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중 Mar 30. 2022

여자에게서 여자에게로 이어져온 것

2022. 3. 30. 단상

 배우 윤여정의 인터뷰 영상을 보다가, 문득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녀는 1910년대에 태어나, 일제강점과 남북 분단과 6.25를 겪었다. 황해도에 살던 그녀 부부는 먹고살기 힘들어 월남을 택했는데, 그녀의 친정이 있는 경기도 포천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뱃속에는 아이가, 3살 된 장남은 북한에 두고 온 채로. 국경선에서는 북한 군인을 피해 강바닥을 헤엄쳤고, 총알이 강물로 떨어졌다고. 힘들게 남쪽으로 와서는 (그녀의 남편이 다시 북에 올라가서 장남을 데려오고) 농사와 술 만드는 일 등등 천신만고 끝에 5남매를 키워냈고 그중 유일한 딸이 나의 엄마였다.

 

  그러나 보니 외할머니의 선천적, 후천적 특성은 고스란히 나의 엄마에게 이어졌는데, 나는 엄마의 외아들로서 외할머니 이야기를 참 많이 듣고 자랐다. 나의 부모님은 각자의 집안에서 막내이다 보니, 양가 조부모가 모두 어릴 때 돌아가셔서 추억이 많지 않음에도, 외할머니는 가장 오래 살아계신 조부모였고 그나마 가장 오래 봐온 분이었다.


 다시 윤여정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녀는 증조할머니를 지금도 매일 생각하는데, 증조할머니와 어머니가 자기 자매를 정말 힘들게 키웠으며, 자신도 이혼해서 두 자식을 힘겹게 키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윤여정은 어머니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계보를 이야기하고 있구나' 싶었다.


 한국에서 성씨는 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지다 보니, 우리는 어머니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계보를 무시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개개인의 삶을 돌아보면, 개인의 이야기를 깊게 파고들어 가면 언제나, 그리고 당연하게도 "어머니"가 있다. 어느 시대이건 한국에서 아버지는 바깥일을, 어머니는 가족을 보살피는 일을 하다 보니 자녀는 “어머니"와 보낸 시간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가 성장기에 누리는 가정교육은 "어머니"가 주는 것이 아버지보다 많을 것이다. 우리는 부계 성씨를 쓰며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모계로 이어지는 선천적 후천적 계보를 무시하지만, 그것은 우리 곁에 남아있다.


  당장 나만 해도 내가 가진 가치관 중 많은 부분이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고, 어머니는 외할머니로부터 가르침 받은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늘 부지런하였고 남들에게 베풀고 음식을 해다 먹이는 것을 참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어머니는 그것이 꼭 닮았다. 내성적이고 형제가 없는 나는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자꾸 어머니의 친구가 와서 집을 소란스럽게 하고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데, 자라고 보니, 정확히는 나이를 먹고 보니 나도 모르게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든다. 그럴 때마다 이것이 모계의 계보구나, 싶다.


  이제 20개월  나의 아들을  때에도 느낀다. 아들은 웃는 얼굴이 나랑  닮았는데, 나는 엄마를,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았다. 어린 아들의 웃는 얼굴을  때마다, 나는 어쩔  없이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아들의 빽한 머리카락과 웃을  흐려지는 눈꼬리를  때면, 외할머니가 불쑥 나타난다. 그다지 외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나인데도 외할머니가 떠오를 정도이니,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모계의 계보구나 싶다.


  다만 모계의 계보는 족보가 없어 대대손손 전해지지 못할 뿐인데, 그렇다면 외할머니의 웃는 얼굴은 누구에게서 왔는지, 그것을 알 수 없어 아쉽다. 여자에게서 여자에게로 이어져온 것, 그것은 책에 쓰여 있지도 않고 3대를 지나가면 정확한 근원을 알 수도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나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이 여자로부터 왔고, 그 위로 올라가면 또 여자가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역사로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이어져갈 것이고 누구도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