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의 무게 2

업그레이드버전

by 경주

2004년.

분당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며 학교가 파라다이스라는 것을 알았다. 적당한 쉼과 일이 있고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면 즐겁게 들어주는 학생이 있고 겨우 스물다섯의 나를 존중해 주시는 나이 많은 선생님들이 계셨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내 책상 위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 올라오는 편지와 바나나 우유. 무릎 꿇고 받아달라며 내밀던 빼빼로. 예쁜 노래가 가득 담긴 CD. 무엇보다 행복했던 것은 수업 시작 전 교무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학생들. 그 예쁜 입으로 국어 교과서가 무거울까 봐 들어주려고 기다렸다 말해주던 학생들. 축제 같은 매일이었다.


2003년 분당의 학원에서 연마한 스킬로 수업을 끝내면 " *나 잘 가르쳐."가 터져 나왔다.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며 평일 기준 매일 하루에 5시간 이상은 공부에 투자했다. 주말은 내내 공부했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지식이 넘쳐났다. 젊은이 특유의 센스로 가요와 신문기사, TV 프로그램, 예술 작품을 접목해 수업했다. 신이 났다.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온 셈이었기에 집에 오면 공부할 때 집중이 잘 됐다. 당시의 나는 간수치가 높아 퇴근길에 링거를 주 2회 정도 맞고 와야 했던 상황이었다. 양쪽 손등 손목 팔꿈치 안쪽이 바늘로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을 아이들이 물을 때면 부딪혔다며 웃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공부가 가능했던 것은 학교가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외우고 도서관 가는 시간과 체력이 아까워 집에서 공부했다. 파라다이스 문 앞에서 서성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2004년 기간제로 재직하며 나는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2005년.

정교사로서 처음으로 발령받은 곳은 분당의 학군과는 정반대의 특성을 지닌 지역이었다. 분당에서 1년간 업무도 수업 방식도 익혔기에 자만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작은 시골 학교에서 나는 초임 때보다 더 어설펐다. 처음보다 서툰 두 번째 학교였다. 2005년 당시는 NIE 수업 열풍이었다. 젊은 교사답게 수업에 열을 올렸는데 신문을 활용한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좌절했다.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의 가정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역 복지 기관에 문의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최선을 다할수록 아이들과 멀어졌다. 태어나서 그런 욕은 처음 듣고 보았다. 2005년, 2006년, 2007년 3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교직에 대한 열의를 잃었다. 지역적 특성 그리고 아이들의 욕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혼자만의 아집에 빠져 괴로워했다. 결국 3년 내내 나의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그렇게 그곳을 떠나왔다. 떠나던 날 몸이 많이 아팠다.


다시 돌아간다면 잘할 수 있을까. 좀 더 나를 낮추고 지역의 특성을 읽어보려 노력할 수 있을까. 언젠가 꼭 한번 그 지역에 다시 가고 싶다. 좀 더 성숙한 내가 아이들과 융합되는 모습을 나 자신에게 보이고 싶다.




2008년.

첫 발령지를 떠나 다시 분당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2008년 다시 발령받은 나의 파라다이스 학교. 하지만 이미 열정을 잃은 나였기에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 줄 것이 없었다. 돌아보면 가장 미안한 감정이 드는 그 시절의 아이들. 2008년 다시 돌아온 파라다이스에서 나는 아이들을 그냥 그렇게 보내버렸다. 짜릿한 수업을 단 하루도 하지 못했다. 나는 괴로웠다. 2005년부터 2008년은 나의 교사 인생 암흑기였다.




2009년.

지난해를 돌이키며 드디어 만 4년 만에 나는 다시 가르치는 즐거움을 찾았다. 아이들과 만나는 매 순간이 즐거웠다. 구 남자친구 현 남편이 취업에 성공한 해이기도 했다. 그 해 엄마는 아팠다. 엄마의 부어오른 배를 보며 엄마는 얼마 전 문병 가서 보았던 친구의 아들을 떠올렸다. 공부 잘하고 책임감 넘치고 잘생기기까지 했다는 그는 의대 훈련 과정을 마치기 몇 달 전 복수가 찼고 엄마가 문병 다녀온 직후 세상과 이별했다. 엄마의 친구들도 친척들도 엄마의 모습을 보며 마지막 인사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언니와 오빠에게는 이제 겨우 돌이 지난 아이들이 있었다. 엄마보다 열 살 많은 아빠는 연로하셨다. 무엇보다 엄마가 아픈 것은 아빠 탓이라며 엄마는 아빠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빠를 보면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 탓에 아빠는 병원에 쉬이 오지 못하고 울었다. 엄마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엄마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나는 당시 2학기 휴직을 신청했다. 급작스러운 휴직으로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보고 싶다며 벽에 내 이름을 새겨 넣었다. 우리반이 그렇게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할 만큼 낙서가 가득해졌다고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집에 와서 간병을 위한 요리를 해주겠다는 학생의 어머니, 한 번도 선생님에게 마음을 준 적 없던 아이가 올해는 선생님이 좋다기에 안심했는데 일찍 떠나가서 너무 섭섭하다는 어머니, 나의 건강까지 염려하는 어머니들 전화와 문자로 마음이 먹먹했다.


구 남자친구 현 남편에게는 헤어지자고 말했다. 집 앞에 찾아오고 병원으로 찾아오는 남편이 부담스러웠다. 무언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에 "저리 가서 놀아. 제발 헤어져줘."라고 말했다. 선물을 사들고 기뻐하는 나의 표정을 기대한 그에게 " 이 선물을 들고 내 인생에서 사라져 줘."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모질었다. 그 시절 나는 엄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정 떨어지게 구는 내게 구 남자친구 현 남편은 "성격은 정말 안 좋지만 얼굴이 예쁘니 너의 모든 것을 참아줄게."라는 웃음 섞인 말로 나를 붙잡았다. 생각한다. 그토록 애정공세를 퍼붓는 남편이 아니었다면 겁쟁이 나는 결코 결혼이라는 제도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의 복수가 치료된 후 엄마는 퇴원했다. 그러나 잘 걷지도 못할 만큼 체력이 좋지 않았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각 자연주의 밥상을 차리고 매일 같은 시각 피톤치드가 가득한 산에 데려가고 매일 같은 시각 집 안에서 엄마 옷을 벗겨 풍욕을 시켰다. 지나치게 FM 스러운 나의 음식과 일정에 엄마는 짜증을 냈다. 한 번도 내게 그런 모습을 보인적 없던 엄마였다. 달라진 엄마. 늘 엄마생각뿐이었던 나는 화가 많아진 엄마에게 많이 상처받았다. 시간을 돌이킨다면 그럴 수 있다면 안 그래도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더 많이 웃어주고 평소 자주 하던 농담을 더 자주 했을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매일 엄숙한 얼굴이었다. 한 번도 웃음기 가득한 표정을 보여주거나 즐거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내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뿐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나와의 실랑이 속에서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어 갔다.



내가 올해 아파보니 나는 환자가 원하지 않는 간병인이었다. 차라리 나의 딸처럼 내게 안겨 "엄마가 아파서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아. 나는 엄마를 안을 수 있다면 다 좋아."라고 애교를 부리거나 "엄마, 밥 먹지 말고 기다려. 내가 돈가스 에어프라이어로 해줄게."라고 말하는 아들이나 "오늘은 어떻게 지냈어?"라며 매일 음식을 싸들고 오는 남편처럼 담백한 챙김을 해주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2023년.

최대한 즐겁게.

부담스럽지 않게.

내 마음이 하고 싶은 만큼.


무엇이든 과유불급.

14년 전의 간병 시절보다 나는 업그레이드되었다.


아버지 곁에는 어머니가 계시다. 그러니 나에게 간병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병원 길의 동행 정도일 뿐.


아버지를 보며 최대한 많이 웃어드리고 우리집에서 주무시는 날에는 드시고 싶다는 식재료를 여쭙고 가능한 한 소화가 잘 되도록 요리한다.


최대한 즐겁게 아버지를 대하자고

남편을 다독인다.



아무래도 나는

업그레이드 버전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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