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고모와 어머니 이야기
어렸을 때부터 먹었던 곶감이 있었는데, 시중에서는 팔지 않았다. 큰고모가 시골집(전북 진안)에서 만들던 곶감이었는데, 매년 겨울이 오면 큰고모는 곶감을 오십 접(100개를 한 접이라 한다) 넘게 만드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걸 직장 동료들에게 파느라 바빴고, 우리 집 베란다에는 택배로 곶감이 쌓였다. 초등학교 때에는 그 시큼하고 꼬리 한 냄새가 별로여서 근처도 가기 싫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그 맛을 알기 시작했다. 큰 고모가 만든 곶감은 밖에서 파는 것과 좀 달랐다. 새까맣고 겉에는 흰 가루가 묻어 있고, 아몬드 형으로 생겼으며 쭈글쭈글 못생겼었다. 근데 막상 먹으면 쫄깃하고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그 맛에 빠지셔서 '사돈댁 곶감은 언제 나오냐' 항상 성화셨다.
외할아버지도, 외할머니도 이 세상에 안 계신다. 큰 고모는 60대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큰 고모의 죽음에 두고두고 슬퍼하셨다. 남동생인 아버지만큼이나 슬퍼하셨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시누이인데, 시골집에 갈 때마다 큰 고모 집은 꼭 들렀다. 들러서는 큰 고모와 한참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큰 고모는 6명이나 되는 시누이와 시숙 중에서 어머니가 유일하게 의지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인덕이 있었다. 하지만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착한 사람들은 왜 먼저 데려가는지. 명절 때, 시골집에 갈 때마다 큰 고모집에 들르던 어머니는 이제 큰 고모 묘소로 간다. 그리고는 큰 고모네 집으로 가서 큰 고모의 자식들을 만난다. 자식들의 얼굴에는 큰고모가 있다. 어머니는 그 얼굴을 쳐다보고 어루만지며 함께 눈물짓다 돌아왔다.
세상을 떠난 사람을 그 사람의 자식과 남편과 그 사람의 남동생과 올케가 모여 눈물짓는 광경이, 어린 나에게는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그것 만한 제사가 없고 그것 만한 추모가 없어 보였다. 지켜보는 나에게도 그리움이 스며들었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옛날이라, 잊고 있었다. 곶감을 다시 보기 전에는 말이다. 그게 흑곶감이라고, 아내가 말해주었다. 시중에서 파는 곶감은 다 주황색이고 동그랗고 납작했다. 먹어보면 맛이 없었다. 큰 고모가 만들어 주었던 검고 쭈글쭈글한 곶감은 팔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이젠 곶감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그걸 '흑곶감'이라 부른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큰고모의 곶감과 비슷하다. 큰고모 곶감은 인터넷에 나온 그것보다 더 검고 쭈글쭈글했다. 더 맛있었다.
인터넷으로도 나오지 않는 흑곶감을 생각한다. 큰고모 자식들의 손을 잡고 눈물짓던 부모님을 생각한다. 자식들 얼굴에 있던 큰고모를 생각한다. 생각밖에 할 길이 없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