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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May 28. 2020

아무도 하지 않은 말


  작년 10월에 이직을 했다. 연봉이 오른 대신, 일이 많고 업무상 책임이 커졌다.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괜히 이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쌓였다. 일도 쌓였다. 쌓인 스트레스는 결국 몸살감기로 터졌다.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감기가 찾아왔다. 몸은 쉬라 하는데, 쌓인 일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코로나19가 막 유행하기 시작한 무렵이어서, 코로나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내는 임신한 채였다. 주말 내내 열로 끙끙 앓았다. 내가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 일을 생각하며, 아내에게 옮기면 안되는데 생각하며 앓았다.


  다 낫지 못한 채 월요일에 출근하니 상사가 따로 불렀다. 내 업무수행 능력 또는 업무수행 태도, 둘 중 하나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꺼내면서 나에게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다. 후퇴 또는 포기는 생각해본 적이 없으므로, 해야 할 답변은 명확했다. 반사적으로 말했다. ‘이 업계에 몸담으면서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긴 적은 없다. 태도를 바꾸겠다’고 답했다. 상사는 자리를 떴다. 이제 점심시간이었다.


  혼자 밥을 먹으러 나왔다. 음식을 앞에 두고 숟가락을 집었다.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났다. 천양희의 “밥’이다. “외로워서 /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 권태로워서 /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 슬퍼서 / 많이 운다던 너에게 / 나는 쓴다. /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그중 한 문장이 명령처럼 떠올랐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밥을 씹으며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미루어 두었던 감정이 스며나왔다. 모두 먹었다.


  어플이 하나 있다. “280 days”. 출산예정일 등 태아의 정보를 입력하면 매주 변화하는 태아의 발달 상황을 알려주는 어플이다. 아내가 설치하라기에 나도 깔았다. 어플을 켜면 태아 그림이 있고, 터치를 한번 할 때마다 아기는 랜덤으로 대사를 말한다. 자주 열어보는 편은 아닌데, 그날 따라 밥을 먹으면서 그 어플을 켰다. 아기의 대사가 그때그때 달라 눌러본다. 이번엔 처음 보는 대사였다.


  “아빠를 선택하고 여기에 온 거예요.”라고 했다. 읽는데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구나.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실제 태아가 한 말이 아닌데도, 마음이 움직였다. 태어나지도 않은 너가 나를 위로하는구나, 싶었다. 이 날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두고 눈물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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