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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Mar 01. 2019

선택하고 선택받은 가족

영화,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2018) 감상평

"피가 안 이어져서 더 좋은 점도 있잖아."

"뭐, 괜한 기대를 안 하게 되는 건 좋지."


    누군가가 소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다들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가족과 건강하게 지내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셋 중 하나 거나, 셋 전부 이리라. 가족, 건강, 돈, 사랑은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니까. 이 네 가지가 무엇인지, 어찌해야 가질 수 있는지 진지하게 묻는 영화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 Shoplifters , 2018)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이다. 군대에서 우연히 DVD로 본 '걸어도 걸어도(2008)'가 시작이었다. 일본 영화답게 잔잔하기 그지없지만 다 보고 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따뜻한 울림이 있는, 그런 영화였다. 전역한 이후 '아무도 모른다(2004)',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를 모두 챙겨봤다. 모두 가족에 관한 영화이고, 6편 중 무려 4편에 배우 기키 기린이 나온다.

    이번 영화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4남매 이야기(아무도 모른다)"와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뀌면서 내가 키우던 아들이 내 친아들이 아님을 알게 된 후의 이야기(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묘하게 섞어 놓은 인상이다. 전작들보다 좀 더 어둡고 무거우며, 진지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등장인물은 총 6명. 할머니(키키 키린 분), 아빠(릴리 프랭키 분), 엄마(안도 사쿠라 분), 아들, 딸, 처제까지 대가족이다. 그런데 이 가족의 특이한 점은, 6명 모두가 서로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독거노인이었다. 남편이 죽으면서 상속해 준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었고, 사이에 자식은 없다. 남편이 바람 펴서 낳은 자식들은 있지만 서로 피가 섞이지 않아 1년에 한 번 얼굴을 보는 게 전부다. 아빠와 엄마는 불륜으로 시작하여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동거 부부인데, 독거 할머니를 부양하는 동시에 그녀의 연금을 생활비에 보태어 쓴다(어떤 계기로 셋이 함께 살게 되었는지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엄마는 공장형 세탁소에서 일하고, 아빠는 일용직 노동자다. 우연히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하고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게 지금의 아들이다. 딸도 남남. 어떤 젊은 커플이 원치 않게 낳은 아이인데, 남자는 여자를 때리고 여자는 자기 딸을 때렸다. 그렇게 학대받던 딸을 이 부부가 키운다. 마지막으로 처제는? 좀 복잡하다. 아까 독거 할머니가 배다른 자식이 있다고 했는데, 그 배다른 자식의 딸이다. 즉,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손녀지.

    이 여섯이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이다 보니,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많은 글자가 쓰였다. 이게 이 영화의 핵심이다. 피로 이어지지 않다 보니 서로 같이 얽혀 사는 데에 많은 시간과 사연이 필요한 사람들. 이 집안의 중심인 엄마(안도 사쿠라)는 이를 두고 위 대사처럼 말한다. 피가 안 이어져서 더 좋은 거라고. 서로 가족으로 선택한 사이이니까, 더 잘 지낼 수 있다고 말이다.


이들이 사는 집만 보아도 경제적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가족의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더 있다. 이들은 돈이 없다. 영화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인데, 여기서 만비키万引き는 좀도둑 정도로 번역 된다(그래서 영어 제목도 Shoplifters다). 아빠(릴리 프랭키)는 일용직과 더불어 좀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고, 아들에게도 좀도둑을 시킨다. 아빠의 명분은 '어린아이라도 자기 몫을 해야 얹혀사는 게 미안하지 않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어찌 보면 그럴싸하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자식이다 보니, 공짜 밥을 먹고 공짜 옷을 입는 게 눈치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기 몫을 해서 돈을 벌면 서로를 당당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 법적, 도덕적으로는 분명 잘못된 가치관이지만, 적어도 아빠는 이 원칙을 잘 지킨다. 그래서 아들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딸에게도 살갑다.


    피가 통하지 않는 6명의 가족이 따뜻하게 서로를 위하며 지내는 이야기, 뿐이라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어둠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빠는 도둑질을 일삼고, 아들은 그런 아빠에게서 배운 좀도둑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처제는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고, 엄마는 과거 결혼을 해 놓고도 술집에서 일하다가 만난 손님(지금의 아빠)과 바람이 나서 남편을 죽이고 도망쳤다(이 일로 아빠는 감옥 생활을 했었는데, 일용직만 하는 이유가 그것인 듯하다). 영화 중반, 이들 가족은 할머니가 노환으로 죽은 뒤에도 그녀의 연금을 받기 위해 집 앞마당에 할머니를 묻고 죽은 사실을 숨긴다.


    스토리 전개는 여기까지만 알리는 게 좋겠다. 물론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른 이들 가족의 끝이 좋을 리는 없다. 인물마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따뜻한 사랑과 비겁함이 번갈아 보인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밉지가 않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기 때문일까. 그것도 그렇지만, 영화가 이들의 선과 악 모두를 따뜻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비춰주기 때문이다. 좀도둑을 일삼고 또 아들에게 가르치는 아빠는, 범죄자라기보다 무정부주의자 또는 원시인처럼 보인다. 악독한 마음을 가지고 가게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질서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물건을 훔치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와 사회보장제도가 그를 지켜주지 않으므로, 그도 국가가 만든 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영화의 후반, 수사관이 엄마에게 말한다. "(할머니 시체를 묻은 것에 대해) 시체유기는 중범죄예요." 엄마는 대답한다. "버린 거 아니에요. 주운 거예요. 누군가가 버린 걸 주운 거예요." 엄마는 '버렸다'는 말에 발끈한다. 그녀의 대답은 두 가지 이야기를 함께 섞어서 모호하지만, 영화의 주제를 말해준다. 버려진 이들이 서로를 주워서(선택해서) 모인 가족들의 이야기는 때로 눈물겨웠다. 

    그리고 엄마는 카메라를 보고 묻는다. "낳으면 다 엄마가 됩니까?" 이 장면은 마치 살인의 추억(2003)의 마지막 장면처럼, 영화가 관객에게 묻는 장면처럼 보인다. 수사관은 화면 밖에서 대꾸한다. "하지만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 이제 수사관은 국가 또는 사회체제처럼 보인다.


기키 기린(1942~2018)을 추모하며

    할 이야기가 더 많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배우 기키 기린(1942~2018)을 떠올리며 마무리하려 한다. 일본의 국민엄마 배우였고, 김수미 배우처럼 30대부터 40대 어머니를 연기했다. 2003년 한쪽 눈이 실명되었고, 2004년 유방암에 걸린 가운데서도 12편 이상의 영화에서 주옥같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본명은 우치다 케이코. 기키 기린(樹木希林)은 "나무와 나무, 숲을 꿈꾸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이름은 우리 스스로 짓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해 새로 지었다. 스스로 가족을 선택한 영화 속 가족처럼 말이다. 늦었지만, 그녀의 명복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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