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중 Dec 28. 2017

계란이 모여 바위를 깨다

영화, 1987 감상평

  이 영화는 차라리 옴니버스 영화에 가깝다. 15명이 넘는 캐릭터가 나와 장면을 나눠갖는다. 그러면서도 산만하지 않고, 짧고 굵게 캐릭터 설명을 마치고 이야기를 숨 가쁘게 이어간다. 재미와 감동, 주제의식과 사회적 메시지가 적절히 섞인 수작秀作이다.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1987:When the Day Comes , 2017)' 말이다.

  감독은 영리하게도, 짧고 굵게 캐릭터 설명을 마치기 위해 그 캐릭터와 같은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쓴다. 과거 출연작들로 형성된 이미지는 그 배우의 정체성과도 같은데, 배우의 이미지가 캐릭터와 일치하니 관객들은 이질감 없이 금세 캐릭터를 이해하고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었다. 


  능글맞지만 성깔 있는 검사는 '비스티보이즈'와 '아가씨'의 하정우가, 북한 말씨에 저돌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경찰에는 '황해'와 '타짜'의 김윤석이, 내성적이면서도 강단 있는 역할에는 '삼시세끼'와 '택시운전사'의 유해진이, 연약한 외양과 달리 내면이 강한 여대생은 '아가씨'의 김태리가 연기했다. 


  위에서 소개한 배우 말고도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저렇게 적은 분량에 출연할 '급(?)'이 아닌데도 카메오처럼 나오는 배우가 수두룩하다. 설경구부터 문성근, 박희순, 김의성, 오달수, 고창수, 조우진 등등... 아마 웬만한 충무로 영화 5편은 찍을 만한 배우들이 한편에 모두 나왔다. 그것도 분량에 관계없이. 짐작컨대 노개런티 또는 적은 출연료만을 받고 출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많은 이들의 열망이 담겼다.


  영화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서 촉발된 6월 항쟁을 담았다. 아직 뜨거운 소재다. 불과 30년 전 일인 만큼, 가해자, 피해자의 유족, 전두환과 장세동 등 등장인물 상당수가 살아있고,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 성향 및 이념논쟁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이 영화를 만든 제작자, 감독, 배우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 사회의 뿌리는 무엇인가. 3.1 운동과 임시정부를 거쳐 4.19 혁명과 5.18 민주화 항쟁을 지나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가 일종의 '건국신화'처럼 보인다. 사회 구성원들을 하나로 뭉쳐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공동체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건국신화라면, 이 영화는 그러한 역할을 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감정은 절정을 이루고(영화 제목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피와 땀으로 이룬 민주주의'가 어떤 의미인지 관객은 여실히 깨닫는다. 마치 '레미제라블'처럼,

  6월 항쟁 당시 시민들의 구호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낫다'였다. 감독은 이 구호를 영화로 체화했다. 실제도 그렇지만 영화에서도 한두 명의 영웅이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그저 상식적인 사람 몇 명, 직업윤리에 충실한 직업인 몇 명, 죽어간 이들을 잊지 못하는 감성적인 사람 몇 명,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 몇 명이 이 영화를 이루고,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이 영화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고, 수백 수천만의 영웅들을 위한 영화다. 그들은 옴니버스 영화처럼 잠깐씩 나와 자기가 맡은 장면에서 자기 양심에 맞는, 어렵고도 소중한 결정을 하고 곧바로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그 결정들이 이어달리기처럼, 파도처럼 이어져서 철벽 같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달걀이 모여 바위를 깬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달걀 하나하나의 하찮음과 끈질김과 처절함이 나를 눈물짓게 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혐오에 맞서는 존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