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단상

2016년 3박 4일, 2020년 4박 5일의 추억.

by 김우중

홍콩은 이번이 두 번째다. 3년 전에 여자 친구와 3박 4일로 왔었고, 여자 친구가 아내가 된 뒤 4박 5일을 다녀왔다. 처음에 여자 친구(현 아내)가 홍콩에 가자고 했을 때, 탐탁지 않았다. 좁고 번잡한 빌딩뿐인 그곳에 뭐가 볼 게 있겠어? 싶었다. 흔히 홍콩은 '쇼핑의 천국'이라는데, 쇼핑에 취미가 없는 나는 더욱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래도 간 것은 여자 친구의 권유와, 홍콩 영화에서 본 몇 가지 이미지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와 '중경삼림'을 즐겨 보았는데, '중경삼림'에 나온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보고 싶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콩의 풍경. 빌딩으로 이루어진 숲이다.

막상 가보니 홍콩은 정말 좋았다. 서울처럼 고층빌딩이 많은 좁은 면적의 시내와, 근교 부도심과 교외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면적이 작아서 관광하기 간편했다. 그러면서 볼거리, 맛집, 유적과 문화시설 등 있을 건 다 있었다. 건물과 가게는 오래된 곳은 “빈티지” 한 맛이 있고, 새로 생긴 곳은 “세련”되어 매력이 넘쳤다. 그런 점이 서울과 비슷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유럽과 아시아 다양한 국가를 가 보았지만 홍콩 만의 특유한 모습이 있다. 홍콩의 직장인들은 여의도 직장인만큼이나 옷을 잘 입고, 명품을 여기저기 걸치고 있었다. 높은 빌딩이 만드는 스카이라인도 멋지고, 산비탈에 위치한 공원(빅토리아 파크)에서 본 야경이 특히 멋졌다.


산비탈 동네를 가로지르는 정말 긴 야외 에스컬레이터.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여행에서 즐거웠던 것과 추억으로 오래도록 남는 것은 이상하게 다르다. 홍콩에 다녀와서 몇 달 동안, 마음속에 남는 것은 다닥다닥한 고층 아파트와 종이 상자를 깔고 길바닥에 앉아있는 필리핀 여성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홍콩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고, 집안일을 임금이 싼 필리핀 가정부에게 맡긴다고 한다. 주말에는 맞벌이 부부들이 모두 집에 있으니, 필리핀 가정부들은 따로 갈 곳이 없어 길바닥에 종이상자를 깔고 앉아 옹기종기 모인다. 그녀들은 모여서 수다 떨고 도시락을 까먹고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어쩐지 그 모습이, 개발도상국의 고생하는 여성의 모습이, 한국의 60년대 파독 간호사 같기도 하고 8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의 미싱공 여성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즐거워 보였다.


빅토리아 파크에서 본 홍콩의 풍경. 밤에 보면 더 이쁘다.


3년이 지났다. 아내가 임신했다. 임신한 여성은 5시간을 넘는 비행은 무리라고 했다. 추려보니 동남아와 일본, 대만, 홍콩이 남았다. 동남아는 지카 바이러스, 일본은 방사능 때문에 탈락했다. 대만은 우리 부부 둘 다 매력이 느껴지질 않았다. 계속되는 시위에도 불구하고, 홍콩에 가기로 했다. 시위는 피할 수 있지만 바이러스와 방사능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시위 때문인지 홍콩은 한적했다. 비행기 값도, 호텔비도 예년의 60% 수준으로 저렴했다. 홍콩은 좁다. 볼 게 많지 않은 데다가 두 번째다.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가지는 않았다. 그저 홍콩의 매력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동서양이 섞인 첫 번째 도시, 80~90년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도시, 그러나 이제는 몰락하고 있는 도시, 비싼 땅값으로 높고 좁은 공동주택과 복작복작한 사람들이 있는 도시, 박스 깔고 즐겁게 수다 떠는 필리핀 여성들이 있는 도시에 또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정세를 볼 때, 이런 홍콩의 모습이 언제 없어질지 불안해서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뜻 모를 한자로 가득 채어진 네온사인은 홍콩의 상징적인 이미지다. 이 사진에는 하나뿐이지만.

다시 가 보니 홍콩은 여러가지 면에서 여전했다. 지난 3년 동안 한국과 서울은 많이 변화하고 발전했지만, 홍콩은 그대로라 이젠 서울이 더 번화한 도시 같다. 홍콩 특유의 매력은 남아 있지만,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면 서울이 더 좋을 듯 싶다.


다녀온 뒤 차분히 돌이켜 보니 기억에 남는 것은 익청 빌딩의 빽빽한 아파트 창문들, 뜻 모를 한자로 가득 채워진 네온사인, 아시아 최고의 트레킹 코스인 '드래곤스 백(Dragons Back)'이다. 홍콩을 번화한 도시로만 아는데, 의외로 산과 해변 등 자연경관도 유명하다. 그중 트레킹 코스가 유명한데, 아이들도 다닐 정도로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으면서, 주변 다도해를 감상할 수 있다.


영화 트랜스포머, 방송 짠내 투어 등에 나와 유명해진 익청빌딩. 무질서한 아파트 창문들이 오히려 현대 미술처럼 보인다.

드래곤스 백에서의 트레킹은 말 그대로 인종의 용광로였다. 파키스탄 사람, 필리핀 사람, 미국 사람, 우리 같은 한국 사람 등이 섞여 각자의 말로 떠들기 바빴다. 관광객인 우리를 제외하면 모두들 외국인 노동자들로 보였는데, 그들은 오랜만에 나온 나들이인지 무척이나 들떠 있었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한적한 자연을 기대하고 간 나는 실망했다. 사람이 없는 길로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다른 사람보다 빨리 하산하려고 외딴 길로 접어들었는데, 수풀이 우거지고 길도 좁아 이게 길인지 물 흐르는 계곡인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도 소용없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올라 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도 이게 맞는 길인지 몰라 나에게 이 길이 맞냐고 물었다.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마주친 덕분에 서로 길을 찾았다.


어딜 가나 사람이 있다. 결국 두 번에 걸친 홍콩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이었다.

드래곤스 백에서는 이런 풍경을 실컷 볼 수 있다. 빌딩 숲에 질리면 진짜 숲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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