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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Aug 27. 2016

본 시리즈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에 대하여.

 첩보영화를 좋아한다. 어릴 때 TV에서 접한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는 '고급스럽고 품위 있는 스파이'의 표상이었다. 항상 턱시도를 차려입고 바에 가서 본드 걸을 만나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젓지 않고 흔든 마티니'를 마시며, 최첨단 무기와 자동차로 적들을 펑펑 터뜨리는 것이 그의 매력이었다.


 하지만 본 아이덴티티(2002),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을 보면서 007은 잊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본 시리즈의 등장으로 007 시리즈는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 007 카지노 로얄(2006)로 죽다 살아났지만, 본 시리즈의 특징을 모두 흡수한 뒤에야 가능한 부활이었다.
 한마디로, 본 시리즈는 첩보영화의 판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본 시리즈의 특징이 무엇이길래?

따발총을 갈기더라도 고급시계와 양복은 필수인 007 시리즈.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는 귀족적이다. 일상적 공간과는 분리된 밀실에서 (그 밀실의 소유주인) 악당과 싸운다. 악당은 돈이 매우 많고, 영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평화를 위협한다.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이름부터 제임스 본드를 의식했다)은 언제나 일상적인 공간(아파트, 주택가 골목, 교외의 저택, 도시 한복판)에서 싸운다. 그의 적은 CIA,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정보기관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안티 히어로에 가깝다.

시리즈의 백미였던 본 얼티메이텀(2007)

 제이슨 본은 언제나 무채색 티셔츠에, 심플한 검은색 코트를 걸친다. 적들을 때릴 때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살인자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들을 죽이는 역설이 괴로운 탓이다. 영화 3편 동안 웃은 때가 손에 꼽을 정도다. 적들을 모두 물리친 뒤에 그는 (미녀와 키스하며 휴양지로 떠나는 대신) 비척비척 거리며 뒷골목 구석으로 사라지거나, 출퇴근하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익명성에 기대어 살아남는다.

 그의 적은 정보기관답게 도청과 감청을 서슴지 않으며, 전 세계의 경찰과 위성들을 이용해 그를 찾아다닌다. 이쯤 되면 CIA가 '도시 문명 전체'로 보일 정도다. 

 도시 문명에 대항하여, 제이슨 본은 무얼 위해 싸우는가? 답은 영화 제목에 나와있다. '아이덴티티' 그는 자신 개인만을 위해, 그것도 가장 내밀한 자기 정체성을 위해 싸운다. 자신이 가장 자신답기 위해 살인자였던 과거를 극복하고, 자신을 살인자로 만든 CIA와 싸운다.

본 시리즈를 보았다면, 이 장면을 잊을 리 없다.

 본 시리즈를 상징하는 장면은 바로 본 얼티메이텀(2007)의 워털루 광장 씬이다. 이 장면에서 본은 사람들 틈에서 나타나 목적을 이루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진다. CIA는 정교한 통신망을 이용해 수없이 헛다리를 짚는다. 저 후드 쓴 남자 확인해봐, 가방 들고 지나가는 저 남자는? 수많은 위성 영상과 정보들은 오히려 독이 된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으므로.  


 007 시리즈에서 본 시리즈로, 첩보영화의 대세가 변화한 과정은 정치 사회적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007 시리즈는 냉전 시대의 산물이다. 선악구도가 너무 뚜렷하여 선동과 날조가 판치던 시대다. 서방세계 vs. 소비에트 연합 등등. 이 시리즈에서 악당은 언제나 미국의 적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21세기가 왔다. 이제 사람들은 국가에 기대어 자신의 적을 물리치길 원하기보다, 국가 권력을 더 두려워한다. 개인의 정체성과 행복이 중요한 시대가 왔다.

 제이슨 본은 언제나 개인으로서 싸운다. 누군가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를 대신하여 싸웠다면, 본 얼티메이텀에서 워털루 광장에 모인 시민들 전부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싸움으로써 일반 시민들을 대변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은 타인의 정체성도 존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익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판례를 만들고, 그 판례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도 구원하는 경우와 같다.

오늘도 그는 상처입었다.

ps. 사실은 영화 '제이슨 본(2016)'의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영화 자체는 그냥 그랬다. 대신 과거를 추억하며 본 시리즈에 대하여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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