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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피차 Mar 16. 2020

21세기의 왕족 이야기:
현대 금수저와 뭐가 다를까?

<왕좌의 게임>,<킹덤>,<비밀의 숲>,<하이에나>,<이태원 클라쓰>

현명한 왕으로 꼽히는 로마의 5현제와 중국의 요.순.우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왕위를 혈통을 통해 세습한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양위한 것입니다. 좋은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지만 현대 능력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세습제가 가진 부당함 때문에 좋은 시대가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왕좌의 게임>과 <킹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특히 5현제 시대의 끝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왔던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와 끝을 함께 했습니다. 이에 대한 아쉬움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세습을 양위로 바꾸어 다루기도 했습니다.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왕좌의 게임>에서는 완전 능력주의는 아니었지만 자식에게 세습하지 못하면서도 의지적으로도 하지 않을 예언자이자 신체장애인인 스타크 가문의 막내아들 브랜을 7왕국의 황제로 세웠습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킹덤>에서도 서자인 이창이나 방계 왕족인 원유에게 돌아가지 않고 이창의 호위무사의 아들이 적통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여기서도 이창은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선왕과 선왕비(+가문)도 죽었으므로 왕권의 정통성을 위협할 인물이 없게 된 것이죠. 

산사 스타크

<왕좌의 게임>의 이러한 결말 때문에 팬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나올만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원래 황제자리만해도 3개의 적통이 있습니다. 선왕이자 미친왕 타가리옌 가문, 선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바라테온 가문, 왕과 왕자/공주가 모두 죽어 여왕이 된  라니스터 가문입니다. 주인공인 스타크 가문은 변방인 북부의 왕가로 초반에는 바라테온 가문을 밀어주지만 후반에는 타가리옌 가문과 연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가문은 라이벌에게 견제 당하기도 하지만 백성들을 착취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에 드라마는 이야기 상 그들이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계속 보입니다. 라니스터는 대놓고 악역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애초에 없어 보였구요. 스타크 가문의 서자이자 결혼도 사회적 생활도 하지 않는 나이트 워치인 존 스노우가 모든 인간의 적 백귀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다가 사실 타가리옌의 혈통도 받은 존재임이 밝혀져 황제가 되는가 했지만 그렇다면 여타의 사극과 다를 바가 없었겠죠. 한국에서 아직도 유행하는 알고보니 금수저 혈통 막장드라마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 역경을 지혜롭게 이겨낸 장녀이자 북부의 왕 산사가 황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역시 모진 훈련을 거쳐 '얼굴없는자들'이 된 아리아가 될 것인가. 가장 마지막까지 제일 적합했던 여왕 대너리스 타게리옌이 폭정(의 기미)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를 죽인 존 스노우와 그의 가문인 스타크에서는 황제가 나오지 않겠거니 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백귀의 왕을 죽이고 얼굴없는자들로서 정치적 욕심이 없어보이는 막내딸 아리아가 황제가 되는 건가 싶었지만 그보다 더 핸디캡이 많은 막내아들 브랜이 6왕의 추천을 거쳐 황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여자도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성생활이 불가능한 브랜이 더 적합한 상황입니다. 

아리아 스타크

이러한 결말은 <겨울왕국>에서도 나타나는데요, 마법이 가능한 장녀 엘사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갈등을 해결한 차녀 안나가 왕이 되는 부분입니다. 선천적이고 공격적인 능력보다 후천적이고 부드러운 능력을 더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물론 그러려면 애초에 왕정제를 다루면 안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요. 왜 자꾸 왕정을 다루는가를 생각해보면 비현실적인 세계관 때문인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할 거리가 있으면 다뤄 보겠습니다. 

<킹덤>은 좀 더 보수적인 선택을 하지만 실제 왕은 아니어도 실제 왕조인 조선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원작인 만화 <신의 나라>는 아예 어린 아이인 버려진 왕자가 왕이 되는 과정인가 보던데 <킹덤>은 왕위세습이 확정된 상태인 서자 출신 세자 이창이 주인공입니다. 여기서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어쨌든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창이 즉위를 하면 재미없겠죠. 방계 왕족 원유가 혈통이 뭐가 중요하냐며 왕위를 거절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역시 이 둘은 왕이 되지 않겠구나 싶었습니다. 여기서 공주가 있어서 왕이 되었다면 적절한 선택이겠지만 형제와 사촌도 없다는 설정이어서 혈통은 아니지만 적통인 아이가 왕이 되었습니다. 실제라면 먼 방계친척이라도 원유가 살아있으면 다시 후계로 거론될 거고 주위에 권력이 붙을 테니 위험한 인물이라 곁에 두면 안되겠지만 궁에서 어린 왕을 보필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죽지 직전에야 용상에 앉아보는 왕비.

후반부에 왕비가 아버지조차 죽이면서 집에서 딸이라 무시받았지만 결국 나라를 뒤흔들 것이라는 대사를 합니다. 아 그럼 <왕좌의 게임> 세르세이 여왕처럼 되는 것인가 했지만 이창이 입성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니 죽어 마땅하다며 처단하려 합니다. 하지만 왕비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왕정시대가 아니었다면 부정부패를 일삼을 일이 있을까요? 아버지의 욕심에 늙은 남자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고 목숨을 부지하려면 남의 자식을 죽이고 빼앗은 왕비는 여자가 아니고 왕정사회, 가부장사회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죠. 뭐 여기까지 가면 사정없는 캐릭터가 없기도 하고 이창 역시 왕족이기 때문에 왕비는 역병환자에게 처단됩니다. 그래도 왕의 자리인  용상에 앉아 있는 왕비의 연출은 카타르시스가 대단했습니다.(실제 영상에서는 위의 원삼이 아닌 칠적관을 쓴 적의를 입고 나옵니다.) 언젠가는 여자왕이 나오는 조선시대 사극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별 역할이 없었던 조범팔이 좌의정이 되는데 반해 역병을 연구한 서비는 시즌3이 나올 경우에도 여전히 부하5 정도로 나올 것 같아 좀 많이 아쉽습니다. 새로운 여자 캐릭터로 전지현 배우가 나올 듯 한데 그렇다고 해도 남여비율, 양반평민비율이 메세지에 비해 심하게 치우져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구성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컨텐츠에서도 많이 보이고 현실도 비슷합니다. 최근 전문직을 주인공으로 하는 컨텐츠가 많고 여자주인공들은 1등을 도맡아하는 알파걸로 나오는데 그 말은 1등을 하지 않으면 여자의 자리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조연들은 역시 남자가 대다수입니다. 여자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컨텐츠는 애엄마가 주인공인 아침드라마가 거의 유일할 겁니다. 그리고 전문직을 다루는 드라마에서도 금수저 주인공이 부정부패한 자수성가 조연을 물리치고 약간의 제도수정을 거치면서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라인이 없는 자수성가 캐릭터는 왜 부정을 할 수 밖에 없을까요? 금수저의 정정당당이 정말 정당한가요? 혈통에 따른 왕위세습은 그렇게 부정하려 하면서 금수저 전문직 남자 캐릭터들은 왜 영웅으로 나오나요? 

우연찮게도 <킹덤>의 이창 역을 했던 주지훈 배우가 역시 금수저로 나오는 <하이에나>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내용입니다. 남자 주인공 윤희재는 대법관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여자 주인공인 정금자는 고졸 변호사로 불법에 가까운 방법을 통해 승소해서 사사건건 윤희재와 부딪히고, 같은 로펌의 선배 변호사 마석구는 소위 백이 없어서 금수저 윤희재를 견제합니다.(윤희재가 선역은 아니지만 주인공이기 때문에 동정할 수 밖에 없죠.) 주인공의 거친 리더십으로 인기가 많았던 <스토브리그>, <라이프>, <비밀의 숲>  등은 모두 주인공이 배경이 좋거나 전문직이거나 남성이었죠. 부패 검사를 바로 잡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는 거의 진짜 주인공인 이창준의 존재는 좀 위험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여자 검사 영은수는 초반에 죽어서 여기에서도 여자 캐릭터는 형사 역인 배두나 배우 밖에 없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오는 황시목(조승우 )은 왜 웃지 않냐는 말을 거의 듣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 정도 애티튜드는 <라이프>의 구승효(조승우 분)와 <스토브리그>의 백승수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태원클라쓰>에서도 남자주인공 박새로이가 불의를 못참는 캐릭터인데 여자주인공 둘은 이기적인 캐릭터로 나옵니다. 또 여자주인공1(오수아)은 어렸을 때부터 남자주인공의 아버지가 후원해왔던 고아이고 여자주인공2(조이서)는 갓 스무살이 된 천재 인플루언서로 남자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끼는 캐릭터 같은데 어린 여자와 늙은 남자라는 위험한 조합을 따르고 있죠. 게다가 오수아가 일하는 요식업계 중견그룹 장가의 설립자 장대희는 혼외자 장근수를 두었으며 적장자인 장근원과 기업 승계 경쟁을 부추깁니다. 그렇기에 대체적인 분위기는 가부장제가 응축된 사극과 다른 점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는 다수자성을 가진 주인공이 할 말 다하는 것으로 감동받는(?) 컨텐츠는 그만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혈통문제를 왕세자가 지적하는 것이 우스운 것처럼 라인 문제를 지적하는 금수저 or 전문직 캐릭터도 우습지 않나요? 그리고 현실에도 없는 고위직 여성 캐릭터가 영화와 드라마 심지어 판타지에도 없는 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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