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서양이라 함은 당연히 '미국'이 지배적이었다. 미국 헐리우드의 영화, 미국 드라마를 보고 자랐고, 학교에서 배운 영어도 '아마' 미국식이었을 거다. 런던에서 근무하던 때, 영국인들이 자주 묻는 질문은 "너 어디서 영어 배웠니?"였다. 별 생각없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대학과 대학원 때 미국에 좀 있었어."라고 답변을 하면 그제서야 수긍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을 해보니 영국인의 자존심었던 거 같다. '감히 영어를 더듬더듬 사용하는 아시아인이, 그것도 영어의 본 고장 영국에서 미국식 영어를 써?' 이런 것 말이다.
겁나 두꺼워서 무거웠지만 '영국인 발견'이라는 책을 런던으로 가져갔고, 반쯤은 웃어 넘기며 반쯤은 진지하게 영국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공부하면서 '오잉? 정말로 영국인이 이런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일도 일이지만 영국, 특히 런던하면 훅 다가오는 느낌은 신사의 도시, 비가 와도 우산없이 버버리코트나 바버자켓을 입고 걸어다니는 멋진 남자들의 도시, 포쉬한 억양만큼 스타일까지 멋져버린 셜록 홈즈의 도시다.
단추 대신 커프스링크를 끼워 입는 셔츠, 훌륭한 모직으로 만들어진 수트,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고급 구두까지... 뱅크라고 불리우는 런던 금융가에 가면 가죽가방, 서류들을 들고 걸어다니며 담배를 피고 무단횡단을 하는 (이런 게 당연한 곳이 런던) 멋들어진 런더너들을 볼 수 있다. 그와 반대되는 이미지가 미국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그 Bank 라는 지역에는 Lloyd's of London 이라는 보험 및 재보험 왕국이 건설되어 있고, 은행가들은 거기서 더 동쪽인 카나리 워프 (Canary Wharf)에 모여있다.
폴로, 브룩스 브라더스 느낌의 편하면서도 멋진 셔츠와 수트, 그리고 역시나 '편안함'이 멋짐을 넘어선 구두. 몇 년 전 '알든 990'이라는 이 영롱한 녀석을 패피인 친구 녀석으로부터 접했다. 청바지를 접어 입고, 그 아래 멋드러지게 신은 알든. 코도반이라고 하는 말 엉덩이 가죽이라 그런가 색감도 정말 멋졌다. 하지만 가격을 듣고서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아이 둘을 양육하며 노후도 준비해야 하는 회사원에게는 넘사벽인 가격이었다. 패피 녀석은 덤으로 알든과 비슷한 느낌은 '락포트 찰스로드'를 소개해줬고, 세일에 세일을 얹는 미국 쇼핑 덕에 40$ 정도에 직구를 했다. 생각보다 빠른 국제배송에 감탄 한 번, 가격 대비 편하고 이뻐서 감탄 한 번이었다. 정장, 비즈니스캐주얼, 청바지에도 크게 모나지 않으면서, 일단 무지하게 발이 편했기 때문에 주구장창 이 녀석만 신었다. 비오는 여름에도, 눈오는 겨울에도 그렇게 한 3년을 신었더니 어느날 신발장의 락포트를 보며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이제 이거 버려야겠는데?"
(출처 : 인터넷 블로그)
매일 그냥 신기만 해서 몰랐는데, 어느새 뒷꿈치쪽 가죽이 너덜너덜해졌고, 발가락쪽은 뭘하다 찍혔는지 통풍구도 나있었다. 수선집에 가져가기도 민망한 상태라 그렇게 락포트와는 이별을 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다시 이 녀석을 직구하기 위해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르기는 너무할 정도로 가격이 올라 있었다. 몇 번 가격 조회를 해보다가 락포트는 생각에서 잊혀졌고, 그 사이 회사 드레스코드도 '매일 비즈니스 캐쥬얼'로 변경이 되어 옷장 안에 숨어 있던 (생산년도가 또 2000년대인) 운동화와 로퍼를 신고 1년을 지냈다. 24년이 시작되며 사연이 있고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며 지난 1년 발이 되어줬던 운동화와 로퍼들과도 작별을 고했고, 그 즈음 '락포트 찰스로드'가 아주 아주 굳딜은 아니지만, 내 헛헛함을 달래줄 정도의 괜찮은 가격대로 세일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바로 질렀다.
눈이 왔고 질퍽했던 며칠은 고이고이 신발장에 모셔두었다가 길이 미끄러울지도 모른다는 오늘, 찰스로드님을 꺼내어 신었다. '아, 이 느낌이지. 얼마전까지 신었던 운동화와 로퍼의 은근한 불편함들과는 차원이 다르네.' 라며 찬바람을 맞으며 수영장을 함께 했고, '다시 이 신발을 신으니 지하철에서 오래 서 있어도 괜찮네.'라며 으씩하기도 했다. 찰스로드님 말고 다른 신발도 하나 왔고, 작별을 고한 신발들은 모두 네켤레이니 그래도 정리 측면에서는 남는 장사다. 이번 주말에는 신발장 속의 군화와 (이제는 아마 더 신고 뛰지 않을) 농구화 두 켤레를 어떻게 해야 하는 고민중이다.
비워진, 그리고 더 비워질 신발장을 보며, '내년에는 알든 990을 사야겠다.' 라고 혼자 다짐을 해본다. 회사생활도 신발장처럼 채워졌다가 비워지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은퇴할지 모르겠지만, 한 유투버가 평생 하나의 구두만을 살 수 있다면 '알든 990'을 사겠다고 했던 것처럼 회사에서나 가정에서 '알든 990'같은 알짜가 된다면 좋지 않을까?
알든 990이 어울리도록 멋지고 지적으로 늙어가고, 지갑에 현금도 많고, 꼭 지금 회사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오랫동안 필요한 사람이면 좋지 않을까 싶다. 알든 990을 사고 싶어서 설득 논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