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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유니버스 Jan 10. 2024

가볍게 새해 시작..

light, light, light 

해마다 새해가 시작되면 New Year's Resolution을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 적는다. 

빠지지 않는 것이 '체중감량 & 운동'. 가족들과 새해 첫 끼로 떡국을 먹고... 오늘부터는 단백질 잘 챙겨먹고, 

탄수화물은 적게 먹어야지 속으로 생각한다. 


"아빠, 월요일인데 명절이고 하니 우리 햄버거 먹으러 가면 안돼요?"

"새해 첫 날이니 오늘은 건강식 먹자."

나의 새해 다짐을 아는지 모르는 아이들의 햄버거 공격은 쉼이 없다. 


"아빠, 햄버거가 무슨 색인줄 알아요? 수수께끼예요."

"... ... "

"버건디" 

"버건디? 햄버건디? ㅎㅎㅎㅎ"



아이들이 '버건디'를 얘기하니 학교 다니며 즐겨입었던 '버건디 (혹은 자주색, 붉은 계열) 니트'가 떠올랐다. 

"엠제이, 지금은 힙합이 대세야." 라며 '강남' 출신의 대학 친구가 여름방학 즈음에 압구정, 강남역 등을 친히 가이드 투어를 해주었다. 지하철 환승도 잘 못했던 촌 사람에게 압구정은 정말 다른 세계였다. 그 때 친구가 옷가게를 구경하며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던 '버건디 니트'. 니트에 헐렁한 원턱의 면바지, 그리고 닥터마틴까지 신으면 거칠 것이 없는 20대였다. 그렇게 '나이키'만 알던 패알못이 이런 저런 패션브랜드도 구입하며 나름의 패션 세계를 구축했으나... ...


보수적인 금융회사의 평일 복장은 정장, 주말엔 아이와 활동하기 편한 옷들(회사에서 몇 년에 한 번씩 지급해주는 트레이닝복)로만 생활한지가 10년도 훌쩍 넘었다. '버건디 버건디'를 되내이며 오랜만에 옷장을 열어 제꼈다. (아쉽게도 버건디 니트는 군인 시절 실올이 풀려 장렬히 사망했다) 24년 미션 중 하나인 옷장 비우기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아, 이 셔츠는 2001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리스마스 세일이라 80% 할인으로 산 건데...'

'이 반팔티는 2007년에 은행을 그만두기로 맘먹고 스페인에서 남은 인생을 불태워보자며 산 티인데...'

'아, 이 바지는 2008년 겨울, 무지 춥던 로체스터 아울렛에서 두꺼운 바지가 없어 산 건데...'

'이 니트는 2007년에 아버지가 몽골 여행기념으로, 저 니트는 누님이 대학원 공부 열심히 하라 사준건데..'


라며 잘 입지 않는 옷들을 모아놓은 박스를 열었다. 1년, 아니 최근 3년 동안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을 옷들이 잘잤다며 기지개를 펴고 나왔다. 옷 하나 하나마다 사연이 묻어 있다. 박스를 꺼내서 혼자 궁시렁 거리고 있으니 아내가 지나가며 한 마디 한다. "옷들은 다 괜찮아 보이는데, 다 너무 낡았다."



형광등을 켜고 옷들을 펼쳐 보니, 내가 그 옷들에 담아놓은 사연들은 그대로인데 옷들은 세월을 먹고 늙었다. 

니트에는 보풀들이 일어났고, '셔츠와 바지는 나 2000년 초반에서 시간을 멈추고 돌아온 남자'임을 보여준다. 옷들은 낡아가고 나는 잘 안 입지만 미련하게도 그 사연들 때문에 아직 버리지 못하고 옷장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어차피 나는 뚱뚱한 아재의 체형이 되었기에 옷들과 핏도 좋지 않지만, 그 옷들을 보고 있으면 20대와 30대 초반 '나'라는 인간이 가끔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해의 결심은 이루어야 하기에, 오래된 옷들은 박스를 벗어나 커~다란 핸디캐리 가방에 담겼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기증을 받아주면 기증을 하고, 아니면 수거함에서 작별을 고할 셈이다. 오래된 사이월드의 사진첩처럼 돈없고 힘들었지만, 무언가 끊임없이 뛰어다녔던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해줄 '옷들'과 아름답게 잘 작별을 해야 한다. 지난 것들을 툴툴 잘 털어내야, 또 거기에 새로운 것이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끝)


#라라크루 #라이트 라이팅 #가벼운 글쓰기, 가벼운 옷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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