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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Jan 20. 2017

나의 산책일기

서초동 변호사가 사는 방법

  하루에 30분씩 산책을 한다. 일을 하다가 아이디어가 없어 막힐 때, 한 일을 끝내고 다음 일을 하려는데 체력이 소진되어 머리가 돌아가지 않을 때,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산책을 한다. 그러다 보니 매일 산책을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그저 걷는다. 까치가 있으면 까치를 보고,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본다. 계단이 있으면 올라가고 길이 있으면 걷는다. 그렇게 10분이 지나면 굳었던 머리가 조금씩 풀린다. 잊고 있던 것들이 생각난다.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사려고 했다가 까먹었던 면도크림일 수도 있고, 보내려고 했던 이메일일 수도 있다. 이미 제출한 문서에 그 문장을 넣었어야 했는데, 일 수도 있다. 여하튼 산책이 끝나면 어김없이 기분이 상쾌하고 머리가 시원해져 있다. 그러니 더워도 걷고, 추워도 걷는다.


 첫 직장을 7월에 얻었는데, 그때부터 산책을 했다. 산책 코스 선정 기준은 간단하다. 사람과 자동차가 없는 조용한 곳을 걸을 것. 그러다 보니 결국 서초동 법원 뒤편 야트막한 산을 걷게 되었다(네이버 지도를 보니 서리풀 공원이란다).


 그러던 어느 날, 법원 뒷산을 걷다가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그도 나를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어디였더라, 변호사 모임이었나, 세미나였나, 아니면 학교 선배인가. 6개월을 산책하면서 나와 비슷한 나이 때의 양복 입은 남자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보통 중년의 등산객이 이 길을 걸었다. 결국 서로를 일별 한 채 지나쳤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며칠 뒤에 알았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변호사였다. 사무실이 복도 반대편이어서, 화장실 오다가다 몇 번 얼굴을 보았던 것이었다. 그도 이제야 내가 어디서 본 사람인지 안 눈치였다. 굳이 아는 남자 한 명 더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인사 없이 지나쳤다.


 어젯밤에 많은 눈이 쌓였는데, 습관처럼 산책길을 나서서 잊고 있었다. 구둣발로 눈 내린 뒷산에 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이다.


 그렇게 법원 뒷산 초입을 걷다가 다시 또 그 남자를 마주쳤다. 그는 뒷산에서 내려오는 길인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고, 양 어깨가 축 쳐진 것이 힘들어 보였다. 그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자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나도 멋쩍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의 짧은 미소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너도 이 길을 산책하는 거 보니 시간이 남는 변호사구나, 반갑다.'와 '오늘은 눈이 많이 와서 구둣발로 걷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닐 거야'가 모두 담겨 있었다. 낯선 남자와 짧은 순간에 표정만으로 교감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눈 덮인 산을 구두로 오르는 것은 매우 힘들어서, 로프를 몇 번이나 잡아야 했다. 산책 내내 그 남자와의 짧은 교감이 이상한 뒷맛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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