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둘 모두 가족들과 스케쥴을 조율 후 일요일 오전 7호선 도봉산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등산지도를 검색하다 보니 10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리만 브라더스 파산,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 등이 뉴스를 도배하던 2008년 가을, 주식과 파생시장의 활황으로 자신감에 똘똘 뭉쳐있던 나는 잘 다니던 은행도 그만 둔 대학원 1학년생이었다. 2009년 미국으로 가는 과정이었기에 치솟아 가는 환율과 떨어지는 주식잔고는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가지고 있는 원화의 상당부분은 주식이었는데, 주식은 빠지고 달러 환율은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2008년 가을 쿼터 수업 분위기는 그래서인지 차분함을 넘어선 침묵의 분위기였다. 교수님들도 학생들도 그런 류의 금융위기는 처음 겪었기 때문이었을 거 같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는 인생의 한 챕터이지만 그 순간에는 다시 금융인으로 사회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나를 지배하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기가 어려워 휴학을 한 친구도 있었고,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시는 친구들도 있었다.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고자 내가 선택했던 것은 등산이었다. 배낭 하나 덜렁 매고 사과와 물 한 통 가지고 운동화 신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등 서울 인근의 산을 많이도 다녔다. 내가 산을 다닌다고 해서 금융시장이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하루 종일 호가창만 들여다 본다고 해서 시장이 좋아지는 것 역시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게 등산을 다녀온 날은 스트레스가 땀으로 배출되었는지 훨씬 몸도 가벼웠다.
그렇게 도봉산을 오르던 어느 가을, 그 날도 사과 하나, 물 한 통 들고 1호선을 타고 하염없이 올라가 도봉산역에 도착했다. 날씨좋은 가을이어서 그런지 등산로에는 이미 가을 산행에 설레어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단풍과 은행도 울긋불긋했다.
'나 참, 세상은 이렇게 평온하고 아름다운데 내 마음은 혼란스럽고 어지럽구나.'
아이러니하게 이런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준 것은 '컬투쇼 레전드 사연'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연들을 컬투와 최재훈이 읽어주는 코너에서 레전드급으로 웃긴 사연들만 모아놓은 것이 있었다. 젊어서 그랬는지 산 타는 것도 힘이 안 들어 휴식도 없이 ... 거의 한 번에 정상을 오르곤 했다. 그 날도 그렇게 한 방에 도봉산 신선대를 찍고, 내려오는 길 어디 넓은 광장같은 곳의 벤치에 기대어 앉아 사과를 우걱 우걱 씹어먹었다. 구석 진 곳에서 입고간 낡은 점퍼를 베개삼아 누워 컬투쇼 사연을 듣다가... 너무 너무 웃겨 막 혼자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저 옆의 벤치에 핑크,보라색 등산 점퍼를 입으신 아주머니 일행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왔다.
잘 깎은 사과와 귤, 약과같은 걸 몇 개 건네시더니,
"학생, 요새 많이 힘든 일이 있는가 보네. 요새 대학 졸업반 우리 아이들도 너무 힘들어 하더라고. 그래도 이렇게 혼자 산에 오니 얼마나 기특해."
아, 컬투쇼가 너무 웃겨서 혼자 웃었을 뿐인데... ...
허겁지겁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집에 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덩치는 산만한 젊은 청년이 남들 일하는 시간에 혼자 산에 와서 지 점퍼를 베개삼아 베고 누워서 미친놈처럼 푸하하 거렸으니, 어머니들께는 어떻게 보였을까 싶었다. (제대로 인사도 못했지만 그 때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신 어머니들 감사합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도봉산이기에 빅 브로에게 도봉산은 그냥 쉽게 산책 다녀오는 정도예요 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결전의 일요일 아침이 됐다. 그 때처럼 사과 하나, 물 한 통 챙기고 새벽잠을 깨우는 커피가 추가됐다. 강산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한다더니, 그 시절 쉬지 않고 올랐던 신선대 코스가..이렇게도 바위가 많고 험한 코스였던가? 숨이 턱 끝을 넘어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추울줄 알고 뒤집어썼던 벙거지 모자도 흠뻑 젖었다. 그렇게 내 기억과는 너무 다르게도 도봉산은 그대로 서있었고, 신선대를 어렵게 어렵게 정복할 수 있었다.
정상석이 있는 곳이 너무 좁아 5분 정도 땀만 식히고 바로 내려오며 빅브로에게 물었다.
"브로, 이렇게 5분도 못 있다가 내려올 거 우리는 왜 이렇게 열심히 정상으로 올랐을까요?"
"엠제이, 잘 내려오려고 올라가는 거 아닐까? 그리고 그 기억이 흐릿해야 또 다음 산을 오를 것이고... ..."
그렇게 한바탕 도봉산을 오르며 간만에 일출도 보고, 도봉산 명물 호떡도 내려오며 하나 사먹고, 리먼 브라더스의 슬픈 추억이 담겨있던 도봉산에 이제 새로운 추억 하나를 심어두고 왔다. 내년 봄 빅 브로와 다시 한 번 오르기로 하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