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호숫가에서 만난 아이들

한 여름 장마철에 쓰는 스위스 가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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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서 머물던 호숫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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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로 가는 길목 마지막 오스트리아 동네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에 당도해서 멀리 보이는 높은 산들을 보며 알프스의 풍경이 드디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예쁜 호수에 얼굴을 담근 설산의 자태는 더 이상의 비경이 필요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인스브루크에 당도 하자 갑자기 품이 커진 산 세 들이 할슈타트를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스브루크를 여행하며 스위스를 꼭 가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 모습보다 얼마나 더 멋질 수 있을지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스브루크의 2000미터 절벽에서 잠을 자고 눈을 밟으며 이미 스위스를 충분히 느꼈으니 스위스가 좀 싱거워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아름답고 낯선 풍경과 사람들이 나를 다시 설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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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각각 다른 물빛. 내 사진기로는 잘 표현할 수 없었지만 하루에도 물빛이 이렇게 다양하게 변한다는 것이 신기.


스위스에 와서 첫 날을 묵기로 한 곳은 베른 호수였다. 새로 이사 온 동네 사람처럼 바람님이랑 먼저 주변 탐색을 나섰다. 우리 집 앞에는 길 건너에 작은 기차역이 있고, 근처에 건너편 호수로 이어지는 작은 터널이 있다. 산책로로 만들어진 길을 걷다 보니 공중화장실이 눈에 뜨인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처럼 수세식이 아니고 에스토니아 국립공원에서 보았던 잘 관리된 푸세식이다. 게다가 달랑 하나다. 스위스는 부자나라여서 오스트리아처럼 화장실 시설이 돼있을 줄 알았는데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호수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어이없는 투정인가? 수세식보다 훨씬 더 친환경적인 화장실을 칭찬해야 마땅하다. 그동안 이런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도 할 겸 난 내 몸에게 조용히 타일러 본다. 너도 할 수 있어. 이 아름다운 호수를 망칠 셈이 아니라면 이 화장실을 기꺼이 좋아해 봐..(다음 날 몸이 내 말에 감동했는지 제대로 볼 일에 성공했다.)


베른 호수의 물빛은 지금까지의 물빛과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정말 다른 것인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지만 투명한 에메랄드빛이 황홀하다. 멀리 설산과 어우러진 하늘도 더없이 맑고, 가끔씩 하얗고 푸근한 뭉게구름이 물빛을 다양하게 연출한다. 주변에는 바비큐 시설이 몇 군데 눈에 띈다. 이런 시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뒤쫓아 오는 겨울 걱정만 아니라면 이런 곳에서 며칠 씩 쉬어가도 참 좋을 것 같다.

도착한 여행지마다 늘 드는 생각. 이렇게 좋은데 왜 자꾸 가야 하나?

하지만 막상 또 다른 곳에 도착하면 다시 좋아하며 그곳에 빠져들겠지?


호숫가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떠들썩하니 지나간다.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뒤처진 아이들 세 명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보니 남매들인 것 같다. 호숫가에서 뛰어놀다가 자전거나 씽씽카를 타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중에 가장 큰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니 아홉 살이라고 한다. 이제 막 기저귀를 벗었을 것 같은 막내의 안전 장비를 챙겨준다. 7살도 안 돼 보이는 둘째로 보이는 아이는 의젓하고 능숙한 솜씨로 보관소에 있는 자신의 도구들을 챙긴다. 부모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자유롭게 뛰노는 아이들이 풍경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 준다. 너무 기특하고 예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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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다시 길을 건너 우리 집 뒤 언덕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길옆으로 보이는 정원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언덕 위 넓은 풀밭엔 한가한 소들이 풀을 뜯으며 시골냄새를 풍긴다. 날씨는 아직도 가을을 벗어나지 않아서 단풍으로 물든 산과 꼭대기의 설산들이 맑은 호수와 절묘하게 어울려 어디를 보아도 눈이 호강이다. 이런 그림 속에 우리 집이 있다. 신나는 일이다. 이렇게 풍경 속에 푹 빠져 있을 때쯤 우리의 이웃 별이님네가 도착한 모습이 보인다.(러시아 횡단 이후 잠시 헤어졌다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만나 스위스를 함께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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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려오면서 산책길에 노부부가 데리고 나온 손주에 우리 눈길이 함께 머문다. 아이는 아직도 젖꼭지를 물고 있는데 신기한 것은 자전거의 바퀴가 두 개다. 우리는 아기들 때 네발자전거를 타게 하는데 이런 자전거는 처음 본다. 신기해서 가만히 보니 자기의 두 다리로 걸으며 앞바퀴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파른 내리막길에서도 어른들의 표정이 한가하다. 내 손에 땀이 난다. 하지만 아이는 아주 능숙하게 자신의 두 다리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장면은 여행하면서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무언가를 꾸준히 연습해서 스스로 잘하는 걸 배운 아이들은 어디에나 이것을 적용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두 발 자전거를 발견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손주가 생기면 꼭 사주고 싶다.


별이님네와 만나 이웃이 생기니 훨씬 풍성해진 저녁 식탁, 스위스의 행복한 첫날밤이 지났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생사를 넘나드는 험난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IMG_8180.JPG 돌쟁이 아기가 두 발 자전거를 타던 언덕길


별이님네와 만나 이웃이 생기니 훨씬 풍성해진 저녁 식탁, 스위스의 행복한 첫날밤이 지났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우리의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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