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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Dec 29. 2019

고전 추리소설의 훌륭한 비틀기

영화 '나이브스 아웃(2019)' 감상평

*스포일러 없음.


  연말 영화시장을 백두산(2019)이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포드 대 페라리(Ford V Ferrari,2019)와 이 영화는 꼭 볼 것을 권한다. 별로 남지 않은 상영관을 뒤져가면서라도 볼 만하다.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꼭 보아야 하고, CSI 같은 범죄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쟁쟁한 출연 배우들의 연기만 보아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 고전 추리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라이언 존슨 감독의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 2019)이다.


  추리소설은 탐정이 등장해 미스터리에 싸인 범인을 추적하는 소설의 한 장르를 말한다. 1841년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을 시작으로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고, 애거서 크리스티, 가스통 르루, S.S. 반 다인, 에도가와 란포 등 수많은 스타 작가를 배출한 장르다. 필자는 셜록 홈즈를 특히 좋아했는데, 고전 추리소설만이 주는 향취와 즐거움이 있다. 살벌한 범죄 현장을 누비면에서도, 빅토리아 여왕 시대, 대영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보여주는 부유함과 여유가 곳곳에 깔려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먹고 살 걱정 없는 귀족들의 즐거운 오지랖 두뇌 게임을 체험'하는 느낌이랄까?


 나이브스 아웃은 고전 추리소설을 훌륭히 재현했다. 게다가 현대에 맞게 변주까지 했는데, 그 변형이 시의적절하면서도 재치 있다. 외딴곳에 위치한 대저택, 한 남자의 죽음, 자살인지 살인인지 불분명한 현장, 알리바이와 살인 동기를 동시에 가진 8명의 용의자, 사립탐정까지. 잘 짜인 보드게임판과도 같은 배치다. 특히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브누아 블랑' 탐정은 이 영화의 장르와 분위기를 결정한다. 탐정이 없다면 다른 범죄물과 다를 게 없다.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며 용의자들과 대화를 이끌어내고, 좋건 나쁘건 추리를 시도하는 탐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이 그를 따라 이런저런 추리를 계속하고, 그 끝에 복선과 반전을 체험해야만 추리소설/추리 영화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탐정 브누아 블랑은 이 영화의 장르와 정체성을 결정한다.


 적절한 변주는 아나 디 아르마스가 연기한 간병인 '마르타'가 있기에 가능했다.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녀는,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주가를 높이고 있다(내년에 개봉할 007 노타임 투 다이에서 크레이그와 함께 나온다). 영화에서 마르타는 이민자 출신으로 순진한 듯 강인한 여성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연기했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85세의 베스트셀러 추리소설 작가가 자신의 생일파티 날 사망했다. 막대한 유산과 저택을 남기고 칼로 목을 그은 것이다. 익명의 누군가가 유명 탐정 브누아 블랑에게 이 사건을 의뢰하고, 작가의 간병인, 가정부 및 (손) 자녀로 이루어진 용의자 9명은 모두 자신의 범행을 부인한다.


돈 많은 베스트셀러 추리소설 작가의 85세 생일날.


 영화의 초반, 작가의 자녀들은 경찰 앞에서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며 은근슬쩍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들의 말과 실제에는 차이가 있는데, 영화는 처음부터 등장인물들이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말하고 있음을 대놓고 보여준다. 그 거짓이 보통 사람들이 하는 현실 부정 내지 자기 합리화 수준이어서 현실감 있다. 그들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면, 다들 자신이 '자기 아버지처럼 자수성가' 했음을 내보인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게 다 거짓임이 드러나는데, 그들은 아메리칸드림을 외치는 미국인의 상징처럼 보인다.


 언뜻 기존 추리 영화와 다를 것 같지 않았는데, 이 여자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작가의 간병인이었던, 남미 출신(파라과이인지 우루과이인지 다들 그녀의 고향을 정확히 모른다)의 이민자 마르타다. 놀랍게도 그녀는 '거짓을 말하면 구토를 하는 병(!)'을 앓고 있다. 그런 병이 실제로도 있을 리 없지만, 추리 영화의 세계에서는 특별히 괴이한 병이다. 거짓으로 연명하는 추리 영화 등장인물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바로 티가 나는 설정이라니! 그녀가 등장하면서부터 필자는 허리를 세우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거짓을 말하면 구토하는 간병인, 마르타(좌)는 아나 디 아르마스가 맡았다.


 추리 영화의 핵심은 결말이므로, 스포일러를 할 수 없으니 결말의 탁월함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007 시리즈의 다니엘 크레이그, 슈퍼맨 시리즈의 마이클 섀넌, 마블 시리즈의 크리스 에반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아나 디 아르마스까지. 중견배우부터 신인 배우까지 출중한 배우들이 총출동하여 자신의 분량을 꽉꽉 채운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그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평면적으로 전락하는 단점이 있으나,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선택과 집중은 필수이니 이 정도 흠은 봐주자. 영화 내내 각본을 쓴 게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감독 라이언 존슨의 오리지널 각본이라고 한다. 놀랍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혹평을 받은 스타워즈 : 라스트 제다이의 감독이었단 사실!)


 각본과 연출 모두 훌륭해서 흠잡을 곳이 없다. 2019년 최고의 영화라고 하기엔 어렵지만, 포드 대 페라리와 함께 올해 영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영화의 시작은 고전 추리소설이지만, 결말은 고전 추리소설을 비트는데, 그것 역시 시의적절해서 감탄했다. 그 결말은 트럼프 정권의 비판으로 보아도, 미국식 국수주의를 비꼬는 것으로 보아도,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보아도 제법 적절하다. 다니엘 크레이그, 크리스 에반스, 아니 디 아르마스의 연기 모두 좋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영화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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