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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Jan 23. 2020

누구나 결말을 아는 이야기가 재밌으려면

영화, 남산의 부장들(2018) 감상평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10.26 사건'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한번 영화로 만들어 지기까지 했다(그때 그 사람들, 2005). 그런데도 10.26 사건을 또 한 번 영화로 만들었다. 내부자들(2015), 마약왕(2017)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의 영화, 남산의 부장들(The Man Standing Next , 2018)이다.


 영화를 만들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다.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에, 한번 영화화된 적이 있어 잘못 만들면 비교당하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감독은 동명의 논픽션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왜일까.


 10.26 사건에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스터리 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가 2인자의 손에 죽었는데, 2인자는 곧이어 4인자(?)에게 사형당했다. (4인자는 대통령이 되어 지금까지도 잘 산다) 결국 10.26. 사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죽은 사람도, 죽인 사람도 속 시원히 이유를 말해주지 않고 죽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인데도, 최고 권력층의 내밀한 생각을 알 수가 없다. 그 미스터리가 기자, 소설가, 영화감독을 유혹한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이 영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로 만들 만했다. 똑같이 10.26 사건을 다루었지만, '그때 그 사람들'과는 결이 다르다. 박용각 전 중앙 정보부장이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감독이 새로이 엮은 사실관계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영화는 첩보물처럼 긴박하다가, 조직 내 우두머리를 향한 조직원(혹은 회사원)들의 눈물겨운 사투처럼 보이다가, 최고 권력자가 아등바등 자기 권력을 지켜내는 한편 두려움에 떠는 사극처럼 흘러가다, 마침내는 누아르로 끝맺는다. 내면 묘사를 바탕으로 한 누아르의 중심에는 물론 이병헌이 있다. 그런 점에서는 이정재를 중심으로 했던 누아르 영화, 신세계(2013)와도 닮았고, 이병헌의 전작 달콤한 인생(2005)과도 닮았다.


영화는 박용각 전 중앙 정보부장이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시작한다.


 곽도원과 이희준의 연기는 당연히 좋다. 곽도원은 이 영화에서 첩보물을 맡았고, 이희준은 권력 암투 물을 맡았다. 어떤 영화에서든 자기 역할을 톡톡히 했던 배우들이니 믿고 보아도 좋다. 오히려 놀랐던 것은 박 대통령을 연기한 이성민이다. 이 정도로 박 대통령을 연상시킬 줄은 몰랐다. 아주 약간의 분장만 했는데도 박정희와 매우 유사하고, 그 말투와 행동이 최고 권력자의 그것이다. 이성민이 나올 때면 이 영화가 단순한 누아르 영화가 아니라 ‘말년을 직감하는 왕의 모습’을 비추는 사극 영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성민은 영화의 긴장감을 조절하며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박 대통령을 연기한 이성민은 박정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최고 권력자를 연기했다는 점에서도 뛰어났다.


 10.26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그것이지만, 영화에서는 의외의 인물도 등장한다. 그런 면에서는 감독에게 점수를 주고 싶다. 내가 다 아는 내용이 나오겠지, 싶은데 의외의 포인트가 있어 숨죽이고 보게 된다. 감독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주는 허점을 잘 이용하여 관객에게 스릴을 준다.


  이병헌은 사실상 이 영화의 1인 주연이자, 중심인물이다. 윗부분이 두꺼운 뿔테는 그의 눈빛을 이따금 가린다. 그는 눈빛을 가리고 입과 턱의 움직임으로 인내와 분노, 혹은 인내하는 분노를 표현한다. 영화 내내 비난받고 인내하는 그의 모습은 남한산성(2017)의 '최명길' 역과도 닮았다. 남한산성의 최명길이 올곧은 신념을 가지고 절치부심하는 역할이었다면, 이 영화에서 그는 갈팡질팡하며 이따금씩 넘치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는 2인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살인 동기에 관하여, 어떻게든 관객과 감독 양쪽을 설득시키면서 영화를 이끌어 가야 했을, 이병헌의 연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병헌은 관객과 감독 모두를 설득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았고, 제법 잘 해냈다.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기에, 영화는 필연적으로 과정을 담아야 했다. 결말을 누구나 알기에, 과정 자체가 재미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감독은 성공했다. (전작 ‘내부자들’ 처럼) 최고 권력층도 결국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 (‘마약왕’ 처럼) 왕이든 신하든 인간은 욕망에 휘둘리는 동물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관객이 몰입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결말이 다소 약하지만, 극장에 갈 가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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