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31. 일기.
이번 여름 휴가지는 여수였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서 여수까지 자동차로 다녀오는 일은 쉽지 않다. 다행히 아내의 친정이 대전이었기에, 우리는 대전에서 하루 자고 그다음 날 여수로 갔다. 여수에서의 1박 2일은 여수를 즐기기에 너무 짧았지만, 아이가 어려 긴 여행은 부담이었다. 다행히 장인 장모님과 함께여서 그나마 수월하게 아이와 여행을 즐겼다.
여수에서 돌아오는 길, 이번에도 대전에서 하루 자고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장인 장모님은 당신들 차로 먼저 대전에 가셨다. 우리는 아이의 체력을 고려해서 좀 느지막이 출발했다. 아이를 적당히 놀게 하고 차에 태우면, 1시간은 잘 잤다. 잘 자고 나면 카시트를 답답해해서 문제였는데, 그즈음 우리는 전라북도 완주를 지나고 있었다.
아이는 짜증이 심하게 나는지, 경기를 일으키듯 울었다. 뒷자리에 같이 탄 아내가 달래주어도 소용없었다. 이럴 땐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분유를 먹이거나 하는데, 차 안에서는 기저귀를 갈기 어려웠다. 분유라도 먹여야 하는데 분유와 젖병만 있을 뿐, 뜨거운 물을 미처 담아오지 못했다. 휴게소에 들러야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와중인데 아이 울음소리는 점점 커진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다음 휴게소는 41km 뒤였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내비게이션에 '500m 앞 고속도로 나들목'이 보이자 핸들을 꺾었다. 어디로 나가는 길이든 일단 나가서, 차를 세우고 아이를 달랠 필요가 있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로 진입하자마자, 길가에 세울 곳을 찾았다. 바로 오른쪽에 빠지는 샛길이 있어 둘러볼 것도 없이 우회전했다. 우리는 추락하듯 샛길로 빠져 내려갔다. 작은 시골마을. 샛길로 들어서서 30m가 지나지 않아 차들이 서있는 공터가 보였다. 바로 차를 세웠다. 흡사 우주선이 어딘지 모를 소행성에 불시착한 꼴이었다.
차를 세우자마자 아이를 안아 들고 달래주었다. 밖은 한낮, 뜨거운 공기가 코에 들어왔다.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니 '신흥마을 경로당 무더위 쉼터'라고 쓰인 건물 앞이었다. 옛날 말로 노인정. 여기서 뜨거운 물을 받아 분유를 먹이면 되겠다 싶었다. 염치 불고하고 일단 들어갔다.
무더위 쉼터라는 말에 걸맞게 내부는 시원했다. 7~8명 정도의 할머니들이 두 편으로 모여 화투를 치고 계셨다. TV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니 낯선 30대 부부의 등장에도 호의적인 눈길을 주셨다. 뜨거운 물은 정수기가 고장 나서 저쪽 가스레인지에서 끓여야 한다고. 덕분에 물이 끓을 때까지 우리 부부는 경로당 한편을 차지하고 앉았다.
아이는 이제 진정되어서, 우리 부부에게 번갈아 안겨서 할머니와 부엌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우리 가족을 보고 할머니들은 자기네 아들에 이야기, 어느 집 며느리의 임신과 출산 이야기 들을 나누었다. 귀가 안 좋으신지 목소리들이 크셔서, 굳이 듣지 않으려 해도 여기까지 이야기가 들렸다.
물을 끓이고 식힌 뒤, 분유에 타서 먹였다. 아이는 잘 먹었다. 기저귀도 갈아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했다. 잠시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이제 돌이 지났고, 우리는 서울에서 왔다고. 여수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배고픈지 너무 울어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니 여기였다고. 오래 있을 수는 없어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경로당을 나와 다시 차에 탔다. 아이는 하도 울어서인지 차에서 잘 잤다. 대전에 무사히 도착했다.
다음날 서울에 돌아와 차에 실은 짐을 빼려고 보니 아뿔싸, 유모차가 없었다. 그날 신흥마을 경로당 앞에 유모차를 두고 온 것이다. 아이를 달래려고 유모차를 꺼내 잠깐 태웠는데, 하도 정신이 없어 잊어버리고 그대로 두고 떠난 것이다. 아, 어쩌지.
마침 당시의 '불시착'을 기억하려 경로당 건물을 찍어둔 게 있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경로당 전화번호를 찾았고, 전화하니 부녀회장님이 받으셨다. "유모차 두고 가신 분이죠?"
착불로 보내달라고 부탁드려 부녀회장님은 흔쾌히 그렇게 해주셨다. 하지만 이 더운 날, 노인들만 있는 마을 분들이 유모차를 접어서 포장하고, 택배로 보내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약소한 선물이나마 경로당으로 보내드리겠다 문자 보내니, 부녀회장님은 "무슨 선물을 다 보내십니까. 더불어 사는 세상에 우리 경로당에 제일 어린 아기 손님이 와서 반가웠는데요. 부담 갖지 마시고 아기 까까 사주세요."라고 답장하셨다.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 여기 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