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포항, 강풍, 데크길, 바람의 핫도그, 포토존, 사곡
빗소리와 따스한 차 안, 그리고 날씨와의 싸움
두두두둑 빗소리,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그리고 캠핑카 안의 따스함. 3월 2일 새벽, 다포항에서 맞이한 아침. 창문은 살짝 열려 있고, 찬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차 지붕 위엔 빗방울이 두두두둑, 등은 뜨끈뜨끈—캠핑카 안은 그야말로 낭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낭만에 젖을 수 없는 ‘아빠 여행사’ 대표다. 날씨 앱을 계속 들여다보며 오늘 일정을 고민 중이다. 이틀 연속 실내 관광은 피하고 싶은데, 바람은 거세고, 비도 심상치 않다. 아이들은 자고 있지만, 나는 이미 머릿속에서 오늘 하루를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오늘도 ‘운전기사’이자 ‘기획팀장’이자 ‘위기관리 매니저’였다.
여행자의 눈에 비친 누군가의 일상
밤에는 몰랐던 풍경이 아침이 되자 하나씩 드러난다. 아이들이 일어나고, 와이프는 아침을 준비하고, 어머님은 아이들을 챙긴다. 나는 주변 정찰을 핑계로 캠핑카 밖으로 나섰다. 그 순간 펼쳐진 다포항의 풍경은 생각보다 더 생생하고, 조금은 낯설었다.
낚시하는 분들, 미역을 채취해 널고 있는 분들, 심지어 천막까지 보인다. 마치 일상의 연장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우리는 ‘여행자’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캠핑이 우리에겐 낭만이고 즐거움이지만,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하루이고 생계였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다포항은 우리에게 풍경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터전이었다. 그리고 그런 진짜 삶의 단면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또 다른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천장산 대신 해변길, 의외의 발견
아침을 먹은 후에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조용히 아침 시간을 보냈다. 어머님과 둘째, 막내는 다포항 주변을 산책하며 풍경을 구경했고, 첫째와 와이프는 캠핑카 안에서 따뜻한 담요를 덮고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캠핑카 뒷 침대에 누워 날씨 앱과 지도를 번갈아 보며 계획했던 천장산 이동 경로를 살펴보고 있었다.
기다림 끝에 오후 1시가 되어서야 햇살이 얼굴을 내밀었고, 우리는 산책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계획했던 천장산 초입은 막혀 있었다. 그 순간의 허탈함과 아쉬움. 우회로는 부담이 컸다. 왜냐하면 그 우회로는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고, 좁고 위험한 찻길을 따라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어머님까지 동행하는 상황에서는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와이프가 말했다. “그래도 어딘가는 가야지.”
그때 보인 ‘다포다대해변길’이라는 표지판. 왕복 3km의 데크길이란다. 바다를 따라 걷는 길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방향을 틀어 새로운 길을 향해 걸었다. 늘 예상한 곳이 아닌, 우연히 발견한 길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 길은 우리 가족에게 그런 선물이 되었다.
몸을 밀던 바람, 추억이 되다
일기예보엔 강풍주의보가 떴지만, 정박해 있던 다포항에서는 바람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별 걱정 없이 데크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바다 위로 길이 이어지자 그제야 바람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가로막지 않는 바다 위, 바람은 거침없이 우리를 향해 불어왔다.
다리 위 데크길, 건물 하나 없는 바다 위. 온몸을 덮치는 바람에도 우리는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바람은 몸을 날릴 듯이 불었고, 아이들은 균형을 잡느라 휘청였다. 어머님은 걱정 섞인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런 가족을 보며 웃음이 났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더 기억에 남을 산책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머리가 날리고, 몸이 흔들렸지만,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웃음이 되었다. 해변으로 내려오자 바람이 확 줄었다. 알고 보니 사람들과 건물이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던 것.
같은 바람도 누구와 함께 맞느냐에 따라, 추억이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그날 배웠다.
맛과 웃음, 그리고 또 한 번의 딱 맞춘 비
걷다 보니 나타난 노란 간판, ‘바람의 핫도그’. 관광버스, 긴 줄, 바람에도 끄떡없이 핫도그를 들고 있는 사람들. 우리도 순간 혹했지만, 일단 참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식당을 찾았다. 골목 안쪽 작은 식당에서 먹은 생선구이, 회, 매운탕은 오랜만의 외식이었고, 의외로 훌륭한 맛 덕분에 기억에 오래 남을 식사였다.
대부분의 식사는 캠핑카에서 해 먹지만, 오늘만큼은 외식도 추억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바람의 핫도그’로 향했다. 긴 줄에 잠시 망설였지만, 하나둘 나오는 사람들의 웃는 얼굴과 바람을 맞으며 핫도그를 들고 인증샷을 남기는 모습에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 줄의 끝에 섰다.
핫도그를 받아 들고 곧장 가게 뒤 언덕 위로 향했다. 언덕 끝 작은 포토존은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가장 높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람이 여전히 강했지만, 풍경은 탁 트였고 분위기는 따뜻했다. 우리는 핫도그를 손에 든 채, 서로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며 오래도록 웃었다.
마을에 진입할 때는 조용했던 갯벌이, 핫도그를 들고 언덕에서 사진도 찍고 내려오니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체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갯벌 체험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고, 게, 조개, 낙지까지 잡힌다고 했다. 장화 신고 바구니 들고 움직이는 모습이 부러웠지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그 순간, 하늘에서 빗방울이 톡, 톡. 온 가족이 경보하듯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차에 도착하자마자 퍼붓는 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너무도 절묘한 타이밍에 다들 박수를 쳤다. “정말 딱 맞춰 왔다.”
예정된 동부 여행은 취소, 익숙한 곳으로 돌아감
이곳 다포항은 거제 남부 지역이고, 우리는 내일 동부 지역으로 넘어가려 했다. 흥남방파제 근처에서 정박할 계획도 세워뒀다. 하지만 오후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태풍급 강풍주의보 문자가 계속 울리고, 바람도 갈수록 거세졌다. 차 안에 앉아 있는데도 문짝이 떨리는 느낌이었다.
결국 동부 쪽 이동은 접기로 했다. 이 바람 속에서 운전과 정박을 반복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고, 차라리 전날 묵었던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곡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하나로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샀고, 전날과 같은 자리에 캠핑카를 다시 세웠다. 거제도는 가운데로 갈수록 산이 솟아 있고, 마을은 대부분 바닷가를 따라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남쪽 끝 다포항에서 세차게 불던 바람도 산 하나를 넘자 조금은 누그러졌다. 마치 산들이 바람을 막아주며, 우리가 쉴 틈을 만들어주는 듯했다.
사곡에 도착하자 확실히 바람이 한결 덜했다. 그래도 조용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바람은 세찼고, 밤새 불어오는 돌풍에 캠핑카가 몇 번씩 흔들렸다. 비도 계속 쏟아졌다.
그날 저녁, 우리는 차 안에서 따뜻한 식사를 준비했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 사이로 조용한 웃음이 들렸고, 아이들은 담요를 덮고 누워 있었으며, 어른들도 그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비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방음이 되었고, 우리는 오랜만에 캠핑카 안을 작은 노래방으로 꾸몄다. 휴대폰과 스피커를 연결하고, 조명을 낮추고, 아이들과 함께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며 밤을 보냈다. 특별한 관광을 한 건 아니지만, 긴 하루였고, 다채로운 감정이 남은 하루였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차박’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