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그마 Feb 02. 2024

머리숱

다다익선입니다.

며칠 전 눈이 온다는 소식에 후다닥 마트로 달려갔다.

나는 함박눈이 펑펑 오는 날 귤을 먹으며 눈 구경을 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손쉽게 까먹을 수 있는 새콤달콤한 감귤이야 말로 진정한 겨울 간식이라 생각한다.


사실 동네 작은 마트에서는 철 지난 귤을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귀찮지만 큰 마트로 갔다.

이곳도 한라봉과 레드향이 제철을 알리며 과일코너에서 주인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찾는 것은 감귤인데... 구석에서 찾아냈다. 오예 제주 감귤!


눈을 보며 새콤달콤한 귤을 까먹을 생각에 입에 흐뭇한 미소가 퍼지던 찰나에 과일 담당 직원이 말을 건넸다.


“한라봉 들여가세요 어머니~ 요새 저희 한라봉 세일 중이에요”


어.. 어머님이라니....


곁눈질로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그분은 나를 보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든 감귤(1박스) 보다 한라봉 한 봉지(6개입)가 저렴하긴 했다(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알려주는 것은 고맙지만 아, 어머님이라니...


문득 눈 예보에 신나서 헐레벌떡 모자만 쓰고 나온 것이 생각났다.

다른 동네로 차를 끌고 온 터에 방심하고 후드를 뒤집어쓰지 않았던 것이 이런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줄이야!!


내가 너무 오전 시간에 마트에 온 건가? 보통 엄마들이 일찍 장 보러 오나?

 

아니지, 사실 내 친구들 중에 애기 엄마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내 나이 정도면 어머님이 될 수 있긴 한데,


아니 근데 이게 그 젊은 어머님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머릿속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다.


아휴, 왜 가발 10년 써도 이런 상황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지.

여전히 내 멘탈은 쿠크다스인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머님인척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하고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정신을 차리니 주류 코너다.


계획에도 없던 소주병, 와인병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씁쓸하던 차에

“저 어머님 아니예욧!”하고 나한테 쏘아붙였던 손님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당시 나는 나름 친절한 직원이 되고자 너스레를 좀 떨어보겠다며  “안녕히 가세요” 뒤에

"어머님"을 기계적으로 붙였었는데, 얼떨결에 한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때는 이게 그렇게까지 화날 일인가 싶었으나,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잘못한 게 맞는것 같다.

정말 미안해요. 어머님 아닌데 어머님이라고 불러서...


사실 그분은 머리숱도 문제 없었는데 얼마나 기분이 안좋았을까, 그녀에게 뒤늦게나마 사과를 전해본다.


동안의 기준, 미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자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일 것이다.


귀걸이를 하면 1.5배 더 이뻐 보이고

머리를 기르면 7배 더 이뻐 보이고

화장을 하면, 살을 빼면 8배 또는 10배 이뻐 보인다고 하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카더라 정보일 뿐 이를 정확히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는 것 같다.

(귀걸이 판매율을 높이기를 위해 귀금속 종사자들이 퍼뜨렸다는 썰이 가장 그럴듯하다.)


앞서 언급한 미에 대한 여러 기준들을 보고 혹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겠지만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머리숱.


내가 늘 거울을 보며 느끼지만, 머리숱은 영원불멸의 미와 동안의 기준이다.


아무래도 머리숱 적은 사람이 이쁘고 젊어 보이는 시대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아마 후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다못해, AI 로봇들도 마냥 민머리로만 있진 않을 것이라고 본다.


아, 생각난김에 귤 다 먹고 영양제라도 좀 챙겨먹어야겠다.


이전 04화 피어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