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무슨 병이라도 있으세요?


트럭을 빌려주신 고마운 이웃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트럭을 빌리러 갔을 때 두 분의 가족사진을 보았었다. 칠순 때 찍은 웨딩 사진도 있었다. 벌써 10년이 다 된 사진을 보시며 당시에 참 기분이 좋으셨다고 했다. 그 말씀을 하시는 순간에 두 분 얼굴이 참 환하셨다. 맛있게 익은 단감도 가지째 넉넉히 따 주셨다.


저녁을 먹으며 살아온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두 분은 육 남매를 키우셨다. 당시 대부분 그러했듯이 두 분은 가난했다. 특히 아내분은 병든 시어머님까지 모시느라 젊은 시절을 고생으로 채워가며 살아내셨다. 지금은 자식들이 모두 잘 살고, 남편과 노후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이 여기저기 아파서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고 한다. 띄엄띄엄 자신의 얘기를 하시던 아내분이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내게 묻는다.


"근데 혹시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요. 근데 왜요?"

"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런 곳에 내려와 사는 속 사정이 뭔지 궁금했어요."


나는 책꽂이 위 작은 액자 하나를 내렸다. 남편과 라오스 여행 때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포즈를 잡고 있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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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는 이렇게 못 놀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젊을 때 놀기로 결심했죠."

"그렇죠. 죽어서 아무것도 못 가져가는데..."


아내 분은 갑자기 말문이 터져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신다. 광주에 유학 간 아이에게 한 보따리 싸들고 가면서도 차비가 아까워 먼 길을 걸어갔던 일, 앉아 보지도 못한 채 반찬 만들어 놓고는 다음 날 새벽 가게 문을 열기 위해 깜깜한 밤 길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일.(울 엄마도 낮동안엔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밤새 우리 남매들을 위해 바느질을 하고 뜨개질을 하셨다. 그래서 난 지금도 바느질과 뜨개질이 하기 싫다.)


힘든 날들과 죽을 뻔했던 사고를 당하고도 무사히 살아난 일, 그래서 나머지 인생은 자신에게 덤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히 여긴다는 이야기. 그러다 다시 몸이 힘들어져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중국 여행을 하며 힘들었던 이야기. 예전엔 마을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놀러 가면 엄청 설렜는데 이젠 힘들어서 여행 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남편분은 오랜만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는 아내를 보며 신기하다고 하셨다.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깊은 속 얘기까지 털어놓으니 서로 잘 통하는 거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한테 혹시나 폐가 될까 봐 자꾸 아내분에게 눈치를 주신다.


남편 분은 먹고사는 일과 상관없는 정원 가꾸기나 게이트 볼로 나름 인생을 즐겁게 사는데 아내 분은 여전히 육 남매들에게 보낼 택배 물건들 챙기느라 늘 바쁘다고 한다. 모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는 모습이었다. 삶의 고비를 넘기던 벅찬 순간들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배부르다며 한사코 사양하시는 두 분을 조금 더 붙잡으려고 차와 과일을 내었다.

며느리가 선물한 차에 달콤한 매실을 더하니 달달하고 풍성한 맛이 되었다. 거기에 알맞게 익은 무화과를 반 가르니 접시가 제법 화려하다. 달달한 차와 과일을 먹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밭두렁에서 일하시는 아내 분을 만났다. 갑자기 이름이 궁금해졌다.

"언니, 이름이 뭐예요?"

"이영래."

"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에요."

"그렇지 영애는 많은데 영래는 흔치 않아."


영래 언니가 잘 익은 대추 한 알을 주신다. 바구니에 딱 하나 있던 대추알이라 더 고맙고 기쁘다.

신세를 지고 고마워서 저녁식사를 대접했는데, 긴 인생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절친한 친구가 된 기분이다.


죽을 때 물건은 가지고 가지 못하지만 추억은 잔뜩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다.



DS2d9mH0RkShFzEigw3TYw.jpg 누군가 거저 내준 팔레트로 우리 정원에 멋진 공간을 만들 궁리에 광민은 잔뜩 설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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