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하려고 5시쯤 일어났는데 유난히 어두웠습니다.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오고 추워진다고 합니다.
'아, 비가 오면 자전거도 못 타는데... 오늘은 그냥 쉴까?' 라고 5초쯤 고민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다행히 밖에 나오니 비는 부슬비 수준이고, 낙엽들은 어지러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고 바닥은 새벽에 내린 비로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 바깥은 매우 깜깜하고 춥습니다. 평소 아쿠아맨이라면 캐논 변주곡을 듣거나, 에너지를 채워줄 노래들을 찾아 듣지만 오늘은 웬지 센치해집니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 원어민 선생님 수업이 있었습니다. 수능, 문법만 공부하던 고등학생들에게 원어민 선생님과의 수업은 재미 그 자체였습니다. 농구를 좋아하던 남자 미국 선생님이셨기에, 같이 농구도 하러 다녔습니다. 역시 미국인은 농구를 잘했습니다.
그런 원어민 선생님이 어느날 수업 시간에 Wind of Change 라는 노래를 들고 교실로 오셨습니다. 종전과 평화, 러시아와 고르바초프 등등 뭐라 설명해준 건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함께 가사를 듣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연습을 많이 해서일까요? 지금도 휘파람을 꽤나 잘 붑니다. 깜깜하고 비내리는 길목에서 혼자 감성포텐이 터져 인트로의 휘파람을 크게 부릅니다. 검은 우산에 무채색의 옷을 입은 덩치 큰 아저씨가 우산 속에서 휘파람을 부니 무서웠나 봅니다. 골목 건너편에 일찍 출근하시는 듯 보이는 젊은 청년이 신호등 앞 가로등에 서서 움직이질 않습니다. 한참을 걸어가다 뒤돌아보니 잰걸음으로 저와 반대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수영장 가는 길이 요즘 공사판이라 밤새 내린 비에 흙길도 조금 보입니다. 질퍽거리는 흙길을 걸어가는데
"I follow the Moscow, Down to Gorky Park" 라는 가사가 잘도 들립니다. 가사 내용과 무관하게도 저는 몇 년전의 러시아 모스크바에 와있습니다. 그 때는 4월이었습니다. 4월의 모스크바는 무지하게 추웠습니다. 잿빛 하늘의 잿빛 거리, 그리고 한 때는 하얗게 내린 눈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하얀진흙더미, 모스크바의 첫 인상이었습니다. 벤츠도 있고 비엠더블유도 있는데, 모두 세차가 안 되어 거리의 자동차 색도 모두 진흙빛이었습니다. 러시아 친구가 설명해줬습니다. "5월이 되기 전까지 눈이 내리는 날이 많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세차를 안 해. " 날씨를 보니 맞는 말 같습니다.
당시 러시아에는 세미나 겸 미팅을 위해 방문했습니다. 아침 일찍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무식한 건지 용감한건지) 산책을 나갔습니다. 진흙차들로 길은 꽉 막혔습니다 (서울과 비슷합니다). 흐린 날씨에 찬바람까지 부니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도 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떡 하면서 인상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아놔, 러시아에서조차도 아시아 남자라고 개무시당하는구만.' 이라 속으로 생각하고 어쨌든 혼자만의 산책을 즐겼습니다.
점심을 같이 먹은 러시아 친구에게 아침 산책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막 웃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웃으며 하이라고 하듯, 러시아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고개를 끄떡하며 인상쓰는 게 인사라고 합니다. 오후 시간에 까페에 가서 커피 주문을 하며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떡하고 인상쓰며 "Americano, please" 라고 얘기해봤습니다. 이제 상대방도 인상을 쓰겠지 라며 '아 이 정도면 나도 러시아에 대해 좀 아는 건가.' 하는데, 까페 직원은 너무 상냥하게 웃으며 커피를 줍니다. 무안하게스리... ...
저녁 시간을 이용해 회사 동료들과 테트리스의 배경인 바실리카 성당이 있는 광장도 가보고, 러시아의 대작가 푸시킨의 추억이 많은 아르바트 거리도 걸어보았습니다. 밤늦게 택시를 타고 숙소로 오는데 기사님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저 다리 보이시죠? 저기가 푸틴에 반대했던 (한국으로 치면 김대중 대통령같은) 야당의 지도자가 암살된 곳입니다. 푸틴에 반대하는 많은 칼럼을 썼던 기자는 영국 런던에서 마시는 차로 독살당하기도 했고요." 괜히 러시아가 아닙니다. 팩트체크를 떠나 우선 음침한 잿빛의 느낌입니다. 처음 만난 나를 보고 인상쓰기는 했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합니다. 따스하고 맑은 날 이 도시를 다시 찾아오면 제 기억도 더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인터넷 블로그 : 흑진주's 스토리)
그렇게 아쿠아맨의 러시아로의 시공여행은 끝났습니다.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들에 출장이나 여행갈 일이 많을 줄 알았지만, 제주도도 비행기 타고 가본지 한참입니다. 저 위 사진처럼 맑은 날 맑은 러시아를 다시 만나보고 싶어하며, 아쿠아맨은 수영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간만에 걸으며 다른 음악들을 들으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집니다. Wind of Change처럼 내 삶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