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속성과 민주주의의 본질
정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인류는 이 물음에 답하고 그 답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려왔다. 지금도 우리는 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정치는 가족과 가장 친한 친구와도 이야기를 꺼내기가 껄끄러운 주제다. 정치 뉴스는 저녁을 먹는 황금 시간대에 송출되고, 실시간 검색어의 메인 대부분은 정치적인 이슈가 차지한다. 뉴스를 보면 정치인들은 매일 싸우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데, 우리는 왜 정치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걸까.
정치 제도의 종류와 그를 뒷받침하는 정치 철학은 수없이 많다.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적인 이념과 철학을 전개해 왔다. 이는 현재의 정치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 철학은 형태도 다양하고 차이점도 많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정치는 다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가 전제로서 성립되지 않으면 정치를 어떤 방식으로 정의하던 그 의미가 퇴색된다.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은 정치를 할 수가 없다. 최소 셋 이상이 되어야 개인 간의 관계에서 벗어나 공동체가 구성될 수 있다. 정치를 어떤 식으로 정의하건 간에, 그 이전에 모두가 동의하는 출발점은 정치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구성되면 그 집단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선택을 어디까지 제약해야 하는지 딜레마에 맞닥뜨리게 된다.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만 행동한다면 그 집단은 존재할 수 없다. 공통점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개인의 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를 일부 포기하고 자신의 선택과 의지를 집단에 양도해야 한다. 그래야 집단의 의사 결정이 방향성과 속도, 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 개인은 자유를 포기하는 대가로 집단이 제공하는 안전과 보호, 사회적 관계와 도움, 물질적 이익, 직간접적인 인프라를 제공받을 수 있다. 물질적 이익이나 사회적 지위, 명예 같은 유무형의 유인 동기가 없다면 개인들은 집단에 충성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공동체는 그 대가로 구성원들에게 자원을 합리적으로 분배해야 하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의 목적 첫 번째는 분배다.
공동체는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도 해결해야 한다. 인간 개개인이 물질적ㆍ 인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추구하여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합리적 존재라고 본다면, 한정된 자원을 두고 개인 간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각자 주어진 사회적 지위와 입장, 경제적 이해관계, 욕망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따라서 개인은 항상 타인과 갈등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존재라서, 양보와 타협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끝은 폭력으로 점철될 것이다. 사소한 다툼이라도, 갈등이 집단의 문제와 엮이게 되면 언제든지 폭력으로 비화될 수 있다. 대부분의 폭력은 물질적 이해관계가 걸린 집단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집단 간 갈등이 더 커지지 않도록 모두가 납득할 만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집단의 기준은 누가 세우는 것이며, 어떤 형태로 만들어질까. 사실 인류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서열과 힘의 우위에 기반한 수직적 위계구조를 따른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 사회 역시 전형적인 약육강식과 서열 논리에 따른 정치 체제를 이뤄 왔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표면적으론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되었다지만, 어디까지나 제도의 영역에 국한된다. 서열을 칭하는 언어가 계급에서 계층으로 바뀌었고, 서열의 기준이 혈통적 고결함에서 돈과 직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불평등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또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과거에는 피지배층의 갈등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권력은 가장 약자인 노예와 천민을 착취하거나 희생시켜 사회를 유지해왔다. 또는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이 일어나고서야 최초로 그 기만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깨달음을 제도화한 것이 바로 현대의 민주주의다. 인류는 어떻게 권력자들의 기만을 깨닫게 되었었으며, 그게 민주주의와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 관련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는 권력의 속성에 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견해들이 나온다. 세 명의 캐릭터는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권력의 본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등장인물의 지적 수준에 따라 권력의 정의가 달라지고 역사적으로도 비슷한 유형의 권력자들이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Power is power.” (힘이 곧 권력이다.)
권력을 바라보는 첫 번째 시각은 독재자와 폭군들이 생각하는 권력의 정의다. 왕좌의 게임에서 뇌까지 근육으로 차서 왕비 귀싸대기부터 날려대는 왕과 나중에 왕이 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왕비 서세이와 아들 조프리까지 개노답 삼 형제, 아니 개노답 가족을 대표해 왕비 서세이가 한 말이다. 폭력과 공포로부터 권력이 나온다고 믿는 권력자들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비슷한 유형의 독재자들이 명언도 많이 남겨 놓으셨다.
‘좋은 주먹 두고 왜 말로 하냐’
‘미친 개는 매가 약이다’
‘칼이 곧 힘이다.’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대개 눈에 보이는 현상이 곧 진실이라고 믿는 유형의 인간들, 단순 무식하고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가는 인간 군상들이 권력에 대해 이런 관점을 취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권력은 폭력과 압도적인 물리력의 우위를 통해 상대를 제압하거나 그에 걸맞은 위협을 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들은 강함을 동경한다. 중세 유럽의 많은 가문과 왕들이 가문의 문양에 맹수의 왕인 사자를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권력자들이 가장 빨리 권력을 잃거나 죽임을 당한다. 본인들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했기도 하고, 권력을 얻고 나선 명분과 정당성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폭력을 통해 대중을 지배하지만 폭력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두려움은 증오를 낳는다. 증오에 빠지면 사람들은 뭉치고, 뭉치면 힘이 생기기 때문에 적절한 계기만 주어져도 권력은 쉽게 전복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권력자 유형이 이런 사람들이다.
"Knowledge is power." (아는 것이 힘이다.)
왕좌의 게임에서 정보와 재력, 음모로 권력을 얻은 재무장관 리틀 핑거가 한 말이다. 앞선 유형의 인간들보다 훨씬 영리하고 무서운 인간들은 권력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들은 자본이나 정보의 우위에서 권력이 나온다고 본다. 출세지향적이거나 성공에 목마른 사람들, 권력을 통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이 이런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권력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정보와 자원, 기타 요건들의 우위는 지속되기가 힘들고 항상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경쟁자는 항상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음모와 재력의 우위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자들, 마키아벨리적인 관점을 취하는 권력자들 역시 권력을 그리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리틀 핑거 역시 한 번의 판단 미스로 권력을 잃고 죽임을 당한다. 진정 권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Power resides where men believe it resides" (권력은 권력이 존재한다고 믿는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얼핏 보면 말장난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 명제야말로 인류 역사 내내 존재했지만 오직 극소수의 권력자만 이해하고 있었던 권력의 본질이다. 앞선 두 부류는 권력에 필요한 수단인 폭력과 정보의 우위를 권력 그 자체라고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폭력과 공포, 정보와 자원의 우위 없이도 얼마든지 행사될 수 있다. 사람들은 돈이 많거나 혈통이 고귀하다고 복종하지 않는다. 권력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권력의 지배를 받는 자가 권력자의 권력행사를 인정해야 한다. 그때 진정한 권력이 발생한다. 권력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권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민중이 권력자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그 순간에, 권력자는 권력을 잃게 된다. 권력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권력이 있기에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받기에 권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배받기를 거부하는 순간, 지배자는 권력을 잃게 된다. 민주주의는 이 단순하지만 무서운 진실을 깨달았기에 존재한다. 한 국가의 정치 수준 또한 국민들이 이 명제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국민의 수준이 정치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서구 문화권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르네상스 이후 근대에 접어들며 퍼진 계몽주의 사상은 인간에게 누구나 생명, 자유, 소유물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인 자연권이 있다는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로크의 자연권은 군주가 신으로부터 양도받은 권력의 정당성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왕이라 해도 정해진 법에 따라 정당한 권력을 사용해야 하며, 왕이 이를 어길 시 시민들이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 개념이 탄생했다. 국민이 왕을 교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자각으로, 그 권리가 권력의 근원에 대한 깨달음으로, 다시 그 깨달음이 제도로 정착되는 단계를 거쳤기에 서구에서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기 몇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제도를 가진 국가라 해도 독재나 부정부패로 실효성이 없는 국가가 대부분이다. 언론의 자유도와 부정부패, 정당 간의 견제와 균형, 삼권분립 측면에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는 하위권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만이 대통령을 탄핵시킨 사례가 있어 주변 국가들을 놀라게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사상적 출발점인 계몽주의는 왜 서구에서만 나타난 걸까. 그 이유는 서구 문명의 정신적 뿌리인 고래 그리스의 지리적 특수성에 있다. 동양과 서양의 지리적 환경 차이는 동양의 공동체 문화와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를 잉태했다. 서구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은 개인주의 문화를 탄생시켰고, 개인주의 문화는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있는 정신적 토양이 되어주었다. 반면 동양의 공동체 문화는 민주주의가 자랄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이 되어주지 못했다.
물론 문화적, 지리적 차이가 전부는 아니다. 역사적 요안, 경제적인 배경, 우연을 빼놓고 정치 제도의 차이를 단순화하기엔 무리가 많다. 하지만 심리학자 리처드 나스벳은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과 서양은 자연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사회 구조, 교육 방식도 달라지며, 이로 인해 다른 사고방식과 지각 방식을 지니게 된다고 말한다. 나스벳의 말대로라면, 서로 다른 가치관과 문화적 차이가 상이한 정치 체제를 만들었고, 그 시작은 지리적 환경의 차이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양과 서양은 '정치'라는 말의 어원에서부터 뚜렷한 차이가 난다. 우선 동양부터 알아보자.
동양 문화권의 뿌리는 중국의 농경 문명, 즉 황화 문명에서 출발한다. 황화강 근처 드넓은 평지에서 벼농사를 짓던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건 상부상조의 협력이었다. 농사에는 정해진 시기라는 게 있다. 그 짧은 시기에 할 일이 많기에 정말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삶의 방식과 공동체주의가 발달했다. 또 농사를 위한 도량형과 치수의 통일,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가 필요해지자, 황제가 종교적 제의를 전담했다. 그 결과 황제는 하늘의 대리인으로서 숭배되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정치의 어원에서도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政(정사 정/칠 정. 정사, 조세, 법규) 治(다스릴 치)
농경ㆍ한자 문화권에서 정치의 의미는 황제가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세금을 부과한다는 뜻이다. 어원을 살펴보면, 政(정사 정) 자는 政(칠 복) 자와 正(바를 정)으로 나뉜다. 황제가 옳고 그름을 구별하여 그릇된 자를 처벌한다는 뜻이다.
治 (다스릴 치) 자는 氵(3획자 부수)와 台(별 태) 자로 나뉜다. 하늘에 떠 있는 별, 황제가 다스린다는 의미다. 권력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며, 하늘의 대리인인 황제가 법과 채찍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이 농경 문명에서 정의하는 정치의 사전적 정의다.
서양이 정의하는 정치의 뜻은 동양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영어로 정치를 뜻하는 단어는 'Politics'다. Politics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로 도시 국가를 뜻하는 Polis에서 나왔다. 서양 문명권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에는 조그만 섬들의 언덕을 따라 소규모 도시국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지중해 바다에서 어업과 상업에 종사했다.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필요한 건 화폐의 통일과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폴리스의 시민들은 바다를 오가며 다양한 국가와 문화의 사람들을 만났고,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발전시켰다.
개별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된 폴리스에서 중앙 집권적 정치 구조와 권력의 독점은 일어나기 힘들다. 개인주의와 평등한 인식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농경 문화권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인들에게 정치란 개인들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위한 합의의 수단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테네 인들은 공적인 사안은 직접 투표로 결정하고 문제 있는 정치인은 쫓아내기 위해 꺠진 도자기 조각으로 투표를 진행했다. 교과서에서 나오는 도편 추방제란 말을 들어 본 적 있을 거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뽑는 이유다. 서양 문화권에서 정치란 공적인 주제를 다 같이 투표로 결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과 서양은 정치를 정의하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동양은 집단의 관점으로 정치에 접근하지만 서양은 개인의 관점으로 정치를 바라본다. 흥미로운 점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법에 있어서도 개인과 집단 해결법의 차이가 어느 곳에서나 발견된다는 점이다. 개인주의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성, 종교, 교육, 양심 등을 통해 사회적 불의가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집단적 해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을 받아들이며, 개인의 양심과 교육으로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무지, 경제적 이해관계의 입장 차이로 집단 간의 갈등과 대립, 불평등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적 관점에서는 정당한 강제력을 행사하여 갈등을 통제하고 죄를 처벌할 수 있는 힘과 그 힘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 즉 국가의 권력 행사가 정당화된다. 사회 문제의 해결법으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제시하는 두 집단은 진보와 보수로 대응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아볼 것이다.
우선 개인주의적 시각을 살펴보자. 인간이 선하고 합리적인 존재라 믿는 지식인과 종교인들은 개인이 이성과 양심을 발휘하여 사회적 불의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충동과 무지, 맹목적 자기 이익 추구 성향은 이성과 양심을 회복함으로써 근절될 수 있다. 교육과 종교는 인간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고 사회적 선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며, 개인들을 교화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개인주의적 관점이다.
그러나 집단적 시각에서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선한 존재라고 보지 않는다. 라인홀트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은 다르며, 선한 개인도 집단 속에서 얼마든지 비도덕적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인의 양심과 인간에 대한 연민, 이성을 통해 이기심과 충동을 자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종교와 교육을 통한 인간의 교화는 가능하다. 개인의 양심과 이성도 선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의 문제에 관해서 개인의 선은 언제나 무력하다. 개인이 집단에 속하면 익명성 속에서 보호받기에, 개인의 이기심과 충동적 성향은 집단 속에서 확대되고 증폭된다. 사회적 관계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좌우되며, 사회적 갈등은 오직 힘의 우열에 따른 강제력의 실현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선의지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정치만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집단주의적 관점이다.
나 역시도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를 통해 실현된 평화 역시 이해집단 간의 갈등이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균형 상태에 놓여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권력자들은 제도와 법, 교육 등의 사회 시스템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를 바란다. 그들의 정치적 구호와 담론 또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의를 정당화하는 도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치가 경제력에 종속되어 감에 따라, 정치적 담론조차도 경제논리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 이해관계가 배제된 순수한 정치적 논의란 불가능하며, 사회는 언제나 불안정하고 항구적인 갈등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는 정치를 통해서도, 아니 정치를 통해서만 제한되고 잠정적인 선을 실현할 수 있을 뿐이다.
정치적 논의는 결국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일과 그 자원을 배분해야 하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도덕이란 결국 가치 있는 자원을 어떤 식으로 배분해야 옳은지 따지는 것이다. 정치는 그 도덕적 딜레마를 합의를 거쳐 결정하는 곳이다. 분배의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도덕이 무너지면 정치가 무너지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영역에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옳은지를 설득하는 두 집단이 바로 보수와 진보다. 우리는 분배의 정의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그 입장이 왜 옳다고 믿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 시작은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차이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그 기원을 찾아 200만 년 전 사바나 초원으로 되돌아가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