내가 긴 여행이 아니었다면 절대 결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여행’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관점들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여행담도 실패와 좌절로 시작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것들은 결국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풀어 보려고 한다.


두 달 가까이 연기된 출발 날짜

여행 1년 전부터 가장 신경 쓴 것 중의 하나가 출발 날짜였다. 우리 부부는 캠핑카로 시베리아를 통과해야 했으므로 최소한 초여름에 출발하고 싶었다. 시베리아라는 이름만으로도 동토의 추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출발 3개월 전이면 충분하다는 불로거들의 말을 믿고 4월 초에 예약을 하려고 하니 8월 19일 이후에나 출발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어 많은 표가 미리 매진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따뜻한 날씨를 두 달이나 써 버리면 시베리아에서 더 빨리 찾아오는 겨울을 맞이 할지도 모른다. 러시아를 겨울이 되기 전에 통과할 수 있다 해도 북유럽은 포기해야 한다. 몇몇 동유럽과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은 쉥겐 협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세계여행을 바로 코 앞에 두고 한껏 부풀어 기대에 찼던 만큼 실망이 너무 컸다. 아무리 생각해도 추위에 쫓기듯 여행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싫어서 여행을 내년으로 미룰까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직장도 그만둔 마당에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를 예약했다. 혹시라도 취소된 자리가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해 달라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첫 번째 좌절의 선물 -가족 첫 해외여행

어차피 떠날 날짜가 정해진 이상 거기에 맞추어 우리가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원래의 예정대로 6월 마지막 주에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 달간 해외로 배낭여행을 하고, 남은 한 달은 캠핑카로 국내 여행을 하면서 적응 훈련을 하기로 했다. 캠핑카 여행은 우리에게 고된 여행이 될 수 있으니 심신도 단련하고 캠핑카에 사용할 내비게이션도 시험해 보는 등 장기 여행을 위한 워밍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도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해서 가족 전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과는 베트남의 다낭과 호이안을 며칠간 여행했는데 우리 네 식구끼리 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둘째의 나이가 바로 내가 결혼할 당시의 나이와 같으니 말이다. 이제 아이들에게도 짝이 생길 나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늦게 출발하게 된 것이 너무 고맙다. 가족 해외여행을 선물로 받은 기분이다. 이제 직장인이 된 첫째성두가 여행비도 많이 보태고 외식도 책임져서 더욱 풍성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마침 둘째 선영이의 생일이 들어있어서 아오자이도 나랑 같이 맞춰 입고 한껏 기분을 내었다. 특히 일몰과 월출이 동시에 보이고 세월이 켜켜이 덮인 지붕들이 가득 내려다 보이던 비현실적 풍경에서의 저녁식사는 우리 가족에게 잊지 못할 한 장면이 되었다.


IMG_0994.jpg
IMG_1060.jpg
IMG_1105.jpg

차대번호, 과연 우리의 발목을 잡을까?


한 달간의 배낭여행에서 돌아와 출발이 코 앞에 닥쳤는데 생각지 못한 일로 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중학생인 된 나의 조카도 학교 생활에 위기를 겪고 있었다. 나는 조카에게 편지를 쓰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수아에게


.... 생략.....


차대번호라는 것이 있는데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이야. 차를 해외로 반출할 때 사진을 찍어서 제출을 해야 하는데 15년이나 된 차라 지워져서 보이지가 않아. 검사소에서 차를 검사할 때 알아내서 수속을 밟아 재 탈각을 했어야 했는데 그 사람들이 검사를 제대로 안 한 거야. 그리고 이모부는 차대번호가 지워졌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어서 몇 날 며칠 뙤약볕에서 차대번호를 찾느라고 애를 썼지. 결국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경로를 통해 차대번호를 다시 세길 수 있는 서류를 준비했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새길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짜가 24일이라는 거야. 우린 20일에 배를 타야 하는데 말이야. 이모부는 오늘 아침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해결하려고 천안에 갔어. 너처럼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이모가 이 얘기를 길게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보니 안생이 원래 위기의 연속이라는 것이야.

위기는 극복할 수도 좌절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은 될 수 없어.


과연 이모는 올해 세계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 없을까?

내일 일은 아무도 몰라.

그래도 떠나려고 노력하겠지. 그게 이모가 정한 방향이니까.


..... 생략......


일어나지 않은 일에 골몰하지 말고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데 온 힘을 쏟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몇 년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세계여행의 위기에 선 이모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수아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유빈이와 히든싱어도 보고, 밥도 먹고 ,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도 광민 씨로부터 연락이 없어 전화를 했더니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찢어져서 지금 교체 중이라고 했다. 아침도 못 먹었는데 지금은 벌써 오후 두 시가 가까운 시간, 게다가 고속도로 한 복판에서 얼마나 당황했을까? 너무 걱정이 된다. 정말 우리가 출발할 수 있을까? 우리 여행을 1년 늦추는 게 낫지 않을까? 국내 여행도 더 많이 해 보고 , 무엇보다 캠핑카에 적응도 좀 해보고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제대로 검사를 하지 않은 검사소에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한다.

정말 한 치 앞을 모르겠다.


8월 9일 일기

출발 날짜가 딱 열흘 남았다.

우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차대번호가 아니었다.


어제 공업사에 가서 허무할 정도로 쉽게 차대번호를 찾았다고 한다. 우리가 찾던 위치보다 좀 다 아래쪽에 있었고 랜턴을 비추니 바로 보였다고 한다. 잘된 일이지만 멕이 풀린다. 오히려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찢어지는 바람에 차 바닥 쪽에 설치했던 배수관이 고장 나서 고치 느라 뙤약볕에서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광민 씨는 다른 사람에게 힘든 일을 시켜놓고 혼자 밥 먹겠다고 할 수 없어서 저녁 7시가 돼서야 첫 끼니를 먹었다고 한다. 국내에선 캠핑카 배수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수를 그냥 차 바닥으로 흘려버리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이 차를 리모델링했던 업체에서 공사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배수 시스템을 없애 버린 것을 다시 만들었는데 그 공사가 부실했느지 또 고장 났던 것이다. 정작 차대번호가 아니라 타이어나 배수관 고치는 일로 더 많은 고생을 한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문제라고 느낀 것은 대부분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리고 심지어 실은 문제가 아니었던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우린 공업사 측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100%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위치를 물걸레로 닦아가며 확인하고 사진까지 찍어보네 서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공업사 측이 처음부터 기술자와 통화하게 했으면 이런 촌극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공업사에서 검사가 되었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직접 찾아갔던 것은 정말 존경스럽다. 위기에 또 다른 위기가 몇 겹을 겹쳐서 덮쳐와도 당황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하는 남편이 믿음직스럽다.


끝내 찾아온 불행-출혈

출발 전 날 변기에 낭자한 출혈을 보고 위기를 맞이했다던 어느 여행작가처럼 나에게도 같은 불행이 찾아왔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 생각지 않은 위기를 맞으며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던 것 같다. 동남아 여행 때도 다른 짐을 모두 줄여 좌욕기를 싸들고 다니며 노력했고, 돌아올 즈음엔 완치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신 있게 좌욕기를 다락에 집어넣었고 빠른 회복을 위해서 먹던 각종 보조식품들도 모두 버렸다. 그러나 결국 출발 직전 다락에 넣어두었던 좌욕기를 다시 꺼내야만 했다. 흥미진진한 여행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결혼 30주년 선물 캠핑카 세계여행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