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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Nov 18. 2017

꼴등 반의 추억

보습학원 시절 이야기

  자랑할 일은 못되지만 학창 시절 나는 사교육의 힘을 많이 빌렸다. 그중에서도 J 학원을 잊을 수 없는데, 중 1부터 고 2 까지 무려 5년 동안 한 학원을 다녔다(중등부 고등부 합쳐서). 중고등학교 대부분을 차지한 곳이어서 추억이 참 많다.

  J학원은 그 지역 유명 학원답게, 들어가려면 배치고사를 보아야 했고, 그 성적에 따라 들어가는 반이 나뉘었다. 돌이켜 보면 성적순으로 반을 나눈다는 게 인격함양에 그리 좋지 않은 방식이지만, 성적 올리는 게 목적인 사교육 기관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다행히도(?) 공부를 가장 못하는, 이른바 '꼴반'에 들어갔다. 배치고사를 어지간히 못 보았나 보다. 학원도 양심은 있었던지 성적별 분반 이름은 알파벳 무작위였다. 1 등반이 T반, 2등이 i반... 꼴등반이 R반이었다. 내가 그 R반이었다.

  1학기 중반에 들어간 R반에서 아이들은 이미 서로 친해져 있었고, 막 들어온 나에게 '너 꼴반이네? 여기 꼴반이야~'라며 웃었다. 꼴반?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수업을 들으면서 알았다. J학원 7개 반 중에서 꼴등이라는 뜻이었다. 각자의 학교에서는 상위권에 속했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꼴찌였다.

 왜일까. 선생님이 뭘 물어보는데 대답을 못하면 아이들은 쾌활하게 웃으며 '꼴반이잖아요~!' 외쳤다. 물론 R반임을 부끄러워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민망해하며 '너희 꼴반 아니야~'라고 애써 부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들은 귀신같이 서열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쉽게 물든다. 어느덧 나도 'R반'이라는 자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근거 없는 당당함과 밝음이 좋았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학생에서 모르면 모른다고 밝고 당당하게 외치는 학생으로 거듭났다. 학원 가는 게 재미있었다. 

  물론 계속 R반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 외치는 “꼴반”에는 자조가 섞여있었다. 성적을 올리려고 가는 곳에서, 성적별로 반을 나누고 수준별 수업을 하는 보습학원에서 꼴반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만족스러운 일이었다. 더 높은 반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R반에 머무르다가, 점점 성적이 오르면서 반도 바뀌었다. 중3이 되자 가장 높은 T반이 되어 있었다. 처음 같이 R반이었던 아이들 대부분은 학원을 그만두었다. R반에서 T반까지 올라온 사람은 나 하나였다. 

  T반 아이들도 착했다. 하지만 R반 같은 동질감이나, 끈끈함은 없었다. 그 뒤로도 1등 반을 유지했지만, R반 같은 즐거움은 없었다. 고3을 앞두고 '공부는 결국 혼자 하는 거다'라는 생각에 정든 J학원을 그만두었다.

  내가 처음 R반에 들어갔을 때가 무려 16년 전이다. 그런데 왜일까. 아이들의 '우리 꼴반이잖아요~'하며 웃던 목소리와 표정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정작 1등 반이었을 때의 추억은 희미한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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