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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Sep 08. 2019

태풍이 지나가고

19년 9월 어느 주말의 기억

 태풍이 오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오후에 영종도에서 개최하는 어느 행사에 가야 했다. 그런데 바람이 초속 25m/s가 넘도록 강하게 불면 영종대교와 인천대교는 교통이 통제된다. 두 다리가 막히면 영종도에 갈 수가 없다. 태풍 '링링'의 반경 300km에서 풍속은 가뿐히 25m/s를 넘겼다. 행사는 당연히 취소되었다. 빈지노가 온다기에 기대했던 나는 잔뜩 실망했다. 역시 인간의 일 따위는 천재지변에게 이길 수가 없다.


 영종도와 달리 서울은 강풍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주말을 이렇게 보낼 수 없어 일단 떠나기로 했다. 아내는 성북동의 한 서점에 가보자고 했다. 최근 SNS에서 인기가 많은 서점이라고. 큰 기대 없이 차를 몰았다. 태풍이 온다는 뉴스 때문인지 시내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다행히 바람은 심하지 않았다. 태풍은 군산 서쪽 바다에 있다고 했다. 링링이 가까이 오기 전에 서점에 도착할 요량으로 차를 몰았다.

성북동 서점, '부쿠'.

 성북동에 위치한 카페 겸 서점 '부쿠'는 과연 유명할 만했다. 한편으로는 아늑한 서재 같기도 하고, 널찍하고 여유 있는 카페 같기도 했다. 카페라고 하기엔 좌석이 많지 않았고, 서점이라고 하기엔 책이 많지 않았다. '부쿠'에 들어서는 순간, 그 여백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서점에는 많은 책이 필요한가. 책이 적어도 서점은 서점이 될 수 있었다. 여기 서점에는 각 책이 한 권씩 밖에 없어 개인 서재 같은데, 그래도 서점이다(아마 재고가 서랍에 있으리라). 카페처럼 빵과 음료를 팔고 좌석이 마련되어 있지만, 북카페는 아니다. 책을 사야만 자리로 가져와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 적고 한 권씩 뿐이니, 한 권 한 권을 정성스럽게 살펴보게 된다. 수백수천 권의 책이 모여있다면 그 수에 질려서 제목만 훑어보았을 텐데, 여긴 그렇지 않다. 게다가 책 한 권 한 권이 세심하게 고른 듯 안목과 깊이가 있다. 한 명과 10년 연애한 것과 열 사람과 1년씩 연애한 것이 결국은 큰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은 책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한 책을 일주일 동안 천천히 곱씹는 것과, 책 7권을 일주일 만에 독파하는 것은, 어쩌면 같을지 모른다. 이런 '가치관' 혹은 '태도'가 이 서점에서는 설득력을 얻는다.


 군대에 있을 때, 여유시간이 생기자 마음먹고 책을 읽어보자 했다. 200권을 목표로 완독(完讀)한 책을 엑셀에 기입해가며 읽었다. 당시엔 책을 많이 읽을수록 더 영리해지고 현명해질 것만 같았다. 잘 읽히지 않는 책도 억지로 읽고 넘겼다. 부러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는데, 그중 독서에 관한 책도 있었다. 거기에 이 구절이 있었다. '매일 한 권씩 평생 읽어도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통계적으로 보면 당연한 말이었음에도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기를 쓰고 책들을 섭렵해도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구나. 욕심이 사라졌다. 그때부턴 읽고 싶은 책만, 내 리듬으로 읽기 시작했다. 결국 읽은 책의 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쿠'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앉아 집에서 가져온 책을 읽었다. 집에서는 읽히지 않던 책이 잘만 읽혔다. 요즘처럼 영상매체가 발달한 때, 재미있는 것이 넘치도록 많은 때, 책은 얼마나 밋밋하고 하찮은가. 그러나 그 밋밋함에 마음이 고요해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창밖에는 나무들이 요란하게 몸을 휘두르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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