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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Jan 03. 2020

당신의 상처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영화, 신의 은총으로(2019) 감상평

 특별한 기교 없이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영화다. 사실의 힘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승전결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한 번은 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 받은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상처가 '자신의 탓이 아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보아야 한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영화, '신의 은총으로(Grace a Dieu , By the Grace of God , 2019)다.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프랑스 가톨릭(천주교) 신부의 아동 성추행 사건(프레나 사건)을 다룬다. 별다른 배경음악도 없이 영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주인공 알렉상드르 게렝은 성공한 재무전문가로, 5명의 자녀를 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그런데 자신이 다니는 리옹 성당에서 어릴 적 자신을 추행했던 신부가 부임한 것을 보고 경악한다. 이미 70대가 된 프레나 신부.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포함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아이들이 또 겪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하나로 알렉상드르는 가톨릭 교회에 항의를 계속한다. 

알렉상드르(오른쪽)는 어린 시절 가톨릭 신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영화는 옴니버스처럼 주인공을 바꾼다. 마치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처럼, 등장인물들은 바통 터치하듯 가톨릭 교회에 대한 투쟁을 이어간다. 이 싸움을 처음 시작한 알렉상드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천주교 내부에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리옹 교구 추기경인 바르바랭은 “상처를 긁지 않는다면 신의 가호로 아물게 된다.(avec la Grâce, se ferme si nous ne la grattons pas trop.) 왜 자꾸 과거 일을 들추는가?”라고 답했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고소해 봐야 소용없다는 답변과 함께.


 알렉상드르는 피하고 싶었던 최후의 수단을 쓴다. 경찰에 프레나 신부와 바르바랭 추기경을 고소한 것이다. 그 뒤부터 영화는 두 번째 고소인을 주인공으로, 뒤이어 성추행 사실을 공개한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하며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성추행 피해자들은 2015년 12월 “해방된 말言(La Parole libérée)”이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홈페이지를 열어서 증언 수집에 나선다.

'해방된 말' 모임. 네 명의 남자들은 바통 터치하듯 영화의 주인공을 맡는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세월호 침몰 사고'를 떠올렸다. 힘없는 아이들이 희생되었고, 그 원인은 한두 명의 어른에게 있지 않았다. 사건의 원인을 파고들수록 수많은 어른들의 침묵, 견제받지 않는 조직의 오만함, 조직 내 고위직의 사건 은폐 등 다양한 사회 부조리가 뒤얽혀 있음을 알았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가. 민주주의의 발상지이자 프랑스혁명의 나라, 일류 선진국이 아닌가. 그런 나라도 구태의연한 모순과 그 부조리를 지지하거나 외면하는 보통 사람들이 있는 나라였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한국과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보고 나면 세월호 유족들을 욕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소외되어 관심이 고팠던 것이다. 그것이 '피해자 유족에 대한 연민'일지라도)


 불편한 영화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는 것은 연민과 분노를 일으킬지언정 불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관객이 굳이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극장에 올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한 줌의 위안일 것이다. 위안은 영화의 후반부, 단체를 결성한 피해자들이 서로에게서 위로를 얻는 모습에서 받을 수 있다. 


리옹 교구의 추기경 바르바랭 신부(가운데)

 야생의 동물들은 자신의 상처를 숨긴다. 무리 동물 중 한 마리가 상처 입으면, 상처 입은 동물은 자신의 상처를 숨긴다. 부상당한 것을 알면 곧 무리에서 버려지기 때문이다. 버려진 동물은 아무런 연민도, 분노도 없이 떠나는 무리를 바라본다.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약육강식의 세계. 약하면 버려지고 버려지면 먹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영화를 보면 인간 사회에서도 '약육강식'이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싶다. 그 정도로 영화는 냉정하다. 감독은 피해자에게 어떤 감정도 개입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하지만 피해자들은 분노하고, 그 분노로 연대하고, 연대하여 장하게(혹은 징하게) 싸우고 있다. 고소로 이어진 재판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많은 아동 성추행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가족에게도 숨기려 하고, 자책하며 산다. 인격이, 인생이 파괴된다. 마치 동물처럼, 자신의 상처를 숨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문명사회를 이룩한 인간이라면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투쟁해야 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사회정의를 위한 싸움은 이 영화처럼 너절하고 고통스럽다. 그래도 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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