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하세요'다 정말!
아침부터 상사한테 한 소리 들어 한 잔 하고 싶던 날이었다.
띠링- 사내 메신저가 울린다.
퇴근하고 한잔 콜?
요 근래 친해진 다른 부서 동생이 보낸 쪽지다. 좋아! 불금을 그냥 보낼 수 없지.
자타공인 집순이인 내가 선뜻 수락을 하니 기뻐하는 눈치다.
잠시 뒤 다른 부서 사람들도 꽤 온다는 이야기와 함께 단골 술집이라며 주소를 찍어준다.
간만에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킬 생각에 신이 났다.
불금은 불금인가? 제법 직원들이 모였다.
사람 좋아하는(흔히 말하는 E) 사람들은 다 모인 것 같다.
대문자 I로써 E들에게 둘러싸여 점점 넋이 나가던 무렵, 남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H가 소곤거리는 소리에 술이 확 깬다.
“그 왜, oo부서 김 직원 있잖아~~ 가발이 맞대! 근데 애초에 너무 티 나지 않았어?”
“내가 딱 알아봤잖아! 그 뭐랄까.. 머리털과 아닌 부분이 너무 티나 정말”
저마다 진즉에 알았느니 몰랐느니 웅성웅성 난리법석이다. 심지어 저번 부서에서 같이 근무했던 직원은 비어가던 그의 머리를 직접 봤다는 둥 이때다 하고 곳곳에서 제보가 이어진다.
나는 마냥 웃을 수가 없다. 물론 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부서를 옮기고 나서는 가발을 쓴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소문을 통해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은 알터.
듣다 보니 마음이 점점 더 불편해지고, 일면식도 없는 김 직원씨가 너무 불쌍해진다.
그 직원도 알겠지.
자기 가발 티 나는것. 이전과 다른 자기 자신. 그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 것이다.
“그분 혹시 어디 아파서 그런 것일 수도 있잖아...”
주제를 돌리고 싶어서 용기 내서 말을 던져본다.
“에이~ 머리 빠진게 뭐가 병이야~.” 다들 낄낄거린다.
그런가? 탈모가 병이 아닌가? 병이 아니면 그렇게 해도 되는건가?
그 사람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나 유전이거나 해서 결국 그리 되었겠지...
그러다 문득, 내가 남 걱정할 처지인가 하는 생각이 번뜩 든다.
이 사람들 나중에 내 얘기도 듣게 되면 어떨까? 다른 모임 가서 쉬쉬거리며 아니 낄낄거리며 하려나??
내가 진짜 아파서 그렇게 됐다는 이유 따위는 '어멋, 난 그런 줄도 모르고'하고 넘기면 그만일 테고
그럴 일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괜히 화가 나고 자리가 불편해진다.
이 주제를 피하고 싶어서 화장실을 갈까 할까 하다가도 내가 자리를 비우면 혹시 누군가 내 얘기도 같이 꺼내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걱정에 가시방석이어도 꾸역꾸역 앉아 있었다.
내가 한심하다.
어쩐지 오늘 아침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하루 끝까지 이 모양이네.
2차 얘기가 오고 가길래, 먼저 인사를 하고 나왔다. 집 앞 편의점 맥주가 엄청나게 땡겨서 4캔에 만원 야무지게 챙겨 집으로 들어갔다.
취이익~ 탁!
기분 안 좋았던 것이 캔맥주 따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다.
캔 따는 소리인줄 알았나, 우리 집 고양이들도 신나서 달려온다.
한 손엔 시원한 캔맥주, 무릎 위에는 따뜻한 고양이. 감히 여기가 천국인가 생각이 든다(취했다.)
맥주를 꿀떡거리며 오늘 일을 친구에게 전한다.
"자기들 인생이 뭣도 없으니까 남 인생에 훈수질이지! 그럴 시간에 자기 계발이라도 하라 해"
시원한 그의 말 때문인지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비워버린 캔맥주 때문인지 속이 시원해졌다.
그래 오늘 좋은 것 하나 배웠다.
남 흉보니까 이때다 하고 달려드는 이런 사람들은 멀리하고 내 옆은 좋은 사람들로만 채워야지.
나도 앞으로는 혹여라도 남 이야기를 안주 삼지 말고, 내 인생 그리고 내 앞에 마주 앉은 사람에 인생 이야기에 집중해야지. 내 인생을 즐거움과 행복으로 꽉 채워야지.
고양이를 쓰다듬다 보니 잠도 솔솔 온다.
그나저나 얘네는 털이 왜 이리 한결같이 빠져대는겨? 근데도 털이 왜 계속 왜 이리 많은 겨?
부러워 죽겠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