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자의 도덕 매트릭스

배려와 피해, 자유와 억압, 공정과 불공정

by 교양이



도덕 매트릭스



앞 장에서 성격과 호르몬의 차이가 어떻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만들어내는지 알아보았다. 뇌 구조와 신경 전달 시스템이 달라지면 세상을 인식하는 무의식적인 세계관의 차이을 만들어 낸다. 개인의 독자적인 신념이나 생각을 구성하는 인식의 주형이 달라지는 것이다. 지각 방식부터가 달라 지니 의식에서 받아들이는 정보의 범위와 그 해석조차도 달라진다.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입장이 평행성을 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안보, 낙태, 사형, 동성애, 복지, 경제 등의 이슈에 대해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일관되게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를 다르게 생각해 보면, 옳고 그름의 기준, 즉 도덕 기반(매트릭스)이 달라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정의하는 도덕 기반이 다르면,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서로의 주장과 근거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당연히 반감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첨예한 논쟁과 이슈는 정치적으로도 쟁점화되어 갈등이 증폭된다. 이번 장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어떤 도덕 프레임을 가지고 있고, 정치적으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아본다.


도덕 매트릭스에는 6가지가 있다. 배려/피해, 자유/억압, 공정/불공정, 권위/전복, 충성/배신, 고귀함/추함이 그것이다. 6가지 매트릭스는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사람마다 주로 사용하는 도덕 매트릭스가 다르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주로 이용하는 도덕 매트릭스가 다 다르다. 그래서 고귀함/추함 매트릭스를 주로 사용하는 국가는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종교 국가가 되고, 권위/전복이 주를 이루는 사회는 권위적이고 서열이 엄격한 사회가 된다.


보수는 주로 권위/전복, 충성/배신, 고귀함/추함, 자유/억압, 공정/불공정 등을 주로 사용하지만, 진보주의자는 배려/피해, 공정/불공정, 자유/억압 세 가지를 주로 사용한다. 공정과 자유 매트릭스는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 사용하지만,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는 공정과 자유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한다. 진보주의자의 도덕 기반은 개인주의적이고 개방적인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보수주의자의 도덕 기반은 집단 중심적인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공정과 자유의 문제는 보수와 진보 간에 가장 치열한 논쟁 주제가 된다.




배려와 피해



진보주의자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개인 간의 수평적인 관계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에 도덕의 기준이 느슨해진다. 진보주의자에게 도덕이란 독립적인 개인들끼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서 집단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관계망에 있는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사회적 관습에 어긋나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이라고 해도 허용된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이 생닭과 성행위한 존의 행동을 보고 비도덕적이라 말하지 못한 것이다. 진보주의자는 감정보다는 논리적 추론을 통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린다. 진보의 도덕적 신념은 존 스튜어트 밀의『자유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개인의 자유를 신봉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자유론』은 성서 같은 책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어야 한다.’ 『자유론』의 핵심 주장이다. 이 문장에는 진보주의자들의 개별적 세계관에 입각해 형성된 도덕의 핵심 전제, 피해의 원칙과 자율성의 원리가 담겨 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떤 행동이든, 어떻게 보이든 간에 개인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과 의견을 드러내면서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도덕의 정의다. 심플하지 않은가.


피해의 원칙은 단순한 만큼 도덕적인 결정을 내릴 때 강한 영향을 미친다. 『바른 마음』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는 이를 배려와 피해 기반으로 정의하며, 수렵채집 시대의 인류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고통과 불행에 빠진 사람을 돌보려는 도전에 직면해 적응한 심리라고 말한다. 현대의 배려/피해 기반은 약자, 소수자, 가난한 사람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정치적 신념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배려/피해 기반은 진보주의자의 공정과 자유 매트릭스와 상호작용하여, 평등, 인권, 복지 같은 이슈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을 결정한다.


하지만 배려/피해 매트릭스가 도덕적 판단에 끼치는 영향력이 큰 만큼, 인지 오류의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 경제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는 권력과 불평등의 피해자기 때문에, 무조건 배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게다가 진보주의자들은 배려/피해 매트릭스 덕분에 약자들이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약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보주의자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배려와 피해 메커니즘은 강한만큼 그 뿌리도 깊다. 파충류는 자식에게 거의 투자하지 않지만, 포유류는 소수의 자식을 낳고 돌봄으로써 진화적으로 성공했다. 그래서 포유류는 연약한 새끼의 필요와 감정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인 공감 능력을 발전시켰다. 인간의 경우에 공감능력은 자기 자식을 돌봐야 하는 여성에게 더 발달했지만, 인간은 부족 사회에서 공동 육아를 했기 때문에 배려와 피해 기반은 인간 모두에게 발달했다. 비록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나와 유전자를 일부 공유하는 친족이 살아남는 것이 나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친족의 범위는 모호하고 구별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연약한 아기, 무력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마음은 인간 모두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배려/피해 기반은 널리 지지받고 있는 애착 이론에 기반해 고안된 것이다. 우리에게 무력한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고,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인간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만큼 배려/피해 기반의 원형적 심리가 너무 강력해서 저항할 수가 없는데, 그게 바로 귀여움이라는 감정이다. 조그맣고 통통한 볼따구를 가진 아기가 곰인형을 껴안고 새근새근 자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귀여운 캐릭터는 항상 아기와 같이 조그맣고 연약하며 동글동글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보통 작고 소중한 뽀시래기들을 귀엽다고 느끼지, 보통 마동석이 귀엽다고 느끼지 않는다. 아기를 보고 느끼는 사랑스러운 감정은 너무 강력하기에, 우리는 강아지, 고양이, 인형, 심지어 북극곰 새끼까지 귀엽다고 느끼고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북극곰 새끼가 다 자라면 사람을 반으로 찢을 수 있는데도.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는 일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얼핏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공감능력과 이타심이 높은 사람들은 부족의 다른 사람들을 잘 챙기고 보살핌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을 것이다. 한정된 에너지를 자식보다 남에게 낭비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손해였지만, 많은 이들이 이타주의자들을 필요로 함으로써 그들은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유전자는 여전히 살아남아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고 약자를 보살피면서 세상을 더 따듯한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경제 논리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도 당연하게 여기는 대한민국 사회지만, 배려심과 연민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어서 한국 사회가 아직 괴물이 되지 않은 걸 지도 모른다.


배려와 피해 기반은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바로 친화성이다. 친화성이 높은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하는 거울 뉴런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들이다. 거울 뉴런 덕분에 우리는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고, 문지방에 발을 찧은 사람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고, 타인의 가난을 무시하지 못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친화성이 높은 사람들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쉽게 믿고, 도움을 주기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배려와 피해 기반이 발달한 사람들은 약자의 고통과 불행에 유난히 더 민감하게 느끼고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흔히 우리가 ‘인싸’라고 부르는 사람, 자신의 화려한 인생을 보여주기 위해 인스타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 블라인드에서 억대 연봉을 자랑하는 사람은 사실 친화성이 아니라 외향성이 높은 사람이다. 반대로 아무 이익과 관심을 얻지 못해도 봉사활동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진짜로 친화성이 높은 사람이다. 배려와 연민이라는 가치를 꼭 정치 성향과 엮지 않더라도, 그들의 삶에 담긴 공감과 연민 정신은 우리가 꼭 지키고 보살펴야 할 것들이다.




공정과 불공정



진보의 다음 도덕 매트릭스는 공정과 불공정이다. 공정은 지금도 중요한 문제지만, 인류가 협력의 대가로 받는 보상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과거엔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인간은 공정 문제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받았다고 느끼면 분노한다. 서열이 하락했다는 암시이자, 지위가 낮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정 문제는 계층과 문화, 세대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나 민감한 문제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화약고와도 같은 문제다. 청년들은 뉴스에서 흔히 나오는 정치인들의 부정 청탁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남녀를 막론하고 청년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문재인 정권에게 청년들이 돌아선 이유도 진보 정권도 공정하지 않다고 실망해서다.


공정은 인간에게 유난히 중요하다. 침팬지가 사냥 후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을 지켜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침팬지는 인간처럼 체계적으로 협력하지 않고, 운 좋게 사냥감을 낚아챈 녀석이 전리품을 독차지하려 한다. 다른 녀석들은 주변을 맴돌며 구걸하거나, 귀찮게 하며 한 입이라도 얻어먹으려 애쓴다. 대형 영장류는 자신이 받은 보상의 질에 따라 반응하지만, 인간 아이는 자신이 받은 보상을 주변 친구들의 것과 비교하며 화를 내거나 기뻐한다. 공정성의 감각은 질이나 양이 아니라 사회적 비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자기가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 필연적으로 서열과 지위 체계가 생겨난다. 무리 생활을 하는 짐승들이 서열 싸움을 통해 지위를 정하고 무리 사회 속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인간도 서열 사회를 이루며 살아간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진보주의자라면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근본적인 면에서 인간과 사회를 유지하는 방식은 동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이 문명화되고 나서 우리는 서열을 사회적 지위라는 말로 고상하게 표현할 뿐이다. 여전히 인간사의 모든 것들이 서열 질서에 맞추어 굴러가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고, 나름대로 만족하고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다만 인간과 동물이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에게는 평판과 소문이 유난히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면 평판이 필요하다. 어차피 인간의 능력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평판은 다른 개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악의적인 소문, 가십, 험담은 평판을 급작스럽게 떨어트릴 수 있다. 질투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소문과 험담을 퍼트려서 경쟁자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평판을 떨어트리기 위해 악성 댓글을 달기도 하고, 자신의 평판은 높이기 위해 선하고 도덕적인 체한다. 우리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엄청난 신경을 쓰며 평판을 관리하고, 다른 이들의 평판에도 관심을 가진다. 우리가 연예 뉴스, 찌라시, 열애설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물론 다른 종들도 경쟁할 때의 이익과 비용을 저울질하기 위해 다른 개체의 사회적 행동을 유의 깊게 관찰하지만, 인간은 사건을 직접 관찰하지 않고도 언어를 통해 사회적 정보를 효과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다. 또한, 음성 언어를 사용할 수 있기에 평판을 주고받는 관객의 규모와 파급력은 훨씬 커진다. 그래서 평판은 사회적 성공과 지위, 번식 유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된다. 좋은 평판을 얻어야 좋은 협력 파트너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고, 사회적 지위를 높여 우선적으로 자원을 배분받을 수 있다.


동료들에게 좋은 평판을 심어주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정직하고 신뢰할만하다는 인상과 함께, 이용해먹기에는 만만치 않다는 인상도 같이 심어주어야 한다. 무조건 협력하고 도움을 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사기꾼과 무임승차자에게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이 만만해 보이는 이유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협력의 대가로 보상을 받되, 착취는 당하지 않는 것이다. 게임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최선의 전략은 협력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배신할 경우 되갚아 주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다.


이를 팃포탯 전략(Tit For Tat)이라 하는데,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가장 효과적이라고 밝혀진 협상 전략이다. 세계 평화가 유지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 냉전 시기, 핵무기의 압도적인 파괴력이 오히려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상호 확증 파괴(MAD) 이론이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지켜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총력전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안보 방향도 독침 전략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쉽게 말해, 중국, 러시아 같은 주변 강대국들에게, 니들을 이기지는 못해도 혼자 죽지는 않겠다. 그러니 건드리지 말아라, 그런 뜻이다.


우리의 공정성 감각에는 인과응보적 정신이 갖추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에 상응하는 법은 아주 옛날부터 존재했으며, 대중의 법 감정 역시 보복 심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의 이타주의 역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타주의에는 조건적인 사랑과 협력, 그리고 응징 심리와 미움이 뒤섞여 있다. 사랑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는 말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공정과 정의가 도덕적으로 소중한 가치라고 해도, 복수심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보수와 진보의 입장이 갈리는 지점이 응징 심리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주의자에게는 더 그렇다. 보수주의자는 자원을 확보하려는 원초적 욕망이 강하다. 그래서 정당한 보상 기준을 무너트리는 무임승차자를 경계하고 처벌하려는 심리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노력 없는 보상을 혐오하고, 복지 정책에 반대하고, 가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사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보수주의자가 생각하는 공정에는 능력주의가 따라붙는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만큼 돌려받아야 한다는 생각, 얼핏 보면 합리적으로 보인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상식이니까.


공정에 대한 욕구는, 청년들에게 가장 많이 드러난다. 2017년 탄핵 정국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에게 가장 많이 요구했던 것이 정의와 공정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때 여권의 정치인들과 고위층의 친인척 비리와 취업 청탁들이 빈번하게 일어나서 취업이 어려운 청년들에게 큰 좌절감과 분노로 다가왔을 테니까. 청년들은 다시 정의와 공정, 상식을 바로 세우겠다는 희망과 믿음을 문재인 후보에게 투영했고, 그 결과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문재인 후보의 당선에 큰 기여를 한 청년층은 정의와 상식을 바로 세운, 젊고 깨어있는 세대로 기억되었다.


그럼 당시 문재인 후보를 뽑았던 청년들은 정말로 순수하고 선한 의도에서 뽑아준 걸까? 정의와 공정이라는 순수한 가치를 위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 욕망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의도에서 표를 준 사람도 분명히 있을 테고,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 현상을 윤리로 이해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선악의 틀에 갇혀 본질을 보지 못하게 만드니까. 그다음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 세대론이다.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동일한 생각과 목적을 가진 집단으로 구분하는 생각. 선악의 문제와 세대론이 결합하면, 한 세대를 무리로 묶고 거기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려는 지적 게으름이 생겨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기가 싫을 때 하는 일이, 사물을 윤리와 집단의 문제로 환원해 바라보는 거다.


우선 나 역시도 청년이고 문재인 후보를 뽑았지만, 나나 혹은 다른 청년이 청년이라는 한 집단으로 묶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혹 그럴만한 일부 타당한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어떤 집단, 또는 세대에 도덕과 윤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게 청년이든, MZ 세대든, 586 세대든 간에 말이다. 청년들은, 오직 청년 개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청년들의 평균적 성향에 대해 세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만, 특정 세대는 시대의 생산자이자 부산물일 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단위체가 아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세대 갈등, 실체가 없단 소리다.


시대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세대를 바라보게 되면, 필히 그들을 유의미한 한 집단으로 묶고 일반화하려는 충동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생겨나는 게 철없는 20대가 나라를 망친다는 한탄이나, 586 운동권 세대가 나라를 망치거나 혹은 구했다는 집단 편향이다. 군사 정권에 맞섰던 운동권이 모두 본성에서부터 정의로운 청년이었던 건 아니었으며, 정권 교체를 이끌었던 현재의 청년이라고 더 의로운 것도 아니다. 그들 모두는 시대의 불의에 내던져진 채 때로는 자신을 속이거나 때로는 욕망에 충실했던, 불완전한 낱개의 인간들에 불과했다.


인간은 개인으로 바라봐야 그 존재의 욕망과 위선을 직시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한 공동체에 선악을 적용하는 부족주의에 빠지게 된다. 반면 진화심리학의 눈으로 인간 존재를 직시하면, 헛된 기대에 빠지지 않는다. 도덕적 환상에 빠지지 않고, 나와 다른 사람을 혐오하지 않고, 나와 남을 더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을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청년들의 어른들도, 지금의 청년들도 경쟁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태어나고, 경쟁에 걸맞게 자라오고 배워왔다. 그들 모두는 시대정신에 맞추어 최선의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뿐이다. 사실, 청년이기 이전에 개인이 먼저다. 그러니 청년을 하나로 정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공정과 정의, 그리고 청년



나는 어릴 적에 얼음땡, 경찰과 도둑 같은 술래잡기 놀이를 자주 했다. 그런데 게임을 하던 친구들 중엔 깍두기라는 존재도 있었다. 왜 깍두기라 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몸이 불편하거나, 너무 어려 같이 놀기 애매한 동생들을 깍두기라 부르고 그들까지 같이 끼워서 놀았다. 라떼에는 놀이터가 만남의 장이었고, 거기선 누구나 다 친구였기 때문이다. 깍두기들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지만, 우리는 그들도 게임에 끼워주고 모든 게임의 룰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주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다 같이 노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게임에 참여할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같이 논 그 아이들은 특혜를 받은 것일까? 모두가 똑같은 룰에 따르지 않았으니 우리의 놀이는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었을까? 모르겠다. 어릴 적엔 몸이 불편한 친구나 좀 떨어지는 애들도 같이 끼워서 노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걸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약자를 배려하는 애민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은, 아마도 평등과 배려에 대한 원초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내재돼 있어 다 같이 노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든 한 가지는 안다. 어른들이 우리를 보고 공정하지 않다고 호통치기보다는 잘했다고 칭찬했을 거라는 사실을.


그런데 지금은 공정의 의미가 달라졌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깍두기가 낀 게임은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다. 깍두기들은 게임의 룰에 따를 능력이 없기에 게임에 참가해선 안 된다. 우리가 깍두기들을 배려했던 건 모두가 동등한 기회와 출발점을 물려받는다는 공정의 원칙을 어긴 것에 불과했다. 한국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은 공정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약자를 우선 배려하는 게 공정이라는 의미에서, 모두가 같은 기회를 받으면 그 이후부턴 능력에 따라 돌려받는 게 공정하다는 의미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어느 순간부터 보수주의적인 가치관이 청년들에게 스며든 데 있다. 그 스며듦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공정의 사전적 정의는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뜻이다. 공평과 공정의 차이에 관해 국립국어원이 답변한 내용을 보면, 공정은 공평과 달리 옳고 그르다는 윤리적 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윤리적 판단은 주관적이다. 그래서 공정의 의미도 과거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졌다. 전통적인 공정의 의미는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줌과 동시에 결과적 평등을 위해 어느 정도 노력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출발점이 다르고, 개인의 차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지나치면, 그것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는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깍두기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오늘날 청년들은 기회는 모두에게 동일해야 한다고 본다. 기회의 균등 자체가 공정이다. 그 밖의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게 바로 한국의 교육이고, 시험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신분 상승의 토대가 바로 교육이었다. 골수 좌파라면 교육 제도는 자본주의적 노예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갈하겠지만, 굳이 그렇게 비현실적이고 좌파적인 언어를 쓰지 않아도 교육이 취업을 위한 등용문이 되는 건 상식적인 일이다. 성인이 되면 자기 밥벌이는 당연히 자기가 해야 한다. 일을 하기 위해 대학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기술을 배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상적인 교육이라 하면 학생이 자신의 적성을 찾고 사회성을 기르도록 도와주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먹고살 수 있도록 필요한 능력을 기르는데 대학교육이 집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취업시장의 선택을 받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 없다.


문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거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시까지 10년 이상, 대학교에서 다시 4년, 취업 준비에 2년, 최소 15년가량을 미친 듯이 공부해 가면서 얻을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 대기업에 들어가는 거다. 많은 연봉을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보이기 위해. 그 목표를 위해 인생에서 가장 찬란이 빛나야 할 시기에, 혼란과 설렘, 열정으로 들뜰 청소년기에 한국의 학생들은 도서관과 학원, 학교 뺑뺑이를 돈다.


생리적으로 청소년기는 인지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야 하는 시기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은 학교와 학원, 참고서가 세상의 전부라 그 경계 밖을 넘어서지 못한다. 경험한 만큼만 나 자신인데, 그 경험치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고 한쪽에만 매몰되어 있다. 그렇게 20년 넘도록 학교와 학원 밖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니, 청년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와도 세상도 시험처럼 정답과 기준이 명확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그 기준만 명확하면, 공정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5가지 단계로 규정하며 그중 가장 고차원적이고 본원적인 욕구가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특히 청소년은 내가 누구인지, 뭘 좋아하는지 찾아 나서는 모험을 해야 한다. 그걸 하라고 몸과 마음이 바뀌는 게 사춘기다. 부모와 사회의 권위에 반항하라고 바뀌는 거다. 그래야 도전할 수 있으니까. 사실 20년간 한 번도 반항하지 않고 일탈이 없는 게 비정상적인 건데, 우리나라는 그걸 착하고 성실하다고 한다.


새롭고 낯선 길을 나서면 두려운 게 당연하다. 도전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와 고난을 통해 단단해지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내가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 행복한지, 그 행복을 위해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는지 알려면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도전하고, 무엇보다 실패를 겪어봐야 한다. 한국의 교육은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원초적인 욕망, 자아실현의 욕구를 도와주기보다는 억압해 왔다.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부모와 학교, 사회가 그렇게 아이들을 속여 왔다. 사실 자기도 모르면서.


물리 법칙엔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평생 가꾸고 보듬어주어야 할 자아실현의 욕구가 시작부터 짓밟혔으니, 억눌러지고 분출되지 못한 욕망은 형태를 바꾸어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걸 심리학에서는 투사라고 한다. 사람이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내면에서 승화시켜 녹여내거나 외부로 내보내는 방법을 택한다. 가장 쉬운 방법이 외부로 배출하는 건데, 그 감정의 배설물이 원한이다. 원한은 증오라는 형태로 나타나 주로 나보다 못나고 약한 대상을 향해 날을 세우게 된다. 인간이 서열 사회에서 진화한 탓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열등감과 무너진 자존감을 보상받으려 한다. 그 날이 사실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원한은 가장 강력한 감정이다. 아무리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도 고립된 채로 충분히 고통받게 되면, 그리고 그에게 총 한 자루만 쥐어준다면, 모르는 사람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테러범이 될 수 있다. 누구도 원한이라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무시받고 소외된 사람에게선 더 강하게 나타난다.(국가가 그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한국 복지 제도는 그런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니체가 사람들을 원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자기 철학의 목적이라고 한 것 또한, 자기 내면의 원한을 철저히 응시한 데서 나온 통찰이다.


물론 청년들의 반작용적 심리가 원한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그저 보상심리라고 할까. 언론과 매체는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혐오라고 너무 쉽게 단정 짓는다. 역시 지적 게으름이다. 사실 한국 사람들, 바보같이 착하다. 숨 막히는 경쟁 사회에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비교당하고, 앞만 보며 달리느라 세상을 보는 시야가 터널에 갇힌 것처럼 좁을 뿐, 남을 미워하는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러니 허구한 날 떠드는 혐오 타령,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이 피로 사회, 분노 사회인 건 맞지만 혐오 사회라는 진단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당한 분석과 근거를 동반하지 않고 혐오라는 말을 남용하는 자들을 의심해야 한다. 그 의도가 순수하진 않을 테니까. 언론에선 청년 세대가 혐오에 빠져들고 있다는 식의 기사를 내던데, 함부로 혐오라는 말을 갖다 쓰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사회 현상은 집단적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조직에 관해 평가하고자 한다면 그 평가를 조직 구성원에게도 일괄 적용하는 오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조직의 무능과 위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비판의 대상에 성역이란 없다. 한 개인이 그 조직을 위해 일한다면, 그 구성원 역시 조직의 잘못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때 비판을 받은 개인이 과도한 일반화라고 해봤자 그 말은 하나 마나 한 말이기에, 책임을 면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약 누가 언론의 무능과 거짓말을 비판했을 때, 적절한 반론 없이 언론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라는 말로 대응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혐오라는 언어가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고 정당한 비판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정당한 비판과 혐오는 다른 것이다. 나는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등 공익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혐오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본다. 정치인들은 오히려 정치혐오를 좋아한다. 국민이 정치를 포기하게 해 주니까. 정치뿐만 아니라 예술계, 문학계, 시민사회, 노동계 등 사회 전반에서 혐오라는 말이 남발되며 정당한 비판을 옭아매고, 역으로 비판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청년들도 혐오 프레임의 희생자라고 본다.


그 프레임의 밑밥 단계가 MZ 세대라는 말이다. 10대부터 40대까지를 MZ세대라 통칭하는 것도 웃긴데,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세대라고 이해하는 것도 코미디다. 문화적 영역에서는 그들을 개인주의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세대로 지칭하고, 정치권은 그들을 경제적 약자로 취급하며 연신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청년들에게 민감한 이슈로 갈등이 벌어지면 청년의 혐오가 어떻니 하는 기사가 쏟아진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갈등이 없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내가 사는 동네에는 폐기물 처리장 건설에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그럼 우리 동네 주민들은 산업폐기물 혐오자인가, 아니면 지역 이기주의 님비(NIMBY)의 산 증인들인가. 그렇다면 그 폐기물 처리장을 기자 양반의 동네에 짓겠다고 하면 기자 양반은 얼씨구나 좋겠다고 할 것인가.


나는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외계층인 청년을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청년이 왜 소외되었는지 그 구조적 원인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왜 많은 갈등 중에 청년들이 관련된 문제는 혐오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어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입에 착착 붙어서 그렇게 자주 쓰는 건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마도 정치인들은 청년을 궁휼히 여기는 그 어진 마음을 가진 자신이 좋은 것은 아닐까, 그 어진 마음씨만큼이나 청년들이 살아온 환경에는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그래서 세대 갈등은 없어지지 않을 수 있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년들이 더 이기적이거나 약자를 더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대정신이 다르기에 삶의 양식이 다른 것뿐. 지금의 청년들은 다른 세대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학업 경쟁을 겪으며 자라왔다. 건실한 회사에 취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면서도, SNS로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자연스럽다. 부모보다 더 가난할 것이 확실하고, 저성장과 양극화가 만들어 낸 비참한 결과를 사회에 진출하자마자 피부로 체감하는 첫 세대가 지금의 청년이다. 그래서 더 이상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지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정치를 향해서도 당장 눈에 보이고 체감할 수 있는 결과만을 원하게 된다.


그 이면에는 보상심리가 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청년들은 행동에 대한 보상을 즉각적으로 받기를 원하도록 학습되었다. 청년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내신, 자격증, 수능 같이 규격화되고 답이 정해진 시험을 치르며 보냈다. 시험은 노력하는 만큼 점수로 돌려받고, 항상 답이 명확한 영역이다. 학교의 내신 시험, 학원 시험, 모의고사, 수능, 토익, 자격증, 학점 등 시험에 둘러싸여 지냈으니 인생을 살아가는 다른 방식과 관점이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 행동에 따른 보상이 반복되면, 쥐나 개의 뇌는 특정 행동으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생성해내서 자동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청년들 역시 눈에 보이는 보상만을 원하도록 학습되었다.


10년 넘게 시험을 치러낸 노력의 최종 결과물이 대기업 취업이고, 그 보상이 연봉이다. 심리적으로도 보상심리가 생겨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학력에 대한 우월감, 정규직으로 입사해 남들이 알만한 회사에 취업했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다. 대학생들이 많이 쓰는 앱 에타와 직장인들이 많이 쓰는 앱 블라인드를 보면 그 특징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블라인드에는 회사의 복지와 연봉을 서로 비교하며 남을 부러워하거나, 부러움을 받고자 하는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 자체는 상식적이지만, 대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복지와 연봉에 대한 은근한 우월감, 대기업에 들어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선민의식 같은 게 보인다. 나는 그런 글을 읽으면 공부 잘하고 시험 잘 쳐서 좋은 학교에 들어간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삼는 인간들, 학력으로 남을 깔보며 권력을 쥔 엘리트 윗분들의 사고방식이 겹쳐 보인다. 그 밑바닥에는 자신이 해온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가 깔려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비정규직 이슈를 보면, 현재의 청년들에게서도 똑같은 심리가 보인다. 일한 만큼, 능력만큼 월급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상식이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업무에 아무런 차이가 없고, 비정규직이 오히려 경력과 능력에 있어서 더 나으며,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는데도 같은 시험을 치고 들어온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청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문재인 후보를 뽑으며 바랬던 공정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반대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근거로 부르짖는 공정의 동기가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안다. 공정과 역차별을 이유로 대며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정규직의 호소 그 기저에는, 너는 나와 같은 급이 될 수 없다는 귀족주의적 사고방식이 담겨 있다. 이미 대기업에서는 공채를 기준으로 성골과 진골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차별과 밀어주기가 일어나고 있다. 정규직 입사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역차별이며 ‘공정’ 하지 않다는 논리에는, 기성세대가 경제성장의 열매를 독차지하고 사다리를 걷어찼다며 ‘꼰대’라고 비판하는 꼰대들과 동일한 사고방식이 담겨 있다.


꼰대가 왜 꼰대인가? 꼰대의 육하원칙을 보면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지독한 권위주의, 서열주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함,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주의, 나만이 옳다는 독단주의가 총체화되어 세상에 현신한 존재가 꼰대다. 나는 그들에게서 젊은 꼰대의 탄생을 보았다. 사실은 정규직으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남과 나누기 싫으면서, 나는 비정규직보다 우위에 있다는 그 우월감이 사라지는 것이 싫으면서 그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는 민망하기에 공정이라는 멋있는 말에 숨는 비겁함이 그들에게 보였다. 차라리 내가 그동안 했던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고, 그래서 반대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얼마나 좋아.


입사 시험을 치르지 않은 채 정규직에 ‘무임승차’ 한다고 반대하는 이들은 그 이유를 공정이라 포장하지만, 그 속에는 꼰대와 동일하게 서열주의, 우월감, 권위주의가 깔려있는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전형적인 보수적 세계관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그들은 정의니 공정이니 하는 것들엔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이 폐지되고 나서 뒤따르는 것은 약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그 분위기가 윗분에게 유리하고 자신에게 불리할 거라는 걸 그들은 모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만이 세상 돌아가는 것의 전부거든. 정규직 전환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과정 전체가 작게는 사내 정치이고 크게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정치의 일부라는 것도, 미래의 자신에게 목줄을 죄고 있다는 것도 그들은 모를 거다.


비정규직 반대 시위처럼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청년들이 생각하는 공정의 의미도 결이 같다. 청년들이 생각하는 공정은 능력주의에 기반한 기회의 평등이다. 모두가 시험이라는 공정한 출발선에 설 수 있다면 공정하다는 식이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미국 청년들이 능력주의에 기반한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샌델은 능력주의는 사실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불리한 ‘주의’이며, 출발선은 동일한 위치가 아니고 결승점에 이르는 과정도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능력주의에 기반한 기회의 평등은 사실 전혀 공정하지 않다. 그걸 막기 위해, 출발선의 차이가 무한히 멀어지는 걸 막기 위해 약자 우대 정책이 존재한다. 그 최소한의 배려마저 사라지게 된다면, 다음으로 그 야만과 마주하는 건 청년들이 될 것이다. 그 원시적 야만에 노출되는 걸 막기 위해, 정치가 존재하는 거다. 남의 밥그릇을 빼앗아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받는 것이 아니고.




자유와 억압



자유는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 가장 좋아하는 가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려왔기에 우리는 자유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간다. 조상들에게 자유는 생존과 번식에 직결된 문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뺏기면 분노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대상과 맞서 싸운다. 하지만 인류는 아직도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한 듯 보인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도덕 매트릭스가 서로 다른 탓이다.


신자유주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등 자유라는 말이 포함된 정치 이론이 다양하다는 건 ‘자유’라는 개념이 범위가 너무 넓어 명료하지 않다는 걸 반증한다. 자유라는 말은 어디에나 쓰일 수 있다.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외부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자유의 뜻부터가 동어반복을 내포하고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자유'를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강남 사거리 한복판에서 똥을 쌀 자유, 모르는 사람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갈 자유, 라는 말도 지어낼 수 있다.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자유를 정의하는데 합의에 이르지 못한 건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합의에 이를 생각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보수와 진보 모두 자유라는 정치 구호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려 애쓴다. 한국의 보수는 자유를 종북 좌파와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지켜내야 할 신성한 가치이자 사익 추구의 권리로 이해한다. 반면 진보주의자에게 자유란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한 국민 모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의미한다.


보수와 진보가 자유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보수주의자는 자유/억압 기반을 권위/전복 기반과 항상 연결 지어 생각한다. 권위/전복 기반은 인간이 위계적 서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발달시킨 도덕적 마음이다. 인류학자 크리스토퍼 보엠은 동물학자 제인 구달과 함께한 침팬지 연구에서, 인간과 침팬지는 지배하고 복종하는 모습이 유독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챘다. 실제로 침팬지는 약 700만 년 전에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화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무리를 이뤄 엄격한 서열 사회를 이루고,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적대 부족을 학살하는 종 역시 인간과 침팬지가 유일하다.


인간의 서열적 본능은 짐바르도의 유명한 스탠퍼드 실험에서 알 수 있다. 짐바르도가 피실험자들을 무작위로 죄수와 간수로 나누고 자유를 부여하자, 간수 연기자들은 지배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고, 죄수 연기자들은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보상과 강제성이 없는데도 간수들의 가학적 행동은 점점 심해졌고, 심지어 실험을 관찰하는 짐바르도마저 자신이 역할극에 빠져들어 피실험자들을 번호로 부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실험은 중단되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보수주의자는 서열과 위계질서에 익숙하기 때문에 권위와 복종과 관련해서는 자유/억압 기반이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보수의 가장 큰 관심사인 이익 추구가 제한받을 때 자유를 위해 싸우거나, 내집단이 억압받거나 부당하게 대우받는다고 느낄 때 자유/억압 기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론 단순히 권위와 체제에 저항한다고, 그게 진보주의적 저항 정신의 예가 되는 건 아니다. 자유가 억압받는다는 건 생존이 걸려있는 중요한 문제기에, 보수와 진보 모두 힘을 합쳐 독재자에 싸우게 된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 투쟁 단체에는 보수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섞여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데올로기가 둘째 문제가 될 만큼, 인간에게 자유란 중요한 문제다.


반면 진보주의자의 자유/억압 기반은 독재자가 약자를 포함한 다수를 억압하고 착취할 때 맞서기 위해 배려/피해 기반과 함께 작동한다. 현대에도 독재자가 국민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데, 수렵채집 시절에 그들은 무리의 힘센 우두머리 수컷 같은 존재들이었다. 테스토스테론이 만드는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 남성은 신체적 위압과 권력 지향적인 성격을 활용하여 자원과 짝을 독차지했을 것이다. 이에 맞서 평범한 다수의 남성은 불만을 가졌지만 눈치만 보는 상태였고, 우두머리와 나머지 수컷들 간에 불편한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 균형을 깨는 게임처인저는 무기와 언어였다. 보엠은 선조들이 사냥과 도살 무기를 발전시키면서 균형의 판도가 깨졌을 거라고 본다. 실제로 고고학 기록을 보면, 약 50만 년 전 연장과 무기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때 무기를 만드는 기술이 보급되면서 지배자는 더 이상 맘대로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유/억압 기반이 발달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언어의 발달 때문이었다. 인간의 의사소통 능력이 발전하면서, 독재자에 대한 험담과 모함은 지배자의 평판을 떨어트리고 연합을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험담자는 동료들을 설득하는 수단으로 인간은 사실 모두 평등하다거나 자유라는 권리를 침해받으면 맞서 싸워야 한다는 논리로 주변을 설득해나갔다. 자유라는 가치는 권력자의 자리를 찬탈하거나 그를 내쫓는 훌륭한 선전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독재에 맞서 싸울 때 인권, 평등, 자유 같은 말이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크의 시민 저항권이 탄생한 것도 자유/억압에 대한 원형적 심리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지도자는 무리에서 쫓겨나거나 죽음을 당했기에, 독재자의 유전자는 멀리 퍼질 수 없었을 것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쿵!족이 독재자를 축출한 후 모두가 그의 몸에 평등하게 화살을 박아 넣는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세계에는 독재 정권과 자유주의 정치 체제가 공존하는 걸지도 모른다.


진보주의자는 자유와 압제 기반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마도 진보주의자의 강점인 언어 능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진보주의자에게 많이 분비되는 도파민은 광범위한 연상과 확산적 사고를 촉진시켜 언어적 유창성과 개방적인 성향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진보주의자들은 은유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으로 혁명의 필요성을 설득할 수 있었고, 그들의 언어적 유창성은 진화적으로 큰 이점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언어지능은 진보주의자에게 더 높게 나타난다. 또한 시인이나 작가에게서 개방성 수치가 높게 나타나고, 사람들에게 도파민을 투여하면 대의나 이상을 중요시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레닌 같은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선전ㆍ선동 능력이 뛰어났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진보주의자가 독재 정권에 맞설 때 사용하는 설득 도구로 가장 자주 사용되는 게 평등이라는 가치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자신도 동등한 지위로 올려주겠다는 유혹은 매력적이라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진보주의자도 분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자원에 대한 균등한 분배, 오늘날의 결과적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문화를 막론하고 가난한 사람이 불평등에 반대하고 복지 정책에 찬성하는 이유다.


진보주의자가 평등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피해 기반과 자유 기반이 같이 위협받을 때 맞서기 위해 사용하는 주된 이념적 도구로 평등적 가치를 활용한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는 평등을 주장하는 근거로 약자에 대한 폭력, 혐오, 억압이라는 말을 즐겨 쓰며 정치적 정당성을 얻는다. 진보는 억압에도 유난히 민감해서, 억압 기반이 활성화되었을 때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 자본가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는 공산주의, 여성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는 페미니즘, 가축을 잡아먹는 것에 반대하는 비건 주의 등. 모두 억압에 대한 반감과 배려/피해 기반이 결합돼서 사회적 구조개선을 주장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담론이 형성된 것이다.


프랑스혁명, 명예혁명, 독립 선언문 같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혁명들만 봐도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의 힘에 맞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 평등적 가치를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군주제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민주주의의 사상적 뿌리가 된 혁명들이다. 미국의 독립 선언문의 일부를 보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오랫동안에 걸친 학대와 착취가 변함없이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고 인민을 절대 전제 정치 밑에 예속시키려는 계획을 분명히 했을 때에는, 이와 같은 정부를 타도하고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 새로운 보호자를 마련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며 또한 의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지금까지 식민지가 견디어 온 고통이었고, 이제야 종래의 정부를 변혁해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독립선언문.jpg


미국의 독립선언서에서 보듯이, 평등과 인권, 자유 등 기본권적 가치를 침해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압제자인 대영제국의 악행에 맞서 저항한다는 명분이 동원되고 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하게 된 계기부터가 억압에 맞서 자유를 찾는 과정이었기에, 미국인들이 자유의 가치가 담긴 헌법을 그렇게 신성시하며 바꿀 생각을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가 일어나 20명이 사망했는데도, 헌법을 수정해 총기를 규제 하기보다 초등학교에 총을 든 가드를 더 고용하자고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무기를 소지할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에게 자유/억압 기반이 활성화되려면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이미 말했듯이 보수주의자는 서열과 권위를 당연시하기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 자체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이익 추구가 억압받을 때, 또는 내집단이 외집단에 착취당할 때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즉, 약자가 아니라 자신 또는 소속 집단의 배려/피해 기반이 위협받았을 때 그때서야 자유를 향한 의지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 또는 내 집단을 짓밟지 마라’가 된다.


우선, 보수에게 자유란 ‘내 이익과 욕망을 추구할 자유’를 의미한다. 진보 정권이 종부세, 법인세 등 세금을 인상한다고 해 보자. 보수 언론은 이를 ‘세금 폭탄’이라 표현할 것이다. 보수주의자가 세금 폭탄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익을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 정서가 환기된다. 이후 동기화된 추론을 거쳐,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세금에 대한 반대 입장이 결정되게 된다. 당연히 시스템 1에는 감정이 이성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세금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알아보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정치적 판단을 하게 된다. 세금 때문에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빼앗기는 것이 두려워, '내가 돈을 벌 자유'를 옹호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것이다.


반면 진보는 세금 인상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는데, 세금이 인상되면 국민 전체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는 세금에 대해서도 사회적 차원으로 접근하지만 보수는 개인적 욕망의 차원에서 세금을 바라본다. 보수가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이 열심히 일한 결실을 정부가 세금으로 빼앗아 게으르고 나약한 무임승차자들에게 공짜로 퍼준다는 인식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세금이 군인, 경찰, 소방관 등 공동체의 안위에 헌신하는 사람을 위해 쓰인다면 세금 인상에 찬성하겠다는 설문조사도 있다.


보수주의자들이 규제 강화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시장에 찬성하지만, 강한 정부는 싫어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시장을 세세하게 규제하고 기업을 감시하고 세금을 많이 물리기 때문이다.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애덤 스미스와 그의 저서 『국부론』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 ‘보이지 않는 손’에 열광하는 이유도 자유 시장의 장점을 쉽고 명확한 논리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시장이 왜곡되거나 실패할 수도 있다는 구절에는 애써 침묵하지만)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개인의 이기적인 이익 추구가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글을 써놓은 덕분에, 사익 추구의 권리는 제한받지 않고 당연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애덤 스미스의 핵심 주장은 곧 문제가 생기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시장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는 논리로 비약되었다. 덕분에 보수주의자는 자유시장을 정당화하는 설득 수단으로 경제학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사익을 추구하다 누군가 피해를 보더라도, 자유롭게 돈을 벌 권리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었다. 사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부자의 탐욕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제는 애덤 스미스 덕분에 부자들은 부유하기 때문에 사회에 기여한다는 풍조가 형성되었다.


문제는, 진보주의자의 자유+배려 매트릭스가 보수주의자의 자유 매트릭스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진보주의자에게 자유란 약자를 포함한 모두가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무분별한 이익 추구로 타인에게 피해가 발생하는 부정적인 외부 효과를 막기 위해 기업을 규제하고, 소득에 비례해 세금을 물려 부의 재분배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도출된다. 자연스럽게 사회적ㆍ구조적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강한 정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면 보수주의자에게 자유의 의미는 나의 이익 추구에 한정되어 있다. 그 어떤 것도 개인이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 세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를 빼앗아가는 것이다. 기업을 규제하고, 법인세를 인상하고, 해고를 어렵게 하고,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도 내가 이익을 추구할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친기업적인 정책을 지지한다. 정부가 할 일은 범죄와 폭력, 전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도로와 수도 같이 기본적인 인프라를 제공하는 데 한정되어야 한다. 그 밖의 일에 개입하면 자유시장이 야기할 효율성ㆍ생산성에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보수주의자는 작은 정부를 추구하게 되지만, 이는 경제적 문제에 한정된다. 국방비나 교도소를 확충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는 것은 찬성한다.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진보주의자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을 규제하고 세금을 인상하고, 사적 이익 추구에 불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꼬울 수밖에 없다. 또 진보주의자가 노동자ㆍ소비자ㆍ동물ㆍ환경ㆍ소수자 같이 보수주의자가 관심 없는 영역에까지 침투해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보수는 진보주의자들을 부모 잘 만나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혹은 선한 척을 하면서 흑심을 품는 위선자들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그런 진보주의자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선천적인 도덕성 자체가 다르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서로 다른 도덕 매트릭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세상을 인식하는 거리와 인식체계가 달라지게 된다.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에는 범위와 한계가 명확한데, 범위가 넓을수록 진보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범위가 좁을수록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다른 인식체계를 만들어 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다음 챕터에선 인지거리라는 시각적 모델을 통해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쉽게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하려 한다.

keyword
이전 13화진보의 개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