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9. 한글날 육아일기
많은 사람들이 자주 쓰지만 막상 그 뜻이 무어냐고 하면 머뭇거리게 되는 단어들이 있다. '사랑'도 그중 하나다. 대부분의 단어가 그렇지만, '사랑' 역시 직접 몸으로 부딪혀 가면서 그 뜻을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뿐이지만, 20대에 연애를 하면서 느꼈던 '사랑'과 결혼하고 느낀 '사랑'이 다르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느끼는 '사랑'은 그것과 또 달랐다.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일은 고되고 지친다. 생활의 기초적 욕구인 '수면욕'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사랑스럽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보람되고 사랑할 만한 존재, 그것이 자식인가 싶다.
문득 춘향전의 '사랑가'를 떠올린다. 고등학생 때인가, 사랑가를 배우면서 조금 이상하다 싶었다. 연인끼리 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 같았다. (사랑가는 여러 판본이 있지만, 가장 대중적인 판본에서는) '이리오너라 업고 노자'로 시작하면서, '니가 무엇을 먹으랴느냐' 하면서 여러 가지 음식을 늘어놓는다. 수박에 꿀을 부어 '먹으랴느냐' 묻자 춘향이는 '아니 그것도 나는 싫소'한다. 그러자 몽룡은 '그러면 무엇을 먹으랴느냐' 물으며 '앵두를 주랴 포도를 주랴 귤병사탕의 혜화당을 주랴' 한다. 그다음 몽룡은 이리가라 저리 가라 하면서 뒤태와 앞태를 보고,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입속을 보자'라고 한다. 마치 부모가 아기한테 하듯이 말이다. 어쩌면 '사랑'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이 부모가 자식을 돌보며 느끼는 '사랑' 이어서, 이런 가사를 넣은 걸까.
20대에 느낀 '사랑' 역시 다양한 고통이 수반되었지만, 그때마다 고통은 피해가야 할 것이었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세간의 말이 있고,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유튜브에는 '똥차 거르는 법'이 항상 인기다. 20대 연애를 하면서 주로 배운 것은, 그리고 배워야 할 것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에게 사랑을 주어야 하고, 나 자신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사랑'은 언제나 즐겁고 기꺼워야 하는 것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느낀 '사랑'은 연애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고, '서로에 대한 책임'도 부여된다. 법적으로 구속받는 관계라는 점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결혼은 연애보다 덜 통통 튀지만, 더 진득한 듯싶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 느끼는 '사랑'은 앞서와는 궤를 달리한다. 무조건적인 희생이 따라야 하고, 희생에 따른 고통에 지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고통과 사랑이 함께 갈 수도 있다는 것, 대가가 뒤따르지 않을지라도 사랑하는 것 자체로 보람되다 느끼는 것. 그게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사랑이 아닐까 한다. 춘향전의 사랑가처럼, 무엇을 먹여야 좋아할지 고심하고 먹이는 것 자체로 이미 사랑이 충족된다. 자식이 건강하고, 건강하게 걷고 건강한 웃음을 보여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사랑가에는 중간중간 '아매도 내 사랑아'가 나온다. 요즘 말로 번역하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 사랑아'라고 한다. 아마 사랑가의 화자도 많은 고통을 받았는가 싶다. 하지만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