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유난히 공동체에 소속되려는 의지가 강하다. 우리는 자신의 집단이 옳다고 믿고, 자신과 집단을 동일시하는 등 집단 정체성을 지닌 채 태어난다. 자연은 공동체에 헌신하려는 개인들만 선택한 셈이다. 개인이 집단에 소속되어 얻는 이점은 엄청나게 많다. 우선 포식자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식량을 제공받을 수 있고, 짝을 찾고, 자식을 양육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공동체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공유하거나 배워서 자식을 가르칠 수도 있다. 무리 사회에서 배제된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집단 괴롭힘을 당한 사람의 뇌는 사회적 위협을 신체적 고통과 동일하게 받아들인다.
인간의 본성은 개인주의보단 집단주의가 더 익숙하기 때문에, 집단의 믿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편이 훨씬 쉽고 자연스럽다. 그래서 개인으로서 하지 않았을 미친 짓도, 무리의 일부가 되면 쉽게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심리학 연구는 서양의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Democratic) 문화권에 편중되어 있어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70억 인구 중 WEIRD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현재에도 대부분의 사회는 공동체주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민주주의가 제대로 성숙된 나라는 일부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을 필요로 하기에 공동체 문화권과 조화를 이루기 힘든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와 남미 대륙, 이슬람 문화권 등 대부분의 공동체 문화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이 더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리학자 리처드 나스벳은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인은 관계중심적으로 사고하고 서양인은 개인 중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동양과 서양의 관계는 보수와 진보의 관계와도 같다. 보수주의자 역시 집단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는 도덕 매트릭스 역시 집단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충성/배신은 자신의 협력 의지를 공동체에 보여주고 집단 정체성을 내면화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했다. 권위/전복은 개인이 공동체의 서열 사회에 적응하고 그 속에서 지위를 높이려는 목적에서 진화했다. 고귀함은 상한 음식과 전염성 질병을 피하기 위해 생긴 청결에 대한 욕구와 혐오적 반응이 집단의 응집성을 높이는 의례와 결합하여 생겨났다. 고귀함/추함 기반에 기반한 의례적 행동은 하나의 문화적 유전자가 되어 생물학적 유전자와 함께 공진화하며 종교를 탄생시켰다. 그렇게 탄생한 종교는 더욱 강력한 문화적 유전자(Meme)가 되어 다양한 민족과 인종을 하나로 규합시키며 거대한 종교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그렇게 탄생한 존재가 기독교ㆍ이슬람ㆍ불교ㆍ힌두교 문화권이다.
1954년 여름, 무자파 셰리프라는 연구자는 3주 동안 케이브 주립 공원 캠프장에 남자아이들을 데려갔다. 셰리프는 아이들을 11명씩 두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을 이틀에 걸쳐 데려가서 두 그룹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야영지에 도착하고 맨 처음 한 일은 영역을 표시하고 부족의 정체성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룹 이름은 ‘방울뱀족’과 ‘독수리족’으로 정해졌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놀 아지트를 정비해 나갔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다. 아지트가 겹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각 그룹은 합의를 거쳐 대장을 추대하고, 자신들만의 규칙과 노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갔다.(방울뱀족은 사나이답게 울지 않는다. 독수리족은 절대 악담을 하지 않는다.)
연구 6일째, 셰리프는 두 그룹의 아이들을 정식으로 소개하고 스포츠와 야영 기술로 그룹끼리 시합을 붙였다. 아이들은 경쟁심이 붙어 모든 활동에 열의를 보였고 하나로 뭉쳐하는 행동도 급격히 늘어났다. 그에 따라 두 부족 간의 갈등도 늘어났다. 아이들은 부족 깃발을 만들어 분쟁 지역에 걸어놓았고, 서로의 깃발을 빼앗고, 상대 침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듣기 싫은 말로 서로를 부르고, 양말에 돌멩이를 넣어 무기를 만들고, 주먹다짐까지 벌였다. 셰리프는 두 부족 간의 적개심을 없애기 위해 한참 동안 노력해야 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에는 부족성이 구조화되어 있다. 남자아이들은 그 성향이 더 강한데, 경쟁 집단 간의 전쟁이나 동료끼리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강한 남성이 높은 지위와 자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팀을 이뤄 전쟁놀이, 총싸움, 축구, 게임 등 경쟁적인 놀이를 하는 것 자체가 미래에 일어날 치열한 경쟁과 연합 구성을 미리 연습하는 준비 과정이다. 새끼 사자들이 형제들끼리 물어뜯으며 노는 모습과 근본적으로 같은 방식이다.(사자의 놀이는 서열 싸움과 사냥을 연습하는 것이다.)
반면 여자아이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충성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선 도움을 주고받는 협력관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체육시간에 공만 주면 미친개들처럼 뛰어다니는 남자아이들과 달리,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여서, 남성은 당구, 게임, 축구 등 경쟁적인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여성은 카페나 맛집을 탐방하거나 대화를 하며 여가를 보낸다.
방울뱀족과 독수리족의 갈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단 집단 정체성이 구축된 후에 경쟁 집단과 자원을 둔 갈등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폭력 사태로 비화될 수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수렵채집 시대의 인류가 ‘고결한 야만인’과 같이 선하고 평화롭게 살았을 거라는 믿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인류의 조상들은 지금보다 더한 만성적 폭력 상태에 처해 있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원시 인류를 관찰해 보았더니, 인접 부족과 국지적 전쟁, 폭력, 피의 복수가 흔하게 일어났고, 서로 간에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벌 부족에 대한 증오심은 충성심을 증명하는 지표임과 동시에 라이벌 집단의 도전과 공격을 막아내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테러, 인종 학살, 내전 역시 부족주의적인 증오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배신은 충성심 기반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배신을 가장 비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에서는 배신이 욕정ㆍ폭식ㆍ폭력ㆍ이단보다 더 나쁘다는 구절이 나온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는 내부고발자를 보호하기보다 불이익을 주고 따돌리는 모습이 흔하다. 레드 콤플렉스는 또 어떤가. 한국 사회는 철저한 반공 교육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빨갱이를 잡는 일에 광적으로 집착해왔다. 미국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상원 의원 조지프 매커시가 미국에 공산주의자가 암약하고 있고 자신이 그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 정치권에서는 1950년대부터 1954년까지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 불었다. 이를 매카시즘이라고 한다.
내부에 스파이가 숨어 있다는 의심과 불안은 오히려 소속 집단에 대한 애정과 헌신, 충성을 증가시킨다. 또 집단의 결속력과 정체성이 뚜렷해지면, 사람들이 내면에 숨기고 있던 지배욕과 탐욕, 공격성이 집단의 야욕으로 현실화되어 외부로 향하게 된다. 그 지배욕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게 되면 내부에서 자정 작용을 할 여지가 없어지게 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유일한 진리란 집단은 개인의 합보다 크다는 것이다. 개인들의 억압되고 좌절된 욕구가 그것들을 증폭시킬 독재자를 만나면, 정상적인 국가라도 언제든 제국주의적인 정치 체제가 될 수 있다. 제국주의의 완성 형태인 나치즘과 파시즘이 그랬다.
게다가 팽창하려는 집단의 의지는 반드시 외부 집단과 충돌하게 되어있다. 충돌의 끝은 결국 폭력과 전쟁이다. 폭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높이는 것들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우발적 폭력의 희생자가 존중받는 대상이거나 아이 같은 약자일 경우, 문화가 상이하거나 오랜 갈등이 중첩되어 있을 경우, 상대 집단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이 쌓여 있을 경우, 배신자가 있을 경우, 이념적 대립이 극심할 경우다. 분노와 증오를 먹고 자란 집단의 공격성은 반드시 그 폭력성을 외부로 드러내게 되어 있다.
집단의 안전이 위협받을 징조가 있으면 내부 결속은 단단해지고, 그 집단의 정체성과 공격성이 뚜렷해진다. 공동체를 향한 애착과 충성심은 더욱 커지고, 그 공동체는 모든 활동을 생존에 집중하는 비상 체제로 전환하면서 권력은 한 곳으로 집중된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을 경우 전쟁을 일으키거나, 적에 대한 증오와 공포심, 불안을 조장해서 다시 권력을 유지하곤 했다.
한국 보수의 선거 전략도 마찬가지다. 보수의 유일한 선거 전략은 어릴 적부터 반공 교육을 받아온 노년층의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흔히 북풍이라고 부르는 의도적인 공포 전략은 실제 ‘총풍 사건’으로 수면 위에 드러났다. 1997년 12월, 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기 직전에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이 지지율을 위해 북측에 판문점에서 총을 쏴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처럼 공포와 불안을 확대하고 증폭시킴으로써 내부 결속을 유도하고,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걸 ‘적대적 공생 관계’라고 한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냉전 시대를 다룬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미국에 정보를 털어놓는 대가로 귀화하려는 소련의 정보원이 있었다. 하지만 정보기관이 자신의 말은 믿지 않고 고문만 일삼자, 소련의 정보원은 짧은 진실을 내뱉고 유리창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이런 취지의 말로 기억한다.
‘소련은 애초부터 너희의 상대가 되지 않았어. 미국도, 소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 너희들만 모를 뿐이지. 너희들은 속고 있는 거야.’
냉전 시대의 소련과 미국은 실제로도 동등한 수준의 라이벌이 아니었다. 체급이 달랐다는 말이다. 소련이 인공위성을 먼저 보낸 점만 빼면, 경제력, 군사력, 기술력, 정치적 안정성과 사회 인프라 등 모든 면에서 소련은 미국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정치권은 내부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는 매카시즘의 광풍에 빠져들었고, 소련에 뒤처질까 봐 전정 긍긍했다. 그 시국에서 매카시즘의 주창자 조지프 매카시는 관심과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야당이 국정 감사장에서 북한의 고정간첩이 5만 명이나 된다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5만 명의 고정간첩을 운용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데, 천조국 미국도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다. 거짓말을 해도 먹힐 줄 알고 하는 거다.
르네 그루쎄는『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농경 문명과 유목 문명 중 하나가 쇠퇴하면 다른 하나도 같이 쇠퇴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유목 민족은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목 지도자는 농경 문명을 약탈하고 그 전리품을 분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 농경 문명의 권력자 역시 유목 문명으로부터 민중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지속시켰다는 것이다. 르네 그루쎄가 보기에 농경민족과 유목 민족은 서로를 증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로를 적대함으로써 두 문명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다.
권력자들이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용하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지도자가 적대 집단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면 된다. 정말로 국가 외 국민의 앞날을 걱정하는 지도자라면 아무리 증오의 뿌리가 깊더라도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외 정책을 수립한다. 그게 북한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국제 관계는 힘의 논리로 움직이지, 도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도자마저 외교와 안보 정책을 감정과 윤리로 접근하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정말로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도자라면,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하여 중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해 나가야 한다. 정치적 문제이기 이전에 생존의 문제기 때문이다. 누군가 공포와 두려움을 지나치게 자극하거나 군사적 긴장을 만들어 낸다면, 그 목적이 사익 추구에 있을 확률이 높다.
애국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권력자를 경계해야 한다.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의 상당수는 국익 같은 합리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군주 자신의 개인적 욕심과 자존심으로 일어난 전쟁들이었다. 근대까지도 한 사람의 결정 때문에 수많은 민중들이 영문도 모른 채 화살받이, 총받이로 죽어갔다. 누군가 국가의 영광을 노래한다면, 그 영광은 누구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도리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걸 찬양하는 게 아니고.
사람들은 집단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욕망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애국심, 애사심, 지역주의, 스포츠 팀을 응원하며 부족주의에 빠져든다. 그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집단의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는 이유는 자신과 공동체를 분리할 줄 알기 때문이다. 종교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이러한 분리는 허용되지 않았다. 종교혁명 이후에야, 누구에게나 침해받지 않을 기본권, 즉 인권이 있다는 생각이 발전했다. 그리고 인권 덕분에 종교와 정치, 개인과 집단이 분리되어야 하고, 집단이 개인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를 세속주의라 하는데, 개인의 존엄 위에 그 어떤 것도 위치할 수 없다는 믿음이 반영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반대로 근본주의는 한 가지 이념, 가치, 혹은 종교적 믿음으로 인간과 세상사를 재단하고 통일시키려 하는 신념 체계(Dogma)다. 근본주의는 반드시 가치의 통일을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되어 있다. 자하드나 테러리즘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광신자라 해도 불특정 다수에게 자살 테러를 감행하도록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보통 순수하고 믿음이 건실한 청년을 가족과 친구에게서 고립시키고, 알라의 신성한 가르침이 이교도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믿음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로 보상받는다는 속삭임도 잊지 않는다.(코란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평범한 이슬람 청년은 오랜 세뇌를 거쳐 완전한 지하드 전사로 거듭나고, 사람이 붐비는 쇼핑몰 센터에서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폭탄이 부착된 조끼의 스위치를 누른다. 그러나 신에 대한 헌신의 보상과 관심은 지하드 전사가 아니라 극단주의 종파의 지도자가 돌려받는다. 그렇게, 권력은 계속 유지된다. 충성심과 권력은 동전의 양면이다. 애국심 또한 권력에 의해 언제든지 이용될 수 있다.
분명 충성심은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이다. 집단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없었다면 인간은 이렇게까지 번성하지 못했다. 충성심 덕분에 우리는 한일전에 치킨을 시키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군대에 자진 입대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충성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엇나가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공동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한 용기 있는 사람을 배신자라 몰아세우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게 정당화된다. 우리의 이타주의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지나친 충성심은 우리를 그 선 밖으로 나가도록 유혹한다. 그러면 우리의 이타심은 곧 증오심으로 변한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싶은 기회주의자라면, 충성심과 증오심을 이용해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 애쓸 것이다. 보수의 충성심이 그 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보수의 또 다른 매트릭스는 권위/전복 기반이다. 우리는 이미 서열과 위계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보수의 사고방식에 대해 알아보았다. 진보는 배려/피해 기반 때문에 서열주의를 약자에 대한 착취이자 악으로 보지만, 권위에 순종하는 성향 역시 진화적인 이점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자연선택되었다. 우선, 권위는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폭력이 발생한다면, 그 집단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규범과 도덕을 어긴 자를 처벌하고,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 정당한 절차를 확립할 수 있는 권위가 필요해진다. 조직이 유지되려면 구심점과 이정표, 추진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리더와 권위가 필요하다. 사실은 권위가 나쁜 게 아니라, 권위주의가 나쁜 것이다.
인류가 사회성을 충분히 발달시키기 이전, 집단의 구심점이 약했을 때는 대체로 평등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의 규모가 커지며 자원이 부족해지자 인접 부족과의 대립은 극심해졌고,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 힘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아마 똑똑하고 리더십이 있고, 공정하고, 덕망 있고, 갈등과 분쟁을 조정할 만큼 소통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것이다. 부족장은 부족원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었고 그의 말과 행동은 다른 부족원들보다 힘과 무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지도자가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지위를 악용해 자원과 짝을 독점하고 사람들을 착취하는 지도자 역시 존재했다. 평범한 부족원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부러워했고, 그처럼 되기 위해 아부를 일삼았을 것이다. 부족민들을 착취하는 부족장 역시 아첨꾼들을 적극 활용해 권력을 유지시켜나갔다. 인류는 권력자를 존경하거나 두려워하기도 했고,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기도 하고 끌어내리기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에겐 자유/억압 기반과 권위/전복 기반이 함께 존재한다. 보수주의자가 권위 매트릭스를 선택했다면, 진보주의자는 자유 매트릭스를 선택한 셈이다.
보수에게 권위란 힘 그 자체에서 나온다. 권력을 쥐었다는 것, 힘이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을 의미한다. 강자는 지배하고, 약자는 복종한다. 권력은 다수의 약자가 소수의 강자에게 복종하는 데서 나온다. 보수는 권력을 결과로 이해한다. 그래서 일단 권력을 쥐게 되면, 절차와 합의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인과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내가 모두를 무릎 꿇릴 수 있는 힘을 가졌기에, 그 힘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힘을 기준으로 일렬로 줄 세우면 나타나는 게 서열이다. 권위는 서열의 꼭대기에서 나오며, 이유를 막론하고 모두가 그 최정상에 있는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권위주의다. 꼰대들이 항상 하는 말, ‘내가 누군 줄 알고’의 진짜 의미는 내가 너보다 위니까, 골치 아프게 따지지 말고 알아서 기어라, 라는 뜻이다.
권력과 복종의 관계에 대해선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이미 알아본 적이 있다. 권력이란 결국 다수의 복종을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며, 그에 대한 답은 등장인물의 지적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사실 권력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자는 바리스뿐이었다. 앞 장에서는 바리스가 말하는 권력의 본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다. '인간은 누구에게 복종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권력의 속성을 파헤쳐보면, 바리스가 말하는 진의를 이해할 수 있다. 가장 단순 무식한 권력자 유형은 폭력과 공포를 이용해 복종을 이끌어 내고, 그보다 영리한 유형은 음모나 계약, 정보의 우위로 권력의 우위에 올라선다. 하지만 권력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권력자라면, 권력자에게 권력이 있다고 믿게 만들어 스스로 복종을 유도해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장 쉽고 효율적으로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왕좌의 게임』에서 바리스가 묻는 수수께끼에 그 힌트가 있다. 바리스는 왕, 사제, 부자가 용병에게 자신을 뺀 나머지를 죽이라고 말하면 그들 중에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티리온에게 묻는다. 난쟁이 티리온은 칼을 가진 용병이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기에, 죽고 사는 문제는 용병에게 달렸다고 말한다. 그러자 바리스는, 살고 죽는 것이 칼에 달렸다면 우리는 왜 왕에게 권력이 있다고 믿는지 묻는다. 사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건 왕이 아니라 대중이고, 따라서 책임도 대중에게 있지만, 그 진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왕에게 권력을 넘겨준 것이다. 수수께끼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한 티리온을 위해 바리스는 권력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해 준다.
‘Power resides where men believe it resides. It's trick. A shadow on the wall and a very small man can cast a very large shadow. (권력은 권력이 존재한다고 믿는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속임수죠. 작은 사람도 큰 그림자를 드릴 수 있으니까요.)’
이어서 바리스는 권력이란 벽에 그리운 그림자처럼 속임수에 지나지 않으며, 작은 사람도 아주 큰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림자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건 빛이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화려한 빛을 바라보지, 빛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려 하지 않는다. 대중이 빛에 환호할 동안 권력자는 그림자 속에 숨어 그들을 비웃는다. 우리가 복종하는 대상은 용병의 칼도, 부자의 돈도, 사제의 신도 아니다. 인간은 빛에 열광한다. 우리의 초라한 현실을 씻어내려 줄 아름다운 존재인 빛이 있어야 우리는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 찌질하고 초라한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직시하는 게 두렵고, 비정한 세상에 던져진 나를 자각하는 게 두려워서, 우리는 빛을 찾는다.
바리스는 권력은 지배받는 자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중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희망과 구원의 상징인 빛을 보여주고, 대중이 빛에 취해있는 동안 그림자 속에 숨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그림자는 빛의 세기에 비례해서 커지기 때문에, 작은 사람도 큰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는 법이다.
그림자는 두려움을 상징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은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대중은 빛에 열광하는 만큼 그림자를 두려워하기에, 권력자는 희망의 상징인 빛과 공포의 상징인 어둠을 둘 다 이용해 권력을 영속하려 한다. 그게 바로 선과 악의 대결, 충성심과 증오심을 이용하는 법이다. 권위는 그 과정에서 나온다. 그렇게 대중이 빛과 어둠에 빠져있는 동안, 권력자는 그림자 속에 숨어 대중을 비웃는다.
한국은 유난히 히어로에 열광한다. 마블이 중국 다음으로 많은 해외 수익을 올린 국가가 한국이라고 한다. 히어로란 무엇일까. 히어로란 내 삶을 구원해줄 그 무언가다. 영웅 또는 초인이라고 부르는 초월적 존재인 히어로는 현실에선 존재할 수가 없지만, 히어로의 상징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대통령, 로또, 코인, 연인 등, 우리가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어주는 무엇이든 다 히어로가 될 수 있다. 내 삶이 극적으로 바뀌리라는 희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 자신이 아닌 외부의 무언가에 의존하고 싶을 때, 그래서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때, 우리는 히어로가 약속하는 아름다운 미래에 빠져든다.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가 된다.
어린이와 어른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아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이는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모두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전제에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에도 의문을 품지 않아서, 아기들은 도움 없이 자기 혼자 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능력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도 아니고, 부모 또한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나와 남은 다른 존재며,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며, 세상이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더 커서 어른이 되면, 내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천재도 아니며, 세상이 그렇게 공평한 곳도 아니기에 적당히 비겁하게, 평온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꺠닫는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순 없다는 걸, 빛나는 미래가 나를 위한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선택하고, 책임지기로 한다. 세상의 무서움을 확실히 알았으니까.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진다는 걸 뜻한다. 성인이 됐다고, 나이 많이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다. 나이 먹고도 자기 인생에 책임 못 지는 어른이들, 새고 샜다. 나도 마찬가지고. 왜 어른이 되지 못할까.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상상하면, 내가 사는 세상이 두려워진다. 그렇게 세상이 불안해지면 나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긍정하지도 못하는 법이다. 현실과 욕망의 괴리를 긍정해야 나 자신을,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데, 그게 가장 두려운 법이다. 우리가 세상을 위험한 곳이라고 받아들이면, 사소한 것 하나도 무섭고, 불편하고, 짜증 나고, 선택을 주저하게 된다. 그래서 내 현실을 가려줄, 밝고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를 찾아 나선다. 그게 바로 아름다운 빛의 존재, 히어로다.
그래서 인류는 끊임없이 히어로를 찾아 나섰다. 강력한 지도자, 완벽한 연인, 전지전능한 신, 이데올로기, 진리 등 히어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내면의 두려움을 없애고 현실을 잊게 해 줄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건 상관없다. 그래서 그 히어로에게 우리의 자유를 위탁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혼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가 될까 봐, 혼자가 돼서 하는 선택에 따른 결과를 오롯이 나 혼자서 감당할까는 게 무서워서, 우리는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애니 『진격의 거인』에서는 빛과 히어로라는 상징이 권력에 어떻게 이용되는지 잘 나타나 있다. 작화와 캐릭터의 이름에 그 상징을 숨겨져 있다. 작가가 극우적인 발언을 했다고 『진격의 거인』주제 역시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라고 본다. 오히려 『진격의 거인』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증오 앞에서 몸부림치는 인간과 그 앞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작가의 고뇌, 또 일본 특유의 패배주의 문화가 담겨 있다. 우리가 타인을 증오하고 히어로를 갈구하는 것 역시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작품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격의 거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다들 무언가에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거야…’
『진격의 거인』세계관은 오래전 갑자기 나타난 거인에게 인류의 대부분이 잡아먹히고 살아남은 일부만이 거대한 벽을 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주인공 엘렌 예거는 100년 만에 다시 등장한 거인에게 어머니가 눈앞에서 잡아먹히는 것을 지켜본다. 엘렌은 거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조사병단에 들어가고, 거인과 맞서 싸우던 중 자신도 거인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엘렌과 그의 친구들은 거인과 싸우는 과정에서 섬 밖에도 인류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엘렌이 속한 조사병단이 알아낸 진실에 따르면, 거인은 한때 같은 엘디아인이었다. 거인은 외부의 적들이 사람들에게 약을 주입시켜서 인간을 잡아먹는 무지성 거인으로 변하게 만든 것에 불과했다. 파라디 섬의 왕은 사실 가짜 왕인 허수아비였고, 진짜 왕은 엘디아인을 제외한 인류가 모두 잡아먹혔다고 믿게끔 만들어 벽 안에서 은밀히 권력을 유지해왔음을 알게 된다. 벽 밖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닐 만큼 과학기술이 발전한 현대의 인간들이 살고 있었고, 엘디아인은 과거에 저지른 과오로 인해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조사병단은 권력을 위해 모두를 속여온 지도부에 실망감을 느끼고,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왕을 추대한다.
에렌과 에렌의 소꿉친구 미카사 아커만은 여러 모로 이상한 존재들이다. 에렌은 어릴 적 어머니가 눈앞에서 잡아먹혔고, 자신도 수차례 거인에게 몸이 뜯겨나갔음에도(거인화가 가능한 인간의 몸은 금세 회복된다.) 거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에렌의 목표는 거인을 모두 죽이고 자유를 찾는 것이다. 미카사는 에렌처럼 거인으로 변할 순 없지만 거인을 학살할 수 있을 만큼 전투 능력이 뛰어나다. 다른 조사병단 동료들과 다르게, 에렌과 미카사는 거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비밀은 에렌과 미카사의 이름에 숨겨져 있다. 엘렌 예거의 ‘예거(Jäger)는 독일어로 사냥꾼을 의미한다. 에렌은 거인에게 여러 차례 죽을 뻔했는데도 거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거인을 사냥하려 한다. 하지만 에렌의 불굴의 용기는 친구 미카사처럼 자신감에 바탕을 둔 현실적인 용기가 아니다. 수차례 팔이 뜯겨나갔음에도 거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우고,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인간을 넘어선 초월적인 신념이다. 자유를 향한 에렌의 의지와 용기는 그 자체로 신적이고 영웅적이다. 에렌은 벽 밖의 적과 거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벽 안의 모든 사람들은 엘렌에게 의지하고 희망을 투영한다. 그래서『진격의 거인』 속 에렌 예거는 신, 즉 히어로를 상징한다.
엘렌의 친구 미카사 아커만은 엘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존재다. 미카사는 소수 인종인 아커만 일족의 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엄청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에렌의 용기가 현실에서 불가능한 신적인 것이라면, 미카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을 가지고 에렌을 보좌한다. 즉, 엘렌은 신을 상징하고 미카사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샤머니즘, 종교 지도자를 상징한다. 인류사에서 그들은 신과 소통하고 그들의 계시를 전달하는, 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심복이었다. 그렇게 종교 지도자들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유지시켜 나갔다. 미카사의 이름에도 그 의미가 숨겨져 있다. 미카사의 성 아커만은 영어로 Ackermann으로, 묵음 H를 붙이면 Hackermann, 즉 ‘속이는 자’가 된다.
에렌이 거인으로 변신할 때, 하늘에서 엄청난 빛이 쏟아지는 모습은 마치 신이 세상에 강림하는 것 같다. 에렌은 압도적인 강함을 가진 거인으로 변신함으로써, 벽 안의 백성들에게 인류를 잡아먹는 거인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래서 에렌 예거는 거인을 사냥하는 사냥꾼이자, 빛의 상징인 신을 상징한다. 반면 미카사 아커만, 즉 속이는 자는 인류사에서 뛰어난 영적 능력을 가진 신의 대리인을 상징한다. 그들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였고, 그렇기에 신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였다. 그렇게 주술적 지도자들은 인류를 속이며 권력을 유지해왔다. 벽 안의 왕이 거인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정보를 차단하고 권럭을 유지하는 모습, 신을 상징하는 에렌 예거, 에렌의 옆을 지키는 미카사 아커만 등 작품 속에 상징을 숨겨놓음으로써, 작가는 인간이 왜 히어로에게 빠져드는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가는 히어로가 근원적인 불안을 없애준다고 속삭이고, 희망이라는 빛을 보여주며 어떻게 인류를 속이고 권력을 유지해왔는지를 『진격의 거인』을 통해 말하고 있다. 권력과 자유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보면,『왕좌의 게임』과『진격의 거인』속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외부의 히어로에게 의탁할 때, 인간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그때,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리고 진정한 의미의 권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현실이 드라마틱하게 변하기를 원한다. 극적인 변화를 바란다는 건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고, 내가 직접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체념과 자각이 완결된 상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대신 바꿔줄 히어로를 찾게 된다. 완벽하고 아름답고 선한 빛의 존재, 히어로에게 의탁하게 되면 나 의 의사와 선택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히어로가 대신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란다.
권력은 그 과정에서 생겨난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교활한 권력자라면 그 심리를 이용해 권력을 얻으려 한다. 권력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복종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빛에 열광하고 어둠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빛이 밝아질수록, 어둠도 깊어지는 법이다. 빛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게 신이건, 이데올로기 건, 사람이건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하듯이, 자유에 내재돼 있는 책임을 지기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권위에 복종할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중세까지는 신성을 믿었고, 근대에는 이성을 믿으며 자발적으로 히어로에게 복종해 왔다.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믿을까. 오감을 믿는다. 인스타, 틱톡, 맛집, 카페, 쇼핑, 호캉스, 스마트폰, 넷플릭스, 커뮤니티 같은 것들.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와 자극, 감각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채 감각의 홍수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노예일 뿐이다. 물론 내가 잘 살고 있는지 SNS로 주변을 곁눈질 하기는 한다. 두렵거든. 근데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떠한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은 없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인 읽고, 쓰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통해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법은 온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해선 관심도, 신념도 없다. 자극적이고 순간적인 이미지와 정보에 놀아날 뿐. 그래서 속이기는 더 쉽다. 의심이 사라진 채 감각만 믿다 보면 좋아하는 것만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사람들을 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알아서 빛과 그림자를 만들고, 알아서 속아주니까. 기성세대가 정치적으로 편향적인 뉴스만 보다 보니 세뇌됐다면, 청년 세대는 인터넷 커뮤니티, SNS를 통해 스스로 정치적인 정보를 생산, 소비하고 왜곡시킨다.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의견을 구분하고, 다양한 정보를 비교하고 그 속에서 실체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뽑아내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공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부를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 세상에서의 정치는 항상 극단적인 행태를 보이고, 왜곡돼서 속이기도 더 쉬워진다.
보수 정치인이라면, 청년들의 정치 소비 형태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 할 것이다. 주로 지위와 이익에만 관심 있는 보수주의자의 성향이 권력의 상층부에서 더 두드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 정당에선 어쩔 수 없이 권력 자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치인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보수 정당 내부의 계파 갈등과 권력 투쟁이 진보 정당보다 훨씬 치열한 이유다. 권위주의를 싫어하는 청년들이 누구보다 권위주의적인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누구나 히어로를 갈구하지만, 이제 청년들은 스스로 빛을 속삭이는 히어로를 만들어내고 있다. 언젠가 천국이 도래하리라 믿으면서.
2006년,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발표하며 세계 종교계를 뒤집어 놓았다. 인류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폭력과 해악을 폭로하면서 세상에는 종교가 없는 편이 낫다는 내용이었다. 도킨스는 성서를 예로 들며 기독교의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애로운 신이 아니며, 오히려 잔혹하고 질투에 가득 찬 신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인류는 이제 더 이상 신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차라리 종교 대신 과학과 이성, 인류애를 믿는 것이 낫다는 주장까지 한다.
도킨스의 주장은 사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의문이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자애로운데 왜 세상은 불합리하고 우리의 삶은 고통에 차 있는 걸까. 피조물이 불행하도록 내버려 두는 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나? 게다가 우릴 사랑한다고? 나는 중학생 때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한참 고민하던 때에『만들어진 신』을 읽고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도킨스처럼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는 만악의 근원이기에 없어지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만한 결론이지만, 이성과 과학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진 도킨스처럼 나 역시도 예비 진보주의자로서 이성의 힘을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과학자에게 믿음이란 종교의 Believe가 아닌 근거의 Support를 의미한다.)
도킨스로 촉발된 신무신론자들의 주장에는 전형적인 WEIRD적 세상에 사는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개인적ㆍ합리적 세계관을 가지고 무한한 진보를 믿는 그들이 보기에 종교란 과거의 유물이자 테러와 폭력을 야기하는 야만에 불과해 보이는 게 당연했을 거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믿었던 한때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신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기에 신의 존재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다는 겸손한 불가지론적 무신론자의 고백은 중2병에 걸린 학생의 종교관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나는 훈련병 시절 피자를 준단 말에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고, 바로 다음 주 불교로 전향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 불교가 햄버거를 주고 현아의 버블팝을 반복해서 틀어준다는 귀한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지만.
여전히 나는 불가지론적 무신론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결론을 정립해가던 중2병 시절에는, 유럽에 대한 테러가 유난히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종교란 악 그 자체이고 종교를 믿는 사람은 사기꾼들을 믿는 바보들로 보였다. 지금에는 종교와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훨씬 너그러워졌다. 급똥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던 순간 하나님을 찾는 나를 발견하면서, 인간이 왜 종교를 믿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론은 많다.
우선 도킨스는 진화론자답게 신을 믿는 심리는 맹목적인 인지 편향의 오류이자 부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위험한 존재를 감지하기 위해 정확성보다는 생존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당연히 포식자를 탐지하기 위해 미세한 단서라도 알아채고 주변에 전하는 것이 틀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종교란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인지적 오류의 부산물이 신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한 것이 된다. 인지 편향의 작용으로 종교적 믿음이 인간의 마음에 타당하게 비쳐서, 다양한 직관, 믿음, 행동이 자리 잡아 집단주의적인 성향과 함께 문화적으로 공진화하며 종교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는, 사람마다 다른 마음과 그 의도를 탐지하고 추론하는 정신화 능력이 종교로 발전했다고 보는 이론도 있다. 상대의 생각을 추론하는 심리기제는 마음과 몸이 따로라는 이원론, 모든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목적론적인 직관을 만든다.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이유다. 또한 신학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핵심 논증 역시, 사물은 이유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추론에서 비롯된다. 창조론은 진화론을 반박하는 논리로, 세상 모든 것은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적 없이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세상과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었겠느냐는 논리다.(당연히 진화론은 창조론의 목적론적 오류에 대해 완벽에 가깝게 반박할 수 있다.)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다른 이론들에서는 인간의 군집성에 주목한다. 종교는 상이한 부족과 문화가 협력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이미 인류의 규모가 친족에서 비친족으로 확대되며 공동체 결집을 위해 자신들만의 도덕과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의례와 신화, 즉 원시적인 종교가 탄생했다. 따라서 원시 부족의 의례적 행동에는 현대의 종교와 동일한 특성이 나타날 것이다. 실제로, 종교는 상이한 공동체가 하나로 뭉치기 위해 탄생한 거라고 보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나도 종교의 핵심적인 심리 메커니즘이 집단 정체성에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그렇다고 종교의 진화적 기원을 설명하는 다른 이론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종교는 여러 심리 메커니즘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인간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발명품으로 보아야 한다. 보수주의자의 고귀함과 추함 매트릭스는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며 마주할 수 있는 상한 음식과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적응한 것이다. 더럽거나 역겨운 것을 마주하면 혐오하거나 씻어내려는 심리는 도덕성에도 적용되어, 고귀함/추함 기반의 뿌리가 되었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기독교같이 도덕적으로 엄격한 종교에 매력을 느낀다.
고귀함/추함 기반은 대규모의 협력과 문화적으로 공진화하여 부족마다 독특한 의례를 만들어냈다. 문화적 진화란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만들어낸 개념으로, 문화가 생물학적 유전자처럼 다른 문화와 경쟁하고 살아남아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밈(Meme)이라 불리는 문화 유전자는 생물학적 한계를 이겨내고 사회 속에서 스스로 진화한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적 응집력과 협력을 향상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인류가 선택한 게 종교였다. 그래서 종교가 일단 자리 잡고 나서부턴 유전자의 제약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발전해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도킨스는 이제는 종교적 밈보다 과학적 밈을 우리의 정신적 토양으로 삼는 것이 낫지 않냐고 묻는 것이다.
현대 종교는 치열한 경쟁 끝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문화적 유전자의 결과물이다. 의례는 그 자체로서 각 부족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유전자다. 그래서 의례는 부족원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무임승차자와 배신자를 처벌하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희생을 요구하고, 라이벌 부족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부족민들에게 우정과 봉사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다큐멘터리에서 원주민들이 장신구를 걸친 채 괴상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 적 있을 것이다. 과거엔 부족들마다 자신들만의 의례가 존재했을 것이고, 극소수의 의례만이 문화적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아 세계 종교로 발전하는 토양이 되었다. 따라서 현재 살아남은 세계 종교 역시 원시부족이 행하는 의례적인 성격을 그대로 띠고 있다.
쉽사리 동의하기 힘들다는 걸 안다. 원주민들의 괴상한 춤과 노래, 의식을 세계적인 종교와 비교하다니. 사실 종교와 의례를 완전히 같은 것이라고 보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부족의 의례를 따르지 않는 개인은 집단에서 추방되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의례를 추종하는 성향이 생물학적 유전자와 공진화하며 우리의 DNA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게 꼭 종교나 신화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 감정 비슷한 걸 느끼곤 한다. 세상이 합일되었다는 일체감, 인생에 대한 충만감과 경외감 같은 것들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원시 부족들이 의례에 환각성분을 지닌 약초를 활용하고, 현대의 인류는 엑스터시 같은 환각성 마약을 하고 광란의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게임에 자주 나오는 버서커(Berserker) 역시 집단 제의를 통해 종교적 광란 상태에 빠진 바이킹들이 곰 가죽을 입고 영국 놈들 머리를 썰기 위해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나온 말이다. 또 마약 경험자들에 의하면, 자아가 사라지고 세상과 내가 하나 되었다는 일체감과 신성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마약신고는 125)
신과 종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기독교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의 종교가 하나의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일신론이 예외적인 케이스다. 우선 스피노자의 범신론처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는 종교도 있고, 불교나 힌두교처럼 마음 수양에 집중하는 종교의 형태도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무신론을 믿는 과학자들조차 과학적 진리와 우주의 광대함에 대해 종교적인 경외감을 느낀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아마 내가 화장실을 찾게 해 주신다면 착하게 살겠다고 신에게 다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구원을 받은 후 그 다짐은 곧 잊어버렸지만.
그래서 원시 부족의 의례와 종교는 공통점이 많다. 의례의 핵심 목적은 집단 구성원을 확인하고, 집단에 대한 헌신을 증명하고, 연합과 협력을 가능하게 하고, 집단을 응집시키고, 내부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다. 부족과의 전쟁을 앞두고 뉴기니 챔바가 족이 돼지를 도살하는 의례를 행한 것처럼, 종교 전쟁을 앞두고 항상 크고 성대한 의식과 기도가 있었다는 점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신이 우리를 보살펴주신다는 믿음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신에 대한 충성심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인류학이나 대중 과학은 원시 부족의 의례를 비합리적ㆍ원시적인 행동이자 현대 문명과 구별되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만, 근본적인 기능과 양상면에서 의례와 종교는 큰 차이가 없다. 의례는 개인에게는 신성한 믿음을 드러내고, 내면의 자아와 감정을 표현하고,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집단 의례 역시 위험을 다루고 피하고 완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집단 의례에 참여하면 위험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종교 행사에 참여하면 고민과 걱정이 줄어들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의례는 폭력, 불행, 위험한 활동과 관련되면서도 그것들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완화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미신적인 의례는 위험한 활동과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완화해 주며, 통제 불가능한 것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준다. 집단과 하나가 되었다는 고양감과 소속감은 자기 효능감을 증가시켜주기 때문이다. 전쟁 후 PTSD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여성이 기도를 암송하고 나서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류는 의례와 종교를 통해 삶의 불행과 불안을 줄여주고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집단과 하나가 되었다는 일체감과 자신감으로 인해 수많은 폭력과 죄악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일부 종교인들이 오히려 비도덕적인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인간은 암암리에 적합도를 위협하는 것들, 뱀, 거미, 대형 육식동물, 위험하거나 낯선 사람, 사회적 배제, 오염물 같은 것들을 접하면 내집단의 규범적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지지한다. 목숨을 위협하는 환경적ㆍ사회적 단서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은 자연스럽게 집단 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의례와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한다. 보수는 위험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고귀함/추함 기반을 이용해 종교에 헌신할 확률이 높다. 바꿔 말하면, 보수주의자는 의례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겪을 잠재적 위험(도덕적ㆍ사회적 배제)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종교에 의지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의례가 도움만 주는 건 아니다. 의례는 개인에게 이익을 주는 만큼 희생과 헌신을 강요한다. 의례는 집단에 대한 헌신을 증명하는 값비싼 신호이자 신뢰도 향상 표현의 단서다. 값비싼 의례가 많을수록 그 집단은 오래 유지된다. 말로 하는 충성은 기만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행동적 헌신이 우대받도록 인지 기제가 진화한 것이다. 따라서 시간, 에너지, 비용, 고통, 희생의 비용이 많이 들어갈수록 집단에 대한 헌신이 더 잘 증명될 수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교회를 비롯한 종교적 건축물이 크고 화려해지는 이유에는 결국 집단에 대한 헌신을 증명하려는 심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우상 숭배를 금하는 기독교와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불교 역시 화려한 건축 양식과 동상, 미술, 상징물들로 교회와 불당을 가득 채운다. 기독교 문화권의 예술은 중세까지 신의 성스러움을 표현하고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값비싼 의례는 집단의 갈등과 긴장이 극심해질 때는 금기라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챔바가족의 경우, 전쟁이 시작되면 다양한 의례적 금기들이 강제된다. 전쟁 기간에는 어떤 액체도 입에 댈 수 없고,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먹어야 하고, 여성과 성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경쟁 집단의 영역에 발을 들이거나 그 집단 구성원들을 바라보는 것조차 금지된다. 챔바가족은 이런 금기를 통해 개인적인 비용을 감수하면서 헌신을 증명한다. 현대 종교도 마찬가지로 희생과 헌신이 강제된다. 이슬람 문화권은 9월의 라마단 기간 동안 일출과 일몰 때까지 금식을 해야 하고 하루 5번씩 기도를 해야 한다. 라마단 기간의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음식과 물, 담배, 성관계도 금지된다.
현대의 세계 종교는 원시 부족의 의례에 비해 도덕적으로 간섭하는 정도가 훨씬 크다. 유대교로부터 파생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신이라는 도덕적 감시자 덕분에 민족, 국가, 인종, 문화 차이를 넘어서서 거대한 집단을 신성한 결속으로 묶어놓을 수 있었다. 신은 구성원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리, 경전, 성서 같은 형태로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세세하게 규정한다. 유대교의 십계명, 성서, 코란을 보면 사소한 관습과 의무까지 세세하게 규정하고 지키지 않았을 때 받을 벌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신을 믿지 않는 불교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도덕적으로 엄격한 경향을 보인다. 불교 역시 10악이라 하여 죄악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천국과 지옥처럼 육도라는 사후 세계와 윤회의 관념이 도입된다. 불교의 사후 세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하늘 세계로 구성되고, 망자는 49일 동안 현생의 행동을 심판받는다. 재판 후 지옥행을 판결받은 사람은 뜨거운 팔열지옥과 추운 팔한지옥 중 하나로 떨어져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는다. 사후 세계를 묻는 제자의 질문에 그저 빙그레 웃던 붓다의 가르침에 비하면, 불교는 상당히 무서운 쪽으로 발전한 셈이다.
도덕적으로 엄격한 세계 종교의 신에 비하면, 수렵 채집 사회의 신은 그저 만사가 귀찮고 게으른 백수 같다. 물론 소규모 사회와 채집 사회의 신 역시 도덕적 역할을 맡기는 한다. 그들 역시 식량 공유, 양육, 혼인, 인간관계, 적에 대한 방어, 지위와 경쟁 등 다양한 영역에 맞서나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은 그저 조언자 정도의 역할만 맡는다. 동아프리카의 하드자족과 칼라하리의 산족같은 소규모 부족의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도덕에도 관심이 없다. 다른 소규모 사회도 사정은 비슷해서, 대체로 신은 도덕성과 단절되어 있다.
인류사의 수많은 신들은 이제 신화학과 비교종교학 책에서만 만날 수 있다. 소규모 사회가 점차 크고 복잡한 사회로 발전하면서, 게으름뱅이 신들은 사라지고 도덕적으로 엄격하고 까칠한 소수의 신만 남았다. 사회의 규모와 복잡성이 커지는 만큼 더 강한 사회적 결속이 요구되자, 도덕적 신들만이 종교전쟁에서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현재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같이 도덕적으로 감시하고 규제하는 소수의 신만이 세계 종교로서 군림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일부 신들만 도덕적으로 까칠한 존재가 된 걸까.
도덕적인 신이 탄생하는 데는 지리적인 요인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보통 도덕적으로 간섭하는 신은 물이 부족한 환경이나, 농경 및 유목 사회에 주로 나타난다. 즉, 구성원이 공동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환경이면서도 자원이 수렵채집 사회처럼 적거나 반대로 풍요롭지도 않아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집단의 생존이 무임승차자를 억제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에 양심을 규제하고 내면화하는 도구로 도덕적인 신이 선택된다. 유대교 역시 아브라함 계통의 사막 민족에게서 유래하였다.
이렇게 도덕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신이 탄생하는데 필요한 조건이 까다로운 점을 들어, 축의 시대(Axial Age, 기원전 800-300년) 이전에는 도덕적 신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축의 시대는 인류 지성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공자, 붓다, 예수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세계의 핵심 종교와 사상이 축의 시대 사상가들에 의해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빌론이나 이집트처럼 축의 시대 이전 많은 문화에서도 사회가 커지고 복잡해지며 신적인 영감에서 나온 도덕적 규제가 발달했다는 증거가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잘 알려진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 역시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에 대한 두려움과 정의의 신 샤마쉬의 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의 신들 또한 인간과 비슷한 말썽꾸러기 신들로 그려지지만, 그리스 신들 역시 공공의 도덕성을 이끌어내는데 힘을 썼다. 델로스가 기원전 2세기 중요한 해상 무역을 담당하면서, 원거리 무역의 협력 딜레마를 헤르메스와 헤라클레스의 초자연적 감시와 처벌로 극복했다는 시각이 있다. 중국 문명 역시 토속적인 신과 문화적인 영웅들을 숭배했고, 그 위에는 지고의 신인 ‘상제’가 다스리고 있었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의 하늘은 이 상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초자연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초자연적 처벌 가설'이란 신의 처벌에 대한 공포가 도덕적 자제를 위한 유전적 적응으로 자연선택된 것을 말한다. 사회가 크고 복잡해질수록 협력을 저해하는 사회적 갈등과 무임승차자 문제가 중요해진다. 그 해결 방법으로서 진화한 게 사후 세계에 받을 끔찍한 처벌이다. 두려움을 내면화하여 비도덕적인 행동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저주와 구원, 종말, 천국과 지옥, 윤회와 업보는 현대에 흔하지만 소규모 문화에는 드물다. 소규모 사회는 면대면 관계가 대부분이지만, 복잡한 사회일수록 익명성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익명성은 협력의 끈을 침식한다. 여러 실험을 통해 증명된 것처럼, 익명이라고 생각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인 행동과 부정행위를 한다. 하지만 실험실에 인간의 눈처럼 보이는 그림이 있으면 사람들의 부정행위가 줄고 선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관찰된다. 신을 상기시키는 장치가 있으면 관대함이 올라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하늘에서 지켜보는 눈’이 구체화된 도덕적 신이 협력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이유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더 이상 도킨스처럼 종교를 만악의 근원이자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볼 순 없다. 종교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종교는 자기희생과 부족주의가 결합된 지역적 이타주의다. 종교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원봉사 활동을 더 많이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하지만 종교적 선행은 신에 대한 믿음과는 사실상 관련이 없었다. 대신 동료 종교인들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이타성이 발현되는 것이 관찰된다. 종교인과 무신론자를 대상으로 한 게임 실험에서는, 사람들은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었고, 실제로 종교인들이 돈을 더 많이 돌려주었다. 종교적 선행은 비록 제한적이라 한계가 있지만, 종교가 집단의 경계를 더 넓혀가면서도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면 더 많은 선과 평화를 실현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종교의 단점도 존재한다. 종교는 공동체의 협력을 촉진하는 만큼이나 외부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와 공격성을 드러내기 쉽다. 인류의 사망 요인 중 가장 큰 것이 종교전쟁이라고 한다. 종교적 근본주의에 빠진 개인과 집단은 자신들의 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에게 자살 폭탄테러를 일으킨다. 근본주의가 무서운 것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 같이 소중한 가치들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무시된다는 점이다. 이슬람 문화권의 많은 여성들은 아직도 자유롭게 말하고, 입고, 사회 활동을 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세속주의와 정교분리가 되지 않은 사회는 필연적으로 폐쇄적이고 경직되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될 수밖에 없다.
종교가 보수주의와 잘 어울리는 이유는 많다. 종교가 제공하는 도덕적 제약과 금기, 집단의 응집성, 신의 권위에 대한 복종과 그로부터 느끼는 안도감, 집단 간 경쟁 같은 것들은 모두 보수주의와 잘 어울릴 만한 것들이다.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면 사회적 지원을 더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고 삶의 불안을 완화시켜 준다. 또 종교는 보수의 이익 추구 성향과 결합하기도 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면과 절제, 금욕 같은 기독교 정신이 서구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주장했다. 청교도 혁명으로 촉발된 프로테스탄티즘 정신은 미국의 개신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 기독교 역시 미국의 개신교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그래서 한국 교회가 거대화되고 보수화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의 보수주의자의 도덕 매트릭스인 권위와 전복, 충성과 배신, 고귀함과 추함을 알아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가정에서 겪는 도덕적인 경험이 국가관으로 어떻게 확대되고 정치적 입장에 반영되는지를 알아본다.