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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Oct 06. 2017

패배한 명분싸움에서 남은 삶이란

영화, 남한산성(The Fortress, 2017)

  병자호란은 철저히 패배한 역사다. 조선 임금이 청나라 황제 앞에서   절하고 아홉  머리를 조아렸다. 패전 이후 수십만 명의 조선인이 끌려갔다. 신산辛酸한 싸움 끝에 승리한 임진왜란과는 다르다. 병자호란에는 이순신, 권율, 곽재우 같은 전쟁 영웅도 없다. 그래서인지 병자호란을 다룬 대중매체가 드물다.


   처절하게 패배한 싸움을 김훈이 소설로 썼다. '남한산성'이다. 그리고  소설을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가 있다. 비교적 원작을 충실히 재현했으며, 김훈 특유의 문어체를 사극 톤으로 무난히 옮겼다.


   영화를,  소설을 이해하려면 병자호란을 다시 한번 보아야 한다. 청나라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곧장 수도 서울로 진격했다. 10  같은 싸움에서 조선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  살았지만(정묘호란), 10  청나라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병자호란). 청나라 군사들은 조선 왕이 강화도로 가는 길을 빠르게 차단하였고, 결국 조선 왕과 대신들은 추운 겨울 산성山城에 고립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이다.


  청나라는 얼마든지 성을 무너뜨리고 조선 왕을 죽일  있었으나, 그것이 조선을 복속시키는 방법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보라, 일본도 같은 방법으로 서울로 곧장 진격했으나, 왕은 도망쳤다. 왕이 살아있는 이상 조선 민초들은 들불처럼 일어나고, 일본군은 전국 각지의 의병에 괴로워하다 패퇴했다. 그러니 청나라는 어떻게든 왕을 사로잡아 항복시켜야만 했다.


  영화에서 인조는 조선 국왕으로서 위엄과 자존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청나라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청나라는 애초부터 성을 함락시킬 생각이 없었다. 남한산성은 인조를 지켜주는 철옹성이 아니라 인조를 가두는 덫이었음을, 왕과 대신들은 알지 못한다.


  병자호란은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간 시점부터 이미  싸움이었고, 청나라는 인조의 신체가 아니라 인조의 정신을 함락시킬 심산이었다. 그러므로  영화는 칼과 창이 맞붙는 싸움 내지 공성전攻城戰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명분싸움과 말싸움에 대한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제대로 포착한 소설가 김훈의 원작을, 감독 황동혁도 제대로 포착했다. 때문에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튀는 싸움은   되지 않는다. 영화는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병사들의 고통과, 한겨울에 초가지붕마저 빼앗기는 민초들의 서러움과, 김상헌과 최명길의 말싸움에 집중한다.


  국사를 배웠다면 예송논쟁이니 뭐니 하는 명분싸움, 말싸움의 지루함과 덧없음을   것이다. 하지만 실존이 걸린 전쟁터에서, 남한산성이라는 고립된 장소에서, 생과 사를 두고 벌이는 말싸움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지점을 제대로 표현해 내느냐에  영화의 생사가 달려 있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영화는 소설이 성취한 지점까지는 가지 못했다. 명분싸움을 표현하기에는 영화보다 소설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가 이를 메워주었다.


  캐스팅도 좋았다. 인조를 연기한 박해일은 데뷔 때부터 순수한 눈빛으로 주목받았는데,  영화에서 토끼 같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신들에게 해결책을 끊임없이 묻고, 질타한다. 박해일은 나름의 지능은 있지만 이미 갇힌  안에서 어쩔  몰라 두리번거리는 인조를 제대로 연기했다.


  끝까지 싸워 죽음으로서 왕조의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은, 김윤석이 연기했다. 김상헌은 전형적인 선비 캐릭터라고   있지만,  안에 처절함과 슬픔이 있는 사람이다. 김윤석은  풍채와 그윽한 눈빛으로 굽히지 않는 기개와,  기개의 부산물 같은 슬픔을  표현했다.


  항복하고 생을 지킴으로서 백성을 구하자는 최명길은, 이병헌이 연기했다. 최명길은 고립된 산성 안에서 항복을 주장하는, 매우 외로우나 독보적인 자이다.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고 있음은 김상헌과 다르지 않으면서, 김상헌과 달리 동료 대신들로부터 끝없이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비난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병헌은 절제하는 언행으로 튀지 않으면서도 부족함 없이, 최명길이라는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쟁쟁한 배우들에 뒤지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 이가   있는데, 나루터 사공의 손녀 ‘나루역을 맡은 아역배우 조아인이다. 여러 의미에서 나이를 가늠할  없는  작은 배우는,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을 맡았고,  영화에서 가장 기쁜 장면을 맡았으며, 보통 사람들의 삶과 미래를 대표한다.


  병자호란에서, 조선 왕은 철저히 패배했다. 명분 싸움의 패배는 인조가 신하의 옷을 입고 청나라 황제 앞에서 절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이 명분 싸움과는 별개로,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한강 나루의 얼음은 녹는다.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 그 처절했던 싸움이 대체 무얼 위한 것이었는가 싶게, 봄은 오고 아이들은 뛰어놀며 대장장이는 쇠를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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