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만났던 사투르니아 온천

사투르니아에서 만난 블루라군

괄호 안은 최근에 첨가한 글


2018년 11,23금 오전 6시 40분


지금 무시동 히터를 틀어놓고 차 안을 말리고 있는 중이다. 결로현상으로 더욱 축축해진 차 안을 덥히고 있으나 그 효과는 미심쩍다. 내 얼굴은 금방 건조해지는 것 같고 널어놓은 내 패딩(밤새 바깥 불빛을 가리기 위해문 앞에 걸어놔서 축축해졌다)도 잘 마르고 있지만, 결로현상이라는 것이 원래 바깥 기온과 내부 온도와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면 차 안을 따뜻하게 할수록 결로 현상이 더욱 심해지는 것은 아닐지 염려된다.(히터보다 결로 현상에 더 좋은 것은 환풍기라는 걸 이 과정을 겪으며 곧 알게 되었다. 환풍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차 안에서 요리를 해도 결로 현상이 생기지 않고 음식 냄새도 배지 않는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날씨인 것 같다. 그중에서도 비와 바람이 여행을 힘들게 하는 요소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많이 힘들어진다. 유럽은 겨울에 강수량이 높은 편인 것 같다. 요즘 이탈리아는 워낙 비가 많이 오고 금요일인 오늘부터 화요일까지는 계속 비가 내린다고 한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씨에 광민은 노천 온천탕에 가 볼 궁리를 하고 있다. 사실 온천이라면 너무 반갑고 비 오는 날 노천 온천도 꾀 낭만적이라 아주 기대하고 좋아했었다. 하지만 지금 바깥 기온이 내 마음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샤워가운도 없이 젖은 몸으로 차까지 오려면 보통일이 아니다. 우리에겐 모든 게 다 부족해 보인다. 그래도 지금 보다 더 남쪽이라고 하니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막상 목적지에 가까워져 저 멀리 숲 가운데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아름다운 온천의 자태를 보니 걱정은 날아가고 흥분을 감출 수 없다. 마침 비도 거의 오지 않는다. 게다가 온천 바로 앞에 있는 주차장까지! 그러나 주차장에 바가 올려져 있어 우리 같은 큰 캠핑카는 출입을 할 수 없다. 광민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이곳을 사용했다는 후기를 보았었다며 실망하는 얼굴이다. 바 아래를 통과할 수 있는 작은 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다. 온천을 코 앞에 두고 다시 오는 길에 보이던 캠핑카 주차장으로 되돌아 가야 했다. 그 길이 꾀나 멀게 느껴진다.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여행에서는 거의 쓰지 않던 주차비를 이탈리아에 와서는 많이 쓰고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 이탈리아에서 만난 캠핑장 중에 가장 시설이 좋고 시골이라 값도 저렴하다. 세탁기도 있으니 이제 옷 젖는 걱정도 필요 없이 온천장으로 갈 준비. 스위스에서 사용한 반바지와 티셔츠가 다시 등장한다. 광민이 배낭에 우리의 탈의실이 될 담요를 비롯해 준비물을 차곡차곡 챙기고 파라솔이 될 긴 우산도 챙겼다. 이런 날씨가 선크림도 필요 없고 온천하기에 더 좋다며 기분을 내어 본다. 가끔씩 오락가락하는 비에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는 사이 온천장에 도착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름 다운 온천의 모습이 드러나자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가 라오스의 블루라군을 갈 때 생각했던 바로 그 온천 풍경이다. 텔레비전으로 볼 때 라오스의 블루라군이 온천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차가운 물에 엄청 실망했었다. 그런데 뜻밖에 내 머릿속에 그리던 블루라군과 똑같은 모양의 온천이 있다. 혹시 전생에 내가 이 동네에 살아서 라오스의 블루라군을 보자마자 온천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며 진지한 상상을 해보았다. 의외로 오늘 같은 날씨에도 제법 사람들이 많다. 우리끼리 즐길 만한 곳은 연인들이 벌써 차지했지만 그래도 여럿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은 넉넉하다.


햇볕 하나 가릴 곳 없는 이 곳은 지금 같은 계절과 날씨에 안성맞춤이다. 난 먼저 반신욕을 한다고 몸을 반 만 담갔다. 광민은 내 말도 듣지 않고 바로 물속에 쏙 들어가 버린다. 다 젖고 나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망설이다 나도 풍덩 들어가 버린다. 폭포로 어깨며 등 마사지를 하는 사람들, 다정한 연인들, 제각기 행복한 모습이 보기 좋다. 이젠 다 젖어버린 옷도 더 이상 걱정되지 않는다. 그래도 추울까 봐 머리는 적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뒤 쪽에서 폭포수에 마사지를 하는 바람에 물이 튀어 내 머리도 점점 젖는다. 그런데 머리가 젖을수록 차라리 마음도 더 편해진다. 사실 머리를 적시며 마음껏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웠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샤워가운도 그리고 가까이 있을 그들의 자동차도. 하지만 그런 것들 없이도 편하게 즐기는 광민을 보며 나도 머리까지 물속에 푹 담가 버렸다. 순간 걱정 근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이왕 젖은 김에 더 오랫동안 놀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무렵 광민은 벌써 갈 준비를 한다. 난 더 즐기고 싶은데 아쉽다.(나는 늘 생각이 많아 결단이 느리다. 광민은 늘 빨리 결단해서 언제나 충분한 여유를 즐긴다.) 광민이 고안한 담요 탈의실은 샤워가운 걱정을 날려 버릴 정도로 괜찮았다. 러시아에서 산 나의 사랑하는 담요가 또 한 번 새로운 용도로 쓰였다.


(우리는 이후 그리스, 터키, 동유럽을 거쳐 다시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 6개월 만에 아주 가성비 좋고 따뜻한 샤워가운을 마련해서 영국에서의 긴 시간 습습하고 쌀쌀한 봄 날씨를 따뜻하고 아늑하게 보낼 수 있었다. 여행 일정을 마치고 따뜻한 속옷에 포근한 수면 가운을 입으면 차 안은 금세 호텔로 변했다.)


돌아오는 길엔 비도 오지 않는 데다 예상 밖으로 하나도 춥지 않았다. 11월도 막바지로 가고 있는 지금인데 말이다. 그 온천의 열기가 이 지역을 전부 따뜻하게 만드는 것 같다. 습한 날씨인데도 개운하고 상쾌하다. 그런데 지나가던 차가 우리 앞에 서더니 온천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난 전생이 아닌 지금 현실 속에서 사투르니카의 주민이라도 된 양 온천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준다. 돌아서서 차번호를 보니 이탈리아 차다. 저 이탈리아 사람보다도 아주 멀리서 온 우리가 한 발 먼저 온천에 다녀왔다는 자긍심에 어깨가 으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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