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30. 화엄사에서 연기암까지
돌들의 그림자는 녹색이었다. 이곳에서 걸으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등산로의 바닥돌들이 제각각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넘어지지 않고 걸으려면 땅만 보고 발을 디뎌야 한다. 나무나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이따금씩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것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순리順理인 것처럼 느껴졌다. 등산하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내가 발 뻗을 자리를 찾기에 바빴다. 그러다 고개를 들면 어느새 대나무 숲, 또 들면 양 옆에 소나무들, 어느새 작은 암자, 이런 식이었다. 하산하는 길에도 마찬가지였다. 돌들이 차례로 내 발밑을 지나가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발을 뻗고 있었다. 오른편에선 계곡물이 함께 걸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을 올랐고 그때 배운 것은 겸손이었다. 등산할 때는 패기와 희망, 꿈이 가득해야 하지만 하산하는 길에는 무조건 겸손해야 한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하산하는 길에 다친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 멋모르고 신나서 산을 올랐다. 힘을 아낄 줄도 모르고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는 다리 힘이 다 빠져버렸다. 하산길에는 늘 넘어져 다치거나, 다리가 후들거려 아버지 등에 업혀 내려오기 일쑤였다.
걷다 보니 오랜 추억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지리산 산길의 바닥돌은 저마다 이끼가 꼈다. 이끼는 돌들의 굴곡진 틈을 따라 껴서,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다. 연녹색의 그림자는 다른 세상 같았다. 그렇게 돌들이 발아래 흘러갔다. 아래로, 아래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